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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30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2/4)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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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2017년 6월 20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상상해 봅시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무엇으로 이루어질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고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겠죠. 가장 좋은 일도, 가장 나쁜 일도. 가능이 항상 좋은 소식인 것은 아닙니다. 노래를 들으며 1분 30초간 이 문장을 생각해보시죠.


(음악 : Lucienne Delyle, Tout est possible)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아르노 프랑수아.


아르노 프랑수아 : 안녕하세요, 아델 반 레트.


반 레트 : 철학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랑수아 : 감사합니다.


반 레트 : 당신은 푸아티에 대학의 교수죠. 당신은 최근에 『자유 문제의 변천』을 출간했습니다. 이건 베르그손이 1904-1905년에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의록입니다. 당신은 또한 최근에 벨 레트르 출판사에서 『건강에 대한 철학의 요소들』을 출간하였지요. 오늘 우리는 당신과 함께 베르그손의 이 텍스트 「가능과 실재」를 읽어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가능하다. 최악의 일까지 포함하여”라고 노래하는 뤼시엔느 드릴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종종 가능은 희망과 관련되지만, 여기서 가능은... 최악의 면모를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어디에 위치해 있나요?


프랑수아 : 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극도로 양면적인 말이죠. 우선 이건 자유에 대한 호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열려있고, 실재가 더 나은 것이 되기 위해 우리의 개입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처럼요. 이와 동시에 정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이미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의 형태로 단지 실현되기만을 기다리며 이미 존재한다는 말이죠. 이런 이유로 철학자들은 가능이라는 주제에 대해 매우 양면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자유를 옹호하고자 할 때, 어떤 이들은 가능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처럼요. 다른 이들은 가능이 자유의 숙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앙리 베르그손은 1859년에 태어나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르그손의 출간된 마지막 저서인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것은 191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강연과 논문들을 모은 모음집입니다. 3번째 텍스트를 제외한다면 말이죠.[역주 : 착오가 있는 듯하다. 6번째 텍스트인 「형이상학 입문」도 1903년에 출간된 텍스트이다.] 「가능과 실재」(1930)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이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이미 얘기한 적 있는 주제로 되돌아가보려 한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연속적 창조라는 주제이다. 나는 이 창조를 매 순간 경험한다고 믿는다. 내게 일어날 일의 세부사항을 떠올려봐도 소용없다. 일어나는 사건에 비하면 나의 표상은 어찌나 빈곤하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인가! 실현에 동반되는 무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어떤 회합에 참여해야 한다고 해보자. 나는 거기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테이블에 어떤 순서로 앉아 어떤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도착하여 내가 기대한 것과 꼭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 보자. 내가 그들이 말하리라 생각했던 것을 그들이 그대로 말한다고 해 보자. 이것들 전부는 나에게 독특하고 새로운 인상을 준다. 마치 이제는 그 장면이 예술가의 손길이 닿은 개성적인 선으로 그려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 장면에 대해 만들었던 이미지에 작별을 고하자! 그것은 이미 알려진 것들로 만들어 사전에 그려질 수 있는 단순한 병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림이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즈의 것과 같은 예술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독창적인 것이다.” 베르그손은 예를 드는 데 재주가 있군요. 아르노 프랑수아. 그가 기술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 삶의 매 순간을 구성하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입니다.


프랑수아 : 네, 이 텍스트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아주 중요하기도 하지요. 사실 베르그손이 답하고 있는 질문은 끊임없이 다시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보통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이 질문에 대답하곤 하지요. 베르그손처럼 새로움을 믿는 누군가, 창조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믿는 곳에서는 당신의 무지가 드러날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예상되어 있었고, 기입되어 있었어요. 단지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새로운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베르그손은 평생동안 창조와 새로움의 실재성을 증명해줄 수 있는 두드러지는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예술을 많이 언급합니다.  여기서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즈가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강연의 끝 부분에서는 라파엘로가 언급됩니다.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벨라스케즈 대신 라파엘로가 언급되지요. 하지만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엘리트적인 사례일 겁니다. 만인에 대한 것이 아니지요. 여기서 베르그손은 진정으로 매 순간 우리 모두에게 창조와 새로움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사례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이 회합의 사례입니다. 모든 것이 줄지어 있습니다. 사태가 펼쳐지면 우리는 그 사태가 본질, 예상된 것들, 개념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 텍스트의 첫 구절부터 자신이 이미 다룬 주제로 되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1930년에 말이죠. 이 글은 1930년 11월 스웨덴 학술지인 『노르딕 저널Nordisk Tidskrift』에 실린 글입니다. 왜 스웨덴 학술지인지 한 마디 해 주시죠. 이 학술지가 왜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가요?


프랑수아 : 네. 이 글에는 긴 내력이 있습니다. 이 글은 본래 1920년 옥스포드에서의 발표를 의해 쓰인 글이죠. 다음으로 이 글은 1927년 노벨상 수상 수락 연설을 위해 두 번째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스웨덴 학술지에 실린 것이죠. 베르그손은 노벨상 시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이 글을 대독하도록 했습니다. 3년 뒤 이 글은 스웨덴 학술지에 실리고, 종국에는 우리가 이번주 내내 다루게 될 연설과 강연 모음집, 1934년의 『사유와 운동』에 수록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이 글은 베르그손 사유의 가장 늦은 시기에 쓰인 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가 이미 다루었던 주제로 되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지요. 『창조적 진화』와 다른 글들에서 다루어진 주제인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연속적 창조”라는 주제 말입니다. 이 관념은 베르그손의 글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에게는 아주 친근한 관념입니다. 베르그손은 왜 다시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새로이 기여할 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프랑수아 : 정확히 말해,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반론에 직면했습니다. 베르그손은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였지요. 모든 형태의 결정론, 모든 형태의 과학적 실증주의가 언제나 베르그손과 대립하고 있었고, 베르그손은 평생동안 싸우고 논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또한 베르그손은 우리 지성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의 구조 자체가 만들어진 방식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사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창조를 사유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창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증명하려 계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시도를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독창성은 새로움을 가능으로부터 떼어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가능은 새로움이 아니죠.


프랑수아 : 맞습니다. 가능은 미래보다는 과거와 훨씬 더 관련이 있습니다.


반 레트 : 아주 반직관적이군요?


프랑수아 : 네 완전히 반직관적이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말하자면 조금 더 고차적인 의미로는 직관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실재성을 참조한다면 말이죠. 사실 우리가 가능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일어난 일을 회고적으로 투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이 언제나 이미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사실은 시간이 그 일을 실어다 준 것이고, 시간이 창조의 새로움을 전달해주는 것이죠. 우리는 단지 사후적으로만, 조건법 과거 시제로만, 회고적으로만, 시간이 실어다 준 일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반 레트 : 음. 당신은 아주 간단하고 당연하게 말하시는군요. 하지만 사실 이 지점은 매우 섬세하고 복잡합니다. 어떻게 가능이 과거의 편에 위치할 수 있나요? 어떤 사태가 과거에, 음 어떤 사태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 그러니까 가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식에도, 사실에도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인가요?


프랑수아 : 가능의 관념은 인식에도, 사실에도 아무 것도 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해해야 하는 점은... 음.. 베르그손이 펜을 들 때... 가능을 대하는 하나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칸트에서 이 전통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 전통에 따르면 가능성은 비-모순을 의미합니다.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말은 단순히 그것이 모순적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논리적인, 더 나아가 심지어 논리주의적인 우리의 사유는 비모순적인 모든 것이 어떤 신의 지성 속이나 어떤 예지적인 천상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행동한다는 것은 이러한 창백한, 추상적인 존재, 즉 가능들 중 하나를 떼어내어,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이 되지요. 나머지 모든 가능들을 영원히 비실재 속에 남아있게 만들면서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렇게 씁니다. “가능을 그것의 자리로 되돌려보내자. 그러면 진화는 계획의 실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고,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자유에 무제한적인 영역이 허락될 것이다.” 가능을 현재와 미래로부터 잘라내어 그것을... 과거에 둔다는 사실이, 음 이 점은 조금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지요. 이 점은 여전히 반직관적이고, 가능을 과거 쪽에 둔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니까요. 여하간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어떤 점에서 이 사실이 자유의, 비결정성의 증대를 가져다주는 것인가요?


프랑수아 : 음, 그 이유는,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가 행동할 때, 아니 창조할 때, 즉 이전에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혹은 아마도 개요나 전조의 형태로만 존재했지 결코 그것이 일단 실현된 후에 갖게 될 구조에 따라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을 나타나게 할 때, 베르그손의 생각은 여기서 가능이 우리가 가진 자유에 대항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가능은 말하자면 이케아의 그림이나 작은 설명서 같은 것이니까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케아에서 가구를 설치할 때에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이미 실현해야 할 가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가구를 방에 더하는 일일 뿐입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행동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이케아 설명서가 미리 만들어져 있음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을 생각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만 시간이 진정으로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하지만 행동이 가능해야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프랑수아 : 행동이 가능하다면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능하다는 말은,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불가능하지 않다non-impossible”는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자주 사람들이 “불가능하지 않음”과 “가능함”을 혼동한다고 말하지요. 여기서 “불가능하지 않음”은 어떤 실질적인 장애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여기서 “가능”은 조금 더 두드러진 의미를 갖는 것, 말하자면 대문자 P를 가진 것입니다. 칸트의 가능, 라이프니츠의 가능 같은 것들이죠. 이것은 미래 사건들의 모든 성질들을 이미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천상계에, 어떤 신적인 지성 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되는 어떤 실재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 레트 : 자, 반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정확성을 기해보도록 합시다. 라이프니츠를 예로 들어보죠. 라이프니츠는 가능세계의 사상가입니다. 신은 모든 가능세계들, 자신의 처분 하에 놓인 서로 다른 세계들의 모든 가능한 조합들을 검토하고, 그 중 하나의 세계를 존재의 상태로, 그러니까 가능에서 존재로 이행하도록 합니다. 최선이라는 기준에 따라서요. 이건 도덕적 기준이죠. 최선의 세계. 우리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계는 존재하는 세계죠. 우리가 그 속에 존재하니까요. 이 설명의 문제는, 그러니까 베르그손이 라이프니츠에게 제기하는 반론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우리의 처분 하에 있는 가능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 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프랑수아 :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중요한 모델입니다. 그는 베르그손의 강연 전체에 걸쳐 베르그손의 대척점에 위치한 모델이죠. 가능이라는 말이 우선 라이프니츠가 사용했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제기한 반론이 어떤 것일까요? 사실 베르그손의 반론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 라이프니츠는 실재보다 가능에 더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반면,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반대로 실재는 가능에 비해 어떤 증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가능이 실재보다 더 적은 존재를 갖는다고요.


프랑수아 :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깔대기 도식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적인 선택, 라이프니츠의 신이 내리는 선택은 깔대기 모양의 선택입니다. 수많은 가능들이 존재하고, 단 하나의 가능, 최선의 가능만이 실현되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는 거꾸로 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능보다는 실재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실재가 훨씬 더 풍부한 시간, 창조, 새로움을 담고 있는 반면, 가능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니까요. 다음으로 두 번째 반론은 실재가 가능과 닮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으로는, 신이 하나의 가능을 실현할 때 신은 단지 이미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던 것에 추가적인 피와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재생산할 뿐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유령같은 도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가능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가능에 피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을 창조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이미 주어진 것, 이미 예상된 것, 어떤 형태로도 이미 존재하던 것과 전혀 닮지 않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요.


반 레트 : 그러니까 가능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새로움의 도래를 막는 것이군요.


프랑수아 : 음 맞습니다. 그 문제는 새로움의 도래를 막는 것입니다. 이 강연의 주요한 목적은 반대로 새로움의 도래를 막아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활동에서 새로움의 도래를 막아서는 장애물을요. 진정으로 실천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이 강연은 말하자면 자유liberté를 해방하려libérer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로 이 텍스트, 「가능과 실재」의 다른 발췌문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여기에도 아주 생생한 사례가 등장하는데요. 그것은 하나의 대화입니다. 물론 가상의 대화이지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을 법한... 어쨌든 “가능”했던 대화죠(웃음). 그것은 베르그손과, 문학의 미래를 묻는 기자 사이의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생은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 같은 것이 아니다.” 들어보시죠.


(음악 : Vincent d’Indy, Sarabande et Menuet)


조르주 클래스 : 세계대전 중에 몇몇 신문과 잡지들은 당시의 끔찍한 불안을 외면하고 후에 평화가 복구되었을 때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였다. 그것들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학의 미래였다. 어느 날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물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하면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는 물었다. “적어도 당신은 어떤 가능한 방향들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태를 상세히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합시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당신은 적어도 총괄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겠지요. 예컨대, 내일의 위대한 희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대답을 듣고 내 대화 상대방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언제나 기억할 것이다. “만일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무엇일지 제가 안다면, 저는 그것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미래의 작품을 어떤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에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이미 철학과 오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가 보기에 나는 철학에서 이 수납장의 열쇠를 얻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 작품은 아직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 재능있는 사람이나 천재가 나타나면 그가 어떤 작품을 창조하겠지요. 그때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고, 그를 통해 호고적으로, 혹은 소급적으로 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측불가능하고 새로운 실재가 창조됨에 따라, 실재의 이미지가 그 배후의 무규정적 과거 속으로 반사됩니다. 그렇게 하여 실재는 언제나 가능했던 것이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이 순간에 언제나 가능했던 것이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 실재의 가능성이 그 실재성에 선행하지 않으나, 일단 실재가 나타나고 나면 선행하게 될 것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능은 과거 속에 위치한 현재의 신기루 같은 것이죠.”


(음악 계속)


반 레트 : 여러분은 지금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을 듣고 계십니다. 10시 17분입니다. 오늘은 아르노 프랑수아와 함께 베르그손의 『사유와 운동』 방송의 두 번째 편, 「가능과 실재」를 읽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글이네요. 아주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글은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제기하는 문제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네요. “가능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리고 베르그손은 “가능이 과거 속에 위치한 현재의 신기루”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가능을 정의하는 데 미래는 전혀 쓰이지 않는군요. 자,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시죠.


프랑수아 : 이 텍스트는 유머로 가득한 텍스트입니다. 베르그손에게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유머가 많이 있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베르그손이 “만일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무엇일지 제가 안다면, 저는 그것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건 허영심이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전에 갖지 못했던 희곡 작가의 재능을 단번에 갖추게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더 진지하게도, 더 놀랍게도,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내가 그것을 안다면, 나는 그것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일 것이다”라는 말이지요.


반 레트 : 그렇군요.


프랑수아 :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어떤 것일지 안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도 이 말을 하는 우리와 이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저자를 구분해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앎과 자료를 모아들였다는 말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 작품이 어떤 것일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현재가 미래로 진입하는 지점에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면 이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의 사례는 왜 제시된 것인가요?


프랑수아 : 이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이라는 사례는 극도로 생생한 사례입니다. 사실 베르그손이 “내가 철학자로서”라고 말할 때 그는 학문에 대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를 이 수납장의 열쇠를 가진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신의 지성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들입니다. 도래할 가능성들, 결코 실현되지 않았던 가능성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유사한 지점을 지닌 모든 주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철학자는 이 수납장의 열쇠를 열어서 거기에 선재하는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단 하나만을, 최선의 가능성만을 끌어내 실현되도록 하는 사람이겠지요.


반 레트 : 네. 가능의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베르그손은 인식 속에서 우리와 일체를 이루는 환상들을 규탄하려 합니다. 그것은 도래할 일의 예측이 가능하다는 환상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새로움의 정 반대에 위치합니다.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결정론은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요. 그런데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바로 이 점에서 가능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능은 이미 존재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이미 존재했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것은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프랑수아 : 그 수납장이 사실은 텅 비어있는 것이거나, 혹은 그것이 무언가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생산된 것의 기록보관소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일어날 일에 대한 조금의 정보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가능”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잘못 사용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가능이라는 말이 인간적 필요에 상응하는 바가 있지 않나요?


프랑수아 : 자,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의미에서 가능에 대해 베르그손이 행하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었다”라는 의미에서요. 책과 같이...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환상은 우리의 정신에 자연스러운, 적어도 베르그손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가능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셨지요. 이 필요는 분명히 우리 정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행동이 이루어질 때 행동도 그 자체도 자신의 뒤편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투사합니다. 즉 베르그손은 자유에 대한 그의 철학 속에서 가능 개념의 어떤 용법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가 이러한 가능성의 회고적인 투사인 한에서 자유는 모든 가능의 밖에서 전개되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행동은 창조합니다. 베르그손에게는 이 점이 중요한 핵심이죠.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행동이 실재를 창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를 통해 또한 가능성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생각을 아주 멀리까지 밀고 나갑니다. 그는 심지어 어떤 특정한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음... 베르그손은 위대한 개인들을 믿었죠. 이 점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무튼 베르그손은 위대한 개인들을 믿었습니다. 여하간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특정한 개인들이 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영웅이나, 위인 같은 사람들 말인가요?


프랑수아 : 음. 베르그손이 「가능과 실재」를 쓸 때 그는 아직 도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향해 거의 다 도착해 있었죠. 이 마지막 책은 실천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것으로, 세 가지 영역에, 즉 도덕과 종교, 그리고 정치의 영역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 세 영역에 존재하는 몇몇 개인들의 행동이 그 자체로 창조적이라고, 그러니까 예술가의 경우에서처럼 작품을 창조할 뿐 아니라 창조자를 창조하기도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자들을 창조하는 것이 베르그손이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위인”의 기준이죠. 그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창조하는 것이고, 심지어 이전에는 말 그대로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태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역사를 사유하기 위해 진정으로 극단적인 추론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반 레트 : 하지만 그 위인들이 가능을 입증하면 가능은 동일하게 남겠군요. 가능은 언제나 도래할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에 속하니까요. 이 점을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실재적인 것보다 어떤 가능이 선행하여 이 가능을 우리가 실재의 상태로 도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가능하다, 혹은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어떤 정신의 작업입니다. 이 정신은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하는, 아니 사후적으로 말하는 정신입니다. “이 일은 가능한 일이었어. 결국 일어났으니까.” 베르그손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례를 드는데요. 그것은 “햄릿”의 사례입니다. 당신은 창조자 애기를 하셨죠. 베르그손은 「가능과 실재」에서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가능의 형태로 그려졌을 정신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해 그 작품의 실재를 창조해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을법한 반론에 응답합니다. 그 반론은 이러한 것입니다. 『햄릿』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쓸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앎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다른 『햄릿』을 써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응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정신은 정의상 셰익스피어 자신이 될 것이다. 이 정신이 셰익스피어 이전에 나타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보아야 부질없다. 그때 당신은 이 극의 모든 세부사항을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그 세부사항을 보충해감에 따라, 이 셰익스피어의 선행자는 셰익스피어가 사유할 것을 모두 사유하고, 셰익스피어가 느낄 것을 모두 느끼며, 셰익스피어가 알게 될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지각할 것을 모두 지각하며, 결과적으로 셰익스피어와 동일한 시공간의 지점을 점유하고 동일한 육체와 동일한 영혼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 자신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작품은 도래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군요. 햄릿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존재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논변을 가장 엄밀한 형태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변이 예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하기 몇십년 전인 1570년대으로 가서, 햄릿을 예측하려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시기 영국의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을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부르주아의 조건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각 문장을 쓸 때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의 모든 심리적 특성들, 그의 기질들, 그의 성격들을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햄릿이 어떤 것일지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자료를 축적해감에 따라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영혼에 침투해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더 많은 자료들을 축적할수록 우리는 한층 더 셰익스피어 자신이 될 것입니다. 모든 자료들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요? 우리는 햄릿을 쓰고 있는 셰익스피어가 되겠죠. 이를 기술철학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가능을 분석한다는 것은 이 가능을 하나의 실재로 변형시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적 지성의 왕좌에 앉아 스피노자의 과정적 실재 속에 잠겨든 가능입니다.


반 레트 : “햄릿”의 이 사례 이면에는 아주 본질적인 철학적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론과 자유를 대립시키는 논쟁이죠. 결국 베르그손이 암묵적으로 답하고 있는 반론은 결정론자의 반론이죠. 이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만요. 새로움이나 순수 창조 행위에 대해 말씀하셨죠. 하지만 새로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제일 원인이나 작용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물론이죠. 그게 “햄릿”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왜 『햄릿』을 만들었는지, 창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로 이어지는 모든 원인을 알고 나면, 우리는 창조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은 순수한 자유의 행위인 창조 행위를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프랑수아 : 정확합니다. 결정론과 싸우기 위해서는 가능의 이론을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금 전에 사르트르 얘기를 했었죠. 사르트르의 경우가 그렇고, 키에르케고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들을 비판합니다. 이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들을 알지 못한 채로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죠. 이들이 자유를 가능한 것들 사이의 선택으로 환원했다고, 비결정성을 가능한 것들 간의 갈등, 싸움, 경쟁으로 환원했다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우리가 읽고 있는 강연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반대로 베르그손은, 베르그손의 제스쳐는 이러한 사유의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고(웃음), 자유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모든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여전히 가능을 비판하면서도 결정론자로 남아있는 사람과 대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스피노자입니다. 이쪽 편, 그러니까 가능을 비판하는 편에도 여전히 싸움터가 있습니다.


반 레트 : 그렇군요.


프랑수아 : 가능에 대한 결정론자의 비판에 대항한 싸움이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가능에 대한 비판을 시간 외적인 필연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한 반면,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가능을 비판하는 것이 시간이, 그러니까 창조와 새로움이 도래하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반 레트 : 베르그손과 스피노자 사이에서 많은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군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반 레트 :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에 대해서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반 레트 : 맞아요. 스피노자가 받아들이는 자유의 형태는 우리를 결정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죠. 베르그손도 이 정의에 찬동할 수 있겠군요? 단지 스피노자는 자유의 행위 자체를 사유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구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과 스피노자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베르그손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베르그손의 유명한 구절이 있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펼 때마다 나는 집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낀다.” 베르그손은 강의에서 스피노자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베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말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사유한 반면, 베르그손 자신은 모든 것을 시간의 관점에서 사유했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는 정말로


반 레트 : 어떤 차이죠?


프랑수아 : 음... 스피노자가 신의, 실체의 자기 전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가능을 비판하고 과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피노자는 과정성을 영원성이라는 존재 방식에 따라 사유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원인에서 출발하는 연역가능성입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이미


반 레트 : 그것은 추상적인 한에서 논리적인 것인 반면, 베르그손에게 과정성은 지속이고 체험된 시간이죠.


프랑수아 :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스피노자는 굉장한 철학자구요. 그것은 비시간적인 과정성입니다. 베르그손에게서는 과정성이 시간적이죠.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시간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는 지속과 영원성을 두 가지 존재 방식으로 대립시킵니다. 그는 시간을 지속에 대한 단순한 측정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지속과 영원 사이에서는 교류가 불가능합니다. 지속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영원한 존재는 정리théorème의 귀결이라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반 레트 : 그러면 베르그손에게는 “영원”이라는 개념은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인가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이 보기에 영원은 다소간 “가능”이나 “진리”와 같은 방식의 실재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 하에 시간의 전개로부터 나타나는 회고적 신기루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이 이런 지점에서 천재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단어들을 이용해...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단어들이요.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해부해서 그 단어가 어떤 점에서 아무런 실재도 나타내지 못하는 “언어의 편이성”이라는 환상에 속하는지를 보여주곤 하지요. 이런 단어는 그가 “거짓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베르그손은 철학사가 일련의 거짓 문제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짓 문제들은 정신의 관점에서는 아주 잘 작동하는 문제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거짓 문제”의 정의에 대해서, 조르주 클래스가 읽어주는 「가능과 실재」의 다른 발췌문을 잘 들어보시죠.


클래스 : 내가 보기에는 거짓 문제들이 존재하며, 이 문제들이 형이상학을 불안케 하는 문제들이다. ... 첫 번째 문제는 왜 존재가 있으며, 왜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존재하는지를 묻는 문제이다. ...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무엇가가, 혹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을 수 있었다”는 문장을 분석해 보라. 당신은 당신이 다루고 있는 것이 전혀 관념이 아니라 단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서 “아무것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아무것도”는 우리가 찾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의 부재를 가리킨다. 사실 경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공허를 보여준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공허는 제한적일 것이고, 윤곽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여전히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공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충만만을 지각하며, 심지어는 충만만을 생각한다.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이 그것을 대치하는 경우에만 사라진다. 따라서 제거는 대치를 의미한다. ... 우리가 왜 존재가 있는지, 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왜 세계가 혹은 신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무가 존재하지 않는지 묻는다면, 결국 형이상학적 문제들 가운데 우리를 가장 불안에 빠뜨리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잠재적으로 하나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음악 : Keith Jarrett, Heartland)


반 레트 : 10시 30분입니다. 키스 자렛, 베르그손, 조르주 클래스였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아르노 프랑수아가 저와 함께 「가능과 실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글은 베르그손이 출간한 마지막 강연 모음집인 『사유와 운동』에 수록된 강연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사유와 운동』을 함께 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들은 구절은 “거짓 문제”를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이 글을 읽고 나니 저도 모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철학 텍스트들을, “이거 혹시 거짓 문제 아니야?”라고 혼잣말하면서요. 그러니까 “존재가 있는가”, “왜 무가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는 텍스트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거짓 문제 아닌가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의 관점으로는, 맞습니다. 그는 이 질문들을 하나의 불안케하는 문제로 전환시킵니다. 불안. 베르그손은 불안의 철학자가 아니지만, 불안의 자리를 마련해둡니다. 그는 불안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불안이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는지를 알죠. 흥미로운 점은, 베르그손이 불안을 위대한 불안의 사상가들, 즉 하이데거, 사르트르, 그리고 반복하건대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지점에 위치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불안이 무와 대면할 때, 가능과 대면할 때 생겨난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아챘습니다. 음, 그리고 “거짓 문제”와 “잘못 제기된 문제” 사이의 이 구분에 대해 말해봅시다. 이 구분이 아주 어려운 구분이라는 점을 말해두어야 겠군요. 사실 베르그손의 주석가들조차 이 구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 강연에서 거짓 문제는 무와 무질서에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고, 잘못 제기된 문제는 가능에 관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 레트 : 양자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군요.


프랑수아 :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구제가능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행할 수 있고, 어떤 지점까지는 이 문제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의 문제인 한에서 잘못 제기된 문제입니다. 해석자들 사이의 논의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죠. 베르그손에서 가장 나쁜 것은 무인가 가능인가. 이 텍스트에 따르면 확실히 가능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소간의 철학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으로 또한 흥미로운 점은,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가능의 문제가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다른 두 거짓 문제들에 비교해 볼때 말입니다. 이 거짓 문제들, 무의 문제와 무질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의 문제가 가능의 문제의 근저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정 반대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것은 다소 미묘한 질문입니다.


반 레트 : 네. 하지만, 음 그래도 정확히 말해봅시다. 베르그손에게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베르그손은 무의 문제가 거짓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전 철학사의 동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베르그손을 해석할 수 있죠. 그 경우에는 “부정적인 관념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죠?


반 레트 : 네, 그것 말이죠.


프랑수아 : 그건 종종 제시되는 해석이죠. 장 발과 장켈레비치가 그런 해석을 내립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하나의 비판입니다. 부정적인 관념들에 대한 비판이요. 무의 관념을 그 모체로 하는 일군의 관념들이 있다고 말이죠. 이 구절에서, 「가능과 실재」라는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이 모든 관념들의 모체가 가능의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 가능의 관념일까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그 이유는 가능의 관념이 창조의 확인에 대한 반정립 관념이기 때문이죠. 그건 앞서 강연의 시작부에 언급된 창조와 제작 사이의 혼동입니다. 가능을 믿는 것은 자연이 손을, 팔을, 눈을, 생명체를 만들 때 자연이 제작을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연은 창조를 하는 것인데 말이죠. 가능을 믿는 것은 부품들을 덧붙여서 만들어내는 이 작은 이케아 가구 설명서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능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일입니다. 그것은 도처에서 제작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창조를 발견해야 합니다.


반 레트 : 사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르노 프랑수아? 그러니까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가능이 사실은 우리 추론의 한 양상을 가리키는 논리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논리적 방식들 가운데 무언가를 가능한 것으로 여기지요. 그러니까 이에 따라 가능은 지성에 속하는 것이고, 우리가 어제 프레데릭 보름스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지성, 혹은 오성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 가능은, 가능의 관념 자체는 우리가 실재의 특수성을 놓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이죠.


프랑수아 : 네네. 실제로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논리적 용어로서의 가능이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라이프니츠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전통 전체입니다. 오늘날에 그것은 양상논리라고 불리는 논리학입니다. 가능은 양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죠. 베르그손이 보기에 실제로 가능의 관념에는 이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미래의 실재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개념화된 가능입니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가능은 행동이 일단 수행된 뒤에 행동 뒤로 던져진 것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선인들은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이전에는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가능한 것이 된 행동들을 창조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것이 구제가능한 의미의 가능입니다. 이러한 가능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반 레트 : 이 거짓 문제와 잘못 제기된 문제, 즉 가능의 문제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베르그손이 드는 무질서의 사례일 것입니다. 무질서는 단지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이 아닌 질서입니다. 우리가 무질서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죠.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내세우는 우리의 범주들이 타당하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무질서로, 즉 “놀라운 질서”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아마도 논리적인 범주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 사이의 갈등이 잘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프랑수아 : 베르그손이 보기에 무질서는 거짓 관념, 잘못된 관념입니다. 우리는 무질서에 대한 관념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이것이 인식론의 중심적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질서가 아니라 두 질서가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형이상학적 영향력을 부과합니다. 우리가 무질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질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무질서의 관념을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모든 정치인은 국가가 질서를 부여하며, 국가가 없다면 카오스일 것이라고, 무질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무질서가 질서에 선행한다는 전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무질서의 관념을 비판하여 무질서라는 이 두려운 기반을 제거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국가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반 레트 : 당신이 정치의 예를 드셨으니, 이제 제기되는 문제는 도덕적 영역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의 관점에서는, 그가 가능을 자유를 사유할 수 있는 타당한 범주에서 제거하는 순간, 자유는 가능들 사이의 선택이 아니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움을, 창조를 사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분출”이 나타날까요? 이건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기원을 가지는 것일까요? 이제 가능이 과거에 각인되었으므로, 이 도덕적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들을 「가능과 실재」의 마지막 인용문에서 베르그손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훌륭한 인용문을 들어보시죠.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에게 창조가 환희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음악 : Keith Jarrett, Time on my hands)


클래스 : 사실에만 밀착해 보자. 시간은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시간의 비존재, 혹은 시간의 타락이 증명될 때까지, 우리는 단순히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이 실제로 분출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이를 통해 철학은 동적인 현상계에서 어떤 절대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더한 환희와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한 환희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우리 눈 앞에서 스스로를 발명하는 실재가 예술이 이따금 운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야기하는 만족감들을 우리 각자에게 끊임없이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재는 우리 필요의 항상성에 의해 최면에 걸린 우리의 감관이 처음에 포착했던 고정성과 단조로움 너머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사물의 새로움과 사물의 동적 독창성을 드러내어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더 더한 힘을 느끼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기원에 존재하고 우리의 눈 앞에서 계속되고 있는 위대한 창조의 작업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 능력은 자신을 다시 붙잡음으로써 강렬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자연적 필연성의 노예로서 복종의 태도로 굴복하던 우리들은 더 위대한 주인에 연결된 주인들로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연구의 결론이다. 가능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사변을 단순한 유희로 여기는 것을 삼가도록 하자. 이것은 좋은 삶에 대한 하나의 준비일 수 있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이러한 삶에 대한 준비를 베르그손은 이 텍스트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군요. 아르노 프랑수아. 말미에서 그는 이 글의 목표가 단지 철학사 속에 기입된 의미 내적으로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베르그손은 철학사와 이렇게 거리를 두지요. 이 텍스트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진정으로 좋은 삶에 대한 준비입니다. 그 말인즉슨, 이러한 성찰이 베르그손에게는 이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프랑수아 : 정확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점이 바로 무와 무질서에 대한 베르그손의 다른 성찰들에 비해 「가능과 실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말했지만, 이 강연의 목적은 실천적인 사유에 있습니다. 실천철학이요.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좋은 삶을 준비하기 위한 두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삶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더한 환희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힘과 환희입니다. 환희의 개념은 익숙하죠. 베르그손은 환희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합니다. 베르그손은 환희가 창조의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창조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든 환희가 존재하지요. 우리는 환희를 통해 창조를 알아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베르그손에게 궁극의 창조는 사물의 창조도, 작품의 창조도 아니고, 다른 창조자들의 창조입니다. 『두 원천』에서 위대한 선인들이 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힘은 더 복잡합니다. 명백히 베르그손은 어떤 신비로운 힘의 이론가가 아닙니다.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르그손에게 거짓 문제들은 참된 문제들로 대체될 운명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가능의 문제가 우리가 이런 일을 하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능의 관념 속에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구제가능한” 측면이 존재하는 한에서입니다. 참된 문제들에 대해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그의 작업의 특정한 국면에서 참된 문제들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요. 그것은 『창조적 진화』 3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참된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유, 인격성,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 신체의 분해 뒤에도 인격이 존속할 가능성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좋은 삶에 기여하는 힘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려 합니다. 베르그손이 제시한 예를 살펴보자면,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입니다. 따라서 더 강하다는 것은 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이 우리에 대해 갖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스스로의 자리인 동시에, 음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말이죠. 한 인간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인간인 한에서 다른 인간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니까요. 더 나아가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연 자체에 대한 책임을 가집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자리는 다른 종들을 마주한 자연 속의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겸허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분명히 여기에서도 우리는 현대적인 문제의식에 위치해 있습니다.


반 레트 : 음... 베르그손의 성찰들 가운데 도덕적 측면은 가려져 있는 건가요? 왜냐하면, 자 보세요. 베르그손이 이전에 말했던 모든 내용의 도덕적 함축을 알기 위해서는 상당해 오래, 무엇보다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기다려야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르노 프랑수아, 이는 우리가 오늘 관심을 갖는 내용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행위 말입니다. 창조가 우리를 강하게 해준다. 창조가 우리를 환희로 채운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자유로운 행위가 “가능”한 건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말이죠.


프랑수아 : 음... 자유로운 행위는 분명히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핵심이지만, 이는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분명히 이는 우리의 지성에 실망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은 무해한, 외적인, 단순히 이론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은 사물을 담론 속에 가두는 일입니다. 정의 자체 속에는 이미 통제asservissement의 행위가 존재합니다. 이 결론은...


반 레트 : 그러면 정의하는 대신 기술해야겠네요. 아니면 명명한다거나...


프랑수아 : “특징지어야” 한다고 합시다. 네. 특징짓기. 특징짓기는 사물이 변동함에 따라 언제나 더 길어질 수 있는 특징들의 목록을 개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정의한다는 말은... 이미 어원이 그 점을 드러내고 있지요. 정의는 한계를 그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사물이 지금 그러한 것과 다른 사물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이 다음에 될 수 있는 무언가는 해로운 것이 됩니다.


반 레트 : 네. 당신은 그것이 “실망스럽다”고 하셨죠. 정말 그렇습니다. 


프랑수아 : 네 그렇습니다. 확실히요.


반 레트 : 논리적인 추론, 심지어는 철학적인 추론의 관점에서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어떻게 정의할 수도 없는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지요? 그건 마치 사실 앞에서 회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랑수아 : 하지만 동시에 베르그손은 자유의 특징짓기에 대해 아주 명료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는 자유로운 행위의 특정한 성격, 혹은 뉘앙스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철학자가 자유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으려면 먼저 자유롭게 행위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행위가 없다면 자유의 철학도 없겠죠. 그럼 이 뉘앙스는 무엇일까요? 그건 매우 정확합니다. 그건 자아와의 닮음입니다. 그 행위가 나와 닮아있다는 말을 다른 용어로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그것은 “내 영혼의 자기성mienneté”이라고요.


반 레트 : 당신이 베르그손의 인격 개념, 성격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군요.


프랑수아 :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어원을 따져보자면, 성격은 “내 자아가 내 행동에 남긴 서명”입니다. 베르그손에서 자아의 물음은 내가 자연 법칙에 균열을 내느냐, 혹은 내가 오성에 균열을 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행동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나의 것이냐. 사실 어쩌면 이것이 자유 관념이 갖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이고, 직관적인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결단을 내릴 때 행위했던 것이 정말 나냐. 친구의, 엄마의, 아빠의 조언이 나에게 작용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아닌가...


반 레트 : 이 질문이 무한히 다시 제기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베르그손의 자아는 정의가능하다거나 닫히고 폐쇄적인 실체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자아가 행위한다면, 행위한 것이 이 자아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


프랑수아 : 음 그건...


반 레트 : 어쩌면 환희를 통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프랑수아 : 네 이미 환희는 그 기준이 됩니다. 더 많은 창조가 존재할수록 더 많은 환희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한 베르그손의 “성격” 개념은 곧바로 “역사” 개념으로 대체됩니다. 개인적 역사라는 의미에서요. 내 자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내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내 성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역사입니다. 내 역사는 내 과거이지만, 이 과거는 내가 언제나 굴절시킬 수 있는 과거입니다. 개인의 여정 속에는, 개인의 운명 속에는 그 우여곡절의 선들이 그리는, 급작스럽지는 않고 점진적인 전환들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어쨌건 간에, 환희가 창조 행위의 증상, 혹은 사실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환희는 창조 행위가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일수록 더 강렬하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군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라는 말을 혁신을 위해, 자기로부터 떠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해 항구적으로 자기를 갱신한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여기서 자기에 의한 자기에 창조는 자기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창조자로 만드는 창조와 불가분한 창조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이 창조 자체 안에 타자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르그손의 진정한 최종적 귀결일 것입니다.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는 창조자의 창조입니다.


반 레트 : 여기 있는 환희는... 여기에 환희가 있는 거군요. 그건 꼭 기원일 필요는 없군요. 우리는 환희를 확인하고, 환희는 존재하지만 왜 존재하지는 모르는 건가요.


프랑수아 : 아니요. 음... 우리가 조금 뒤에 듣게 될 다른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희가 존재하지요. 하지만 환희가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갖는 사실입니다. 그건... 베르그손은 1911년의 강연[「의식과 생」]을 정확히 이 지점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환희의 사실 자체는 생이 전진하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음악 : Charles Trenet, Y'a d'la joie)


반 레트 : 오늘 우리에게 베르그손에 대해 이야기해주러 오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다시 언급하자면, 아르노 프랑수아는 푸아티에 대학의 교수입니다. 프랑수아가 편집하고 주석을 달고 소개한 『자유 문제의 변천 : 1904-1905년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베르그손, 쇼펜하우어, 니체 : 의지와 실재』를, 벨 레트르 출판사에서는 『건강에 대한 철학의 요소들』을 출판하였습니다.


(음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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