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2월, 플로리스 드라트르에게 보내는 편지

 

… 이렇게 저는 버틀러의 진화 관념에, 그리고 그의 몇몇 관점이 제 관념과 유사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처음에 말했듯, 저는 1914년 이전에는 새뮤얼 버틀러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창조적 진화』는 1907년에 출간되었고, 『물질과 기억』은 1896년이었죠). 제가 버틀러라는 이름을 몰랐던 이유는, 그 이름이 철학사에도, 심지어는 제가 『창조적 진화』 출간 전에 알고 있던 진화나 유전 등에 대한 수많은 논의 속에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1914년 봄, 제가 에딘버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에(지포드 강의), 젊고 유쾌한 Arthur D. Darbishire가 버틀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똑똑한 인물이었죠.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딘버러를 떠날 때, 버틀러의 책을 여러 권 들고 왔지요. 그렇지만 전쟁이 발발했고, 20년이 넘게 저는 이 작가가 아니라 다른 일에 신경써야 했습니다. 요즘에야 비로소 J.-B. Fort가 디펜스할 흥미로운 논문 덕에, 에딘버러에서 가져온 책들 중, 과학과 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을 읽어볼 수 있었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명과 습관』, 『진화의 어제와 오늘』, 『알려진 신과 알려지지 않은 신』 같은 책을요.

 

저는 이 책들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버틀러는 놀랍도록 지적이고, 비판적이면서도 풍자적이며, 유머로 가득 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다윈주의의 몇몇 약점들을 포착했던 공로가 있습니다. [당시에] 다윈주의가 맹목적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되거나, 아니면 언제나 과학적인 것은 아닌 이유들로 거부되었던 데 비하면요.

 

진화, 생, 기억, 습관과 같은 주제에서는, 버틀러의 관점과 제가 제시했던 관점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버틀러의 설명들 가운데 실증적인 부분에 종종 결여되어 있는 정확성을 부여해 보자면, 저는 거의 모든 지점에서 제 입장과 그의 입장이 완전히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윈 자신이 제시했던 그래도의 다윈주의가 불충분하다는 공통적인 생각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그렇지만 본래의 다윈주의가 지닌 이러한 불충분성은 오래 전부터 거의 모든 생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지적해 왔던 것입니다. 반복하건대, 다른 지점에서는 완전한 대립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것들을 상세히 검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지점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했듯, 버틀러는 다윈주의가 생존 경쟁과 자연 선택을 종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 원리로 여긴다는 데서 오류를 범했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두 원리들은 기껏해야 이러저러한 변이들의 생존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변이들 자체의 출현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변이들의 출현은 단순한 우연에 맡겨집니다. 이 사실이 명증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다윈주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불충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버틀러가 이 점을 확인하고, 명확히 정식화하여, 변이들의 탄생을 단순한 우연에 맡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확인은 어쨌든, 그것도 금새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진화론적 생물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진정한 물음은, 변이의 원인들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버틀러는 그저 “유기적 생 속에 목적론을 재도입”하는 데 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회귀 자체는 라마르크 이론으로의 회귀에 불과합니다(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 이론은 다윈의 이론보다 앞서 나온 것이죠). 진화론의 진정한 아버지인 라마르크는 새로운 종들을 낳는 변이를 개인적인 노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이 습관이 되고, 이 습관이 유전된다는 것이죠. 버틀러는 이 이론을, 혹은 이와 유사한 이론을 채택했습니다. 이를 『창조적 진화』에 접근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창조적 진화는 무엇보다도, 획득된 습관들이 유전적으로 전달될 수 없고, 변이는 개인적인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변이들은 한 종의 모든 표본들에게, 혹은 적어도 대부분의 표본들에게 단번에 생겨난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 진화 속에 목적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철학 전통이 ‘목적론’이라는 말에 부여했던 의미가 전혀 아니고, 상이하고 새로운 의미라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생물학과 철학은 이 새로운 의미를 진정으로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존의 관념도 이를 규정할 수 없으니까요.

 

이제 비판적인, 혹은 부정적인 측면을 제쳐 두고, 건설적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버틀러가 진화론과 생명 이론에 가져온 개인적인 기여는 제 생각에 유기적 발전과 유기체가 보존하는 선조들의 발전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비유로 환원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단순한 은유고, 사실에 대한 이미지화된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 잘못 이해된 이 사실은 실재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반대로 이 예측 불가능성, 연속적 창조입니다. 이것에 생의 진화 자체이고, 제가 『창조적 진화』 전체에 걸쳐 주의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 학설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다른 하나의 전조로 여겨질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제 머리에 떠오른 유일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버틀러는 오랫동안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작가로서의 그의 재능, 그의 유머, 그리고 『에레혼』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상상력(물론 이 상상력이 학적인 철학의 질문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에 인상을 받은 비평가들이 그를 재평가했을 겁니다. 즉, 그를 ‘발견’했던 것은 아마도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관념들 위에서 작업하는 데 익숙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서 양자를 접근시키고 또 구별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 경우, 그들은 자연스럽게 즉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부정적인 측면(다윈주의에 대한 비판, 순전히 기계론적인 생 관념에 대한 비판)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 이중의 부정이 거의 진부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순수한 다윈주의의 불충분성은 다윈 이래로 꾸준히 지적되었고, 기계론을 생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의 철학 전통, ‘생기론’이라 불리는 전통에 상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 학설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여기서 유일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지점, 즉 실증적인 측면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죠. 버틀러의 경우, 실증적인 측면은 아주 빈곤하여, 거의 전부가 비판이나 역사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첫 번째 이유를 보충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명과 습관』이나 『진화의 오늘과 내일』을 읽는 문학 평론가들은 이것들이 철학 저작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에는 철학자들이 남용하는 전문 용어들이 없거나 드물다는 데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다른 한편, 그들은 이 책에서 은유적인 표현들을, 다소간 시적인 비유들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이 평론가들이 『창조적 진화』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는다면, 여기에서도 고유한 의미에서 철학적인 용어들이 넘쳐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드물게, 은유와 이미지들을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이로부터 그들은 어조나 억양의 유사성을 결론으로 내놓고, 또 여기에 다른 유사성들을 접목시킬 유혹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완전히 틀린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물론 두 저자 모두에게 가능한 경우에는 언제나 교양 독자 일반에 호소하려는 동일한 욕망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버틀러가 오직 그의 사유의 표현을 보충하거나, 혹은 단순히 치장하기 위해서만 이미지, 비유 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이미지나 비유 없이도 설명을 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반대로, 『창조적 진화』나 『두 원천』 같은 책에서 이미지가 개입하는 이유는 대개 그 이미지가 필요 불가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념도 그의 사유를 표현할 수 없을 때, 저자는 그것을 암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암시는 이미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철학자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유일한 소통 수단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절대적 필연성으로 강제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생과 진화의 현상들을 ‘생의 약동’에 결부지을 때, 저는 문체를 치장하려던 것도 아니고, 버틀러가 ‘생명-력’에 대해 말할 때처럼, 심층적인 원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이미지로 감추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주제에 대해 철학은 기계론과 목적론이라는 두 가지 설명 원리밖에 제공하지 않습니다(이 후자의 원리가 생기론자들의 ‘생명 원리’이자, 버틀러의 ‘생명-력’을 특징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관점들 가운데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여기서 상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두 입장은 생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인간 정신이 만들어 낸 개념들에 상응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개념들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요? 손가락으로 지시해야 할 겁니다. ‘기계론’과 ‘목적론’ 사이를 나타내는 개념은 없으니까요. 약동의 이미지는 이러한 지시에 불과합니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저와 함께 이 지점에 자리잡아 생에 대해 우리가 포착한 것과 포착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면, 이 이미지는 가치를 지니게 되겠지요. 저는 『두 원천』 115-120페이지에서 이러한 앎과 무지들을 열거했습니다. 우리가 기계론과 목적론 사이에서 제가 ‘약동’이라는 말을 기입함으로써 표시한 지점에 자리잡는다면, 이 앎과 무지들은 서로 조합되어 진화와 생에 대한 아주 특별한 어떤 시각이 됩니다. 이 구절에서 앎과 무지들을 헤아리는 것은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몇몇은 정확하게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은유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실, 가능한 확인들constatation을 정확하면서도 포괄적으로 표시해 두는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삶의-의지’나 버틀러와 같은 생기론자의 ‘생명-력’과 같은 불모의 이미지들과는 심층적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물학이 빠르건 늦건 그것들 중 일부를 채택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주저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물학은 일부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본래의 질문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간 것 같습니다. 두 학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 물었지요. 한 번 더 대답하건대, “아니오, 아무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나아가서,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왜 선험적으로 그럴싸하지 않았는지 말해보려 합니다.

 

물론 이는 제가 어떤 천부적인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철학에서의 겸손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그 말을 따르려 했죠. 그러나 정확히 이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한 철학자가 위대하고 독창적인 가설들을 찬양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처럼 보이기에, 제가 50년 가량 권장하고 실천했던 방법의 본질은 실증 과학에서처럼 철학 속에서도 특수한 문제들을 고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들 각각은 철학자에게 오랜 연구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온 생애를 쏟아부어도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 주된 어려움은 여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어려움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를 위해 (철학이 아니라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언어에서 빠져나와 실재를 그 자연적 선을 따라 분절하는 것입니다. 언어와 상식은 우리 행동의 편의를 위해 실재를 재단하고 분배해왔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노력은 무한정할 것입니다. 사실, 해결과 제기는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문제는 해결되었을 때에만 제기됩니다.

 

철학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어떤 철학자가 발견하게 될 것을 다른 철학자가 미리 발견하거나 예감할 수 있을까요? 이 철학자가 철학적 방법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결과에 도달하려는 동일한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철학자가 아마추어로 남고자 한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할 겁니다. 이제 제가 말한 단어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철학에서 아마추어라고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문제의 용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문제가 결정적으로 제기되었다고 믿으며, 이 문제에 대한 외견상의 해결책들(필연적으로 선택에 앞서 미리 존재할)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데서 만족하는 인물입니다. 버틀러가 다윈의 해결책을 거부하고 라마크르의 해결책에 가담할 때, 버틀러는 아마추어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심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문제 제기를 창조하고, 해결책을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아닐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오래 전에 제기되었음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그 문제가 상호 배제하는 동등하게 가능한 둘 이상의 해결책들을 내포하는 형태로 제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마추어라고 부르는 인물은 가입할 정당을 선택하듯 이미 이루어진 해결책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가 철학자라고 부르는 인물은 문제의 해결책을 창조하는 인물입니다. 이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유일할 것이고, 철학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문제를 다시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인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자들 또한 아마추어의 태도에 머물러 있다면, 철학자의 노력과 유사한 노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문제 개념 속에서 말들의 새로운 의미를 자세히 탐구하지 않는다면, 이 차이를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새뮤얼 버틀러의 책을 읽고 제게 떠오른 몇몇 생각들은 위와 같습니다. 제가 새뮤얼 버틀러를 서둘러 피상적으로 읽어야 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를 더 잘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를 사상가로서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을지도 모릅니다.

H. 베르그손

1935년 12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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