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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13 엘리 뒤링 - 기묘한 고집 : 베르그손, 랑주뱅, 쌍둥이들의 시간
  2. 2018.10.05 엘리 뒤링 - 철학의 비정상성에 대한 주석 (베르그손의 한 강의로부터)
  3. 2018.10.05 베르그손 - 기억 이론의 역사 1강 1903/12/11
  4. 2018.07.17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4/4)
  5. 2018.07.03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3/4)
  6. 2018.06.30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2/4)
  7. 2018.05.12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1/4)
  8. 2018.04.07 진리의 성장croissance : 참의 역행 운동
  9. 2018.03.30 1903년 2월 26일 레옹 브룅슈빅에게 보내는 편지
  10. 2017.09.01 베르그손 - 자유 문제의 변천 20강 1905/05/19 (4)

엘리 뒤링 - 기묘한 고집 : 베르그손, 랑주뱅, 쌍둥이들의 시간

[옮긴이 주 : 이 글은 2018년 6월 11일 이루어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아인슈타인> 국제 학회에서 이루어진 엘리 뒤링의 발표를 번역한 것이다. 발표 내용 전체는 이곳에서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개 감사드립니다. 다들 잘 들리시나요.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스톱워치를 켜고 30분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여러분께 세가지 사항을 설명하려 합니다. 우선은 베르그손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은 이 쌍둥이들, 그러니까 물론 랑주뱅Langevin의 쌍둥이들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베르그손이 랑주뱅의 문제와 맺는 이 긴장된 관계를 특징짓는 기이한 고집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 건물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도 곧 보시다시피 콜레주 드 프랑스는 이 문제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이고, 어쨌건 철학자들과 물리학자들 사이의 많은 논의와 의견교환이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자료들 속에 나타난 이 문제의 전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겠습니다. 저는 철학자이고, 이러한 관점, 철학의 관점에서 이 복잡한 문제, 그리고 때로는 고약한 문제를 다뤄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 간의 만남의 부재non-rencontre, 혹은 토론의 부재non-discussion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상이 제가 다룰 내용입니다.

이 쌍둥이들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일상적인 조건 하에서 거대한 천체와 마주하여, 그러니까 중력장과 마주하여, 하나의 역학계의 운동은 강도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속이라고 불리는 속도의 변양을 겪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상대성 이론의 중심적 직관은... 일반 상대성 이론뿐 아니라 당대의 상식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도 되풀이되는 당혹감의 주자였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이미, 이 중심적 직관은 결국 랑주뱅이 일군의 철학자들에게,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중들에게 일종의 우화를 통해 아주 명료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몇마디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우화는 오늘날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비록 랑주뱅이 이에 대해 말했던 그 시기, 랑주뱅이 이 이론을 소개했던 해인 1911년에 그것은 “역설”도 아니었고, “쌍둥이”에 대한 것도 아니었던데다가, 랑주뱅이 자신의 이름을 그 우화에 붙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랑주뱅의” 것도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이 논변은 몇마디 말로 집약됩니다. 바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11년 볼로뉴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랑주뱅은 상대성 이론의 교육 모델이 될 법한 아주 아름다운 강연의 막바지에 동원된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고찰은,” 음... 랑주뱅은 제가 단번에 진술했던 내용을,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중력장을 마주하여 하나의 물체, 혹은 물리계는 가속되는, 혹은 마찬가지로 감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막 설명한 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변양이, 이 지점이 중심적 직관인데요, 흘러간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관찰하게 됩니다. 가속은 이 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흘러간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랑주뱅이 제시한 이러한 고찰은... 랑주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고찰은 2년의 시간을 들여 200년 뒤의 지구가 어떤 것일지를 알 수 있는 상상가능한 수단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이 여행자가,” 랑주뱅은 여행자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와 충분히 가까운 속도로 지구로부터 발사된 발사체에 갇혀있기를 승낙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아주 빠른 속도죠. “1년이 지난 뒤 예컨대 어떤 별을 만나서 동일한 속도로 지구로 돌아오도록 채비를 하면 된다. 2년의 세월만큼 나이를 먹고 지구로 돌아온 이 여행자가 그의 방주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지구에서 200년의 세월이 흘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두 경우에 흘러간 지속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격차는 랑주뱅이 여기서 제기한 것을 그대로 적용한 것, 물론 랑주뱅은 몇몇 보충 논변과 설명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제가 진술한 원리, 그러니까 가속이 가속된 계의 흘러간 고유시간을 변양시킨다는 원리를 순전히 적용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운동 중에 있는 물리계들은, 그 계들이 가속을 겪는다면, 서로 다르게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당대의 상식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에게도 완전히 예사롭지 않았던 이 현상, 지속의 편차déphasage라는 이 현상... 저는 은유일 뿐인 감속이나 팽창이라는 표현보다는 편차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에서 흘러간 지속들 간의 격차, 편차로부터, 랑주뱅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고유 시간을, 고유 시간이라는 개념을 개입시킴으로써 아주 잘 설명했던 바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옵니다. 즉 그것은 국소적으로, 그 자리에서 측정된 고유한 크기와 같은 것으로, 제가 즉각적으로 강조하자면, 이는 종종 그렇게 여겨지는 바와는 달리 “상대적인” 크기가 아닙니다. 이 측정은 관성계의 선택에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 반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상대성 이론의 거대한 직관, 철학적 영향은 형식주의의 심장부에 실제로 헤아려지는 시간, 고유 시간, 절대적인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위치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시간은 관성계의 선택에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시-공간 속에서 문제시되는 계가 그리는 여정에 상대적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이 시간은 이 계가 자신의 역사의 여정 속에서 우주의 나머지와 맺고 있는 관계에 상대적입니다. 가속되고 감속되는 것은 언제나 주변환경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따라서 다시 한번 말하건대 한 계와 우주의 나머지와의 연속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 되기 전에도 쌍둥이는 쌍둥이라고 지시되지 않았고도 존재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의 쌍둥이는 그러합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의 논문 초판본에서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에 연관된 고유 시간을 비교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1912-1913년경 폰 라우에von Laue가 개입하여, 그러니까 1911년 랑주뱅의 개입이 있은 후에 지속적으로 통용되던 무언가를 “랑주뱅의 역설”이라고 지칭합니다. 이 역설은 랑주뱅의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역설이요. 그리고 몇 년 뒤, 1918년에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쌍둥이”라는 말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나 의식 일반 대신 두 명의 쌍둥이를 상상한 것이죠.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콜레주 드 프랑스가 이 문제가 결정화되는 지점, 혹은 장소로 개입하는데요. 팽르베Painlevé, 제가 아는 바로는 수학자 폴 팽르베는 랑주뱅과 함께 1922년 아인슈타인을 파리로 초청하는 일의 관계자였는데요. 팽르베는 등속 운동하는 궤도의 분절들만이 개입하는, 말하자면 순수한, 조금은 이상화된 버전의 랑주뱅의 역설을 공식화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잘못된 대칭을 통한 공식화였지요. 이것은 제가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몇몇 지점에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몇몇 오해를 강조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죠. 몇몇 이해부족을 말입니다. 조금 뒤에 돌아오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결국 제가 그 윤곽을 묘사한 쌍둥이에 대한 이 조그마한 극의 최종장은 베르그손 자신입니다. 즉 제가 조금 뒤에 언급할 책, 『지속과 동시성』을 통한 베르그손의 개입입니다. 이 책은 처음으로 쌍둥이들에 이름을 붙입니다. 오랜 철학 전통 속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피에르와 폴이라는 이름이죠. 개념적 논변을 위해 동원된 두 인물이 있을 때 보통은 피에르와 폴이라고 불리죠. 이것이 바로 소위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라 불리는 문제가 결정화되는 꽤나 긴, 수십년간의 역사입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일찍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1911년 랑주뱅이 강연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청중의 일원이었습니다. 푸앵카레Poincaré, 오스트발트Ostwald 등과 함께 말입니다. 그 자리에는 또한 철학자 뒤르켐Durkheim이나 러셀Russell, 브룅슈빅Brunschvicg 등도 참석해 있었죠. 베르그손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22년에... 중간에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늦기는 했지만 1922년에 베르그손은 다시 한번 출석하였고, 심지어는 아인슈타인 강연 중에 프랑스 철학회가 조직한 회담을 기회 삼아 논평을 부탁받기도 합니다. 1922년 4월 6일은 베르그손을... 아니 죄송합니다, 아인슈타인을 철학자들에게 소개하고 회담을 갖는 자리였습니다. 베르그손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르그손은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논평을 권유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즉흥적인 것이었죠. 베르그손은 글을 써오지 않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베르그손은 그의 논평의 중점을 쌍둥이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성의 문제에 둡니다. 훨씬 더 일반적인 문제죠. 동시성의 시간적 의미에 관한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성의 시간적 의미는 자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시성을 공간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공존의 질서의 소여, 말하자면 “같은 시간에” 공간적으로 병렬될 수 있음이라는 사실말입니다. 동시성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동시성은... 상대성 이론이 이 문제를 건드리는 한에서 상대성 이론의 요점은, 동시성이 시간 자체의 한 차원으로 고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에서 이러한 고찰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칸트가 동시성은 시간으로부터 파생된 가장 흥미로운 관념임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공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시간으로부터요.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이 문제를 새로운 물리 이론과 관련하여 고찰했습니다. 그 어조는 전혀 논쟁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간략한 의견교환의, 의견교환에 뒤이은 담화의 원본을 읽어본다면, 어조는 논쟁적이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은 결코 상대성 이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명시적으로 이 이론을 옹호했고, 물리학자가 이 이론에 접목하는 철학적 해석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했지요. 조금 뒤에 제가 그 사례를 제시할 것이지만, 베르그손의 전술은 조금은 우회적이고 완곡합니다. 솔직히 요점을 포착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변의 정확한 효과 말입니다. 이 논변 자체로는 논변이 전개되었다기보다는 환기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상하시듯, 아인슈타인은 이 논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고, 단순한 언어적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평소처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립니다. 조금은 거친 방식으로요. 그는 다섯 줄로 요약되는 응답에서 베르그손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문제는 심리학적 시간과, 물론 물리적 시간이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세번째 시간, 철학자의 시간을 위한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이보다 폭력적인 반박은 없겠죠.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손이 제기하려 했던 문제를 단순히 빼내어 배제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배제하고 한편으로는 주체의 시간인 심리학적으로 체험된 시간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계의 시간, 객관적 조정의 시간, 물리학의 시간이라는 이 양자택일, 이 이원성을 베르그손에게 되돌려줍니다. 이 두 시간 사이에는 문제가, 철학적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기묘한” 점은 이 논평이 동시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쌍둥이가 아니라요. 쌍둥이 역설은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루 전인 1922년 4월 5일, 여기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팽르베는 대담하게도 일군의 저명한 동료들을 앞에 두고 특수 상대성 이론 속에는 쌍둥이들의 시간 간의 격차를 유도하는 데 있어 초보적인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증명하겠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논변을 명확히 하자면, 팽르베는 우주선 속의 항성 여행을 더 이상 참조하지 않고 기차 여행, 왕복하는 기차라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쌍방에서 측정된,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기차의 기관사의 관점으로부터 측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플랫폼에서 움직이지 않는 역장의 관점으로부터 측정된 고유시간이 비교됩니다. 팽르베가 구성하고자 했던 논변의 힘줄은, 사실상 우리가 궤도를 둘씩 짝지어 고찰한다면 외견상으로는 완전한 상호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견상으로 그러한 이유는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팽르베는 운동의 속도를 등속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이건 그 이후로 자주 반복되는 논변인데요, 베르그손 자신에 의해서도 반복되죠. 그리하여 역장의 시간이 느려지는지, 기관사의 시간이 느려지는지 구별해서 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두 위치는 완전히 대칭적이기 때문이죠.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분명히 그건 사실이 아니죠. 사실 이 문제 속에는 두 개의 관성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견상으로는 하나의 기차와 하나의 역이 존재하지만, 두 개의 관성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관성계가 존재합니다. 기차는 길을 되돌아오기 때문이죠.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어쨌건 가속은 이 기차가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에 의해 존속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감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속도 벡터의 방향 변화는 기술적으로는 가속입니다. 어쨌건 이 논의는 완전히 가설적입니다. 사유 실험이죠. 이 역행의 지점은 상황 속에 일종의 근본적인 비대칭성, 불균형성을 도입합니다. 이 비대칭성에서 출발한다면 랑주뱅이 예측한 결과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설은 존속합니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역설은 역설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처음에 놀랍게 보였던 것, 역설적으로 보였던 것은 단지 이 지속간의 편차가 상호성, 혹은 완전한 대칭성의 장 속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인다면, 역설은 상당부분 완화됩니다.

이렇게 이 문제는 모든 참가자들이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막을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팽르베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튿날 베르그손 자신도 그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베르그손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은 베르그손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음을 보여줍니다. 이튿날 역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되는 것은 기묘하게도... 이건 아주 예상과는 다른데요, 15분여 가량 이루어진 그의 꽤나 긴 담화 속에서 “미생물”이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쌍둥이가 아니라 미생물이 문제시됩니다. 저는 이 작은 여담을 통해, 어떤 점에서 베르그손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자이면서도 말하자면 극도로 섬세한 저자인지 보이는 동시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 스승 중 하나인, 그러니까 저를 철학적으로 성장시킨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 반대로 철학자와 물리학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일종의 속도의 격차, 혹은 상대적 운동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으로 상대적 속도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르그손은 하나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고려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 극도로 느린 속도를 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가 취했던 우회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극도로 불투명한 것이었습니다. 미생물에 대한 참조는 좋은 사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관건은 무엇일까요? 관건은 물리학자가 규정한 조건들 속에서 동시성을 사유하기 위해 또 한 번 가설적인 관점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쌍둥이의 사유실험의 맞은편에 또다른 사유실험을 제안하는 것인데요. 미생물의 사유실험은 미생물의 관점에 위치하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니까 극도로 미소한 공간상의 간격을 감각할 수 있는 극도로 작은 존재인 미생물은 동시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밀한 관점을,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세밀한 해상도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미생물에게는 절대적 동시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접성의 동시성은, 아무리 가까운 것을 상상하더라도, 국소적 일치, 그러니까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건에 중첩을 아무리 가깝다고 상상하더라도, 말하자면 무한히 줌을 당기는 것을 허용하는 미생물의 가설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원거리의 동시성으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르그손이 여기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과학자들의 동시성”입니다. 원거리의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리학자의 조건에, 즉 신호교환을 통한 멀리 떨어진 시계들의 조정coordination과 동기화synchronisation라는 조건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생물의 원리는 사실 무한한 줌 당기기의 원리, 무한히 세밀한 해상도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실재의 모든 층위에서 원거리의 동시성을, 그러니까 과학자들의 동시성의 조건을 재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어느 정도 사태를 명확히 했지만, 진술된 그대로의 논변이 갖는 정확한 효력은 포착하기가 더 까다롭습니다. 사실 이 효력은 아인슈타인의 비판을 필두로 하여 아주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아인슈타인이 한 담화에서 베르그손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엄밀히 물리적인 차원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고려하는 것은 바로 정확히 이 미생물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후에 메츠Metz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씁니다. “베르그손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니까 동일한 장소에 있는 “두 사건들 간의 동시성이(또한 비-동시성이) 선택된 계와는 독립적인, 절대적인 무언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절대적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는 베르그손이 이 점을 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아니죠. 베르그손은 절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베르그손은 이 점을 전혀 잊지 않았고, 사실 반대로 그의 논변의 아이디어 전체는, 실제로는 물리학자가 동기화 과정을 시계바늘 읽기라는 국소적 작업에 결부시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국소적 작업은 정말로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절대”라는 말은 베르그손이 고찰하는 특별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이긴 하지만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언제나 두 사태의 일람적synoptique 포착, 단일한 포착, 조금은 역설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참조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두 사태를 둘이라고, 서로 구분된다고, 두 사건이라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성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포착합니다. 정확히 이 지점에서 철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1905년의 논문에서 이렇게 썼지요.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장소, 혹은 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사건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비정확성을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사치approximation의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말이죠. “이러한 동시성은 ‘추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들이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동시성에 대한 우리의 접근의 제약에 대한 의견일치, 우리가 언제나 다소간 근접적 동시성이라는 조건 속에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인 일치나 절대적인 동시성의 근사치로 만족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가능한 의견일치의 지점으로부터 아주 분명한 분기가 존재합니다. 분기점은 “추상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즉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훨씬 천천히 전진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지점에서 상당히 속도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물리학자가 필연적으로 추상에 호소한다는 사실에서 물리학자가 과학자의 관점을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직관적 관점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상의 불가능성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가서 측정의 실천적 제약조건에서 떨어져나오는 추상의 평면에 위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사실 이 지점에 철학적으로 훨씬 더 섬세하게 논의되어야 할 무언가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징후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하나의 해석틀을 제시하면서 미생물에 대한 이러한 인용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물론 관심이 있으실 경우, 베르그손의 조금은 기묘한 발표와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평의 텍스트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에게 되돌려주는 조금은 거친 응답으로 되돌아간다면, 논변의 진정한 효력과 기저의 쟁점을 해독해내는 데 제가 지금 제시하는 일종의 해석틀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단지... 이 점이 베르그손의 철학적 논변의 특이점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과학자들과 직접적인 의견교환에 동원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것은 미생물에 대한 이 동일한 참조가 한번에 두 가지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시적으로요. 한편으로 더 명백한 점은, 이 미생물이 과학적 이성의 확성기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실재의 모든 층위에서 모든 것을 원거리 동시성의 용어로, 그러니까 시계의 조정으로 정의하려는 과학적 이성입니다. 베르그손이 사용하는 미생물은 아인슈타인 자신보다 더 아인슈타인적이기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모든 층위에서 이 미생물들은 동기화 과정을, 그러니까 동기화의 효과와 시간 편차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생물은 바로 이러한 소여로부터 일종의 축이 되는 지점,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직관적 기준점인 환원 불가능한 직관적 동시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미생물이 가정상 원하는 만큼 작아질 수 있고 원하는 만큼의 공간상의 간극을 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점점 작아져 한 점에서 수렴된다고 가정되는 일련의 간극들을 시-공간상의 한 수학적 점에 관념적으로 투사하는 추상과정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 하나의 점, 사건의 점은 아인슈타인이 원리상 요구한 절대적 동시성, 국소적이고 점적인 동시성의 자리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생물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미생물은 크기의 질서와 독립적인 관계들의 체계로서 잠재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과학을 실재의 바탕에 가정합니다. 이 경우에 그것은, 베르그손의 말을 빌자면, “직관적 동시성에 독립적인 과학적 동시성의 체계”입니다. 직관적 동시성은 말하자면 존재 속으로 유보되고, 더이상 접근된 직관적 동시성에 대한 국소적인, 근접적 경험에 관념적으로, 즉 권리상 결부될 수단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미생물의 첫번째, 더 명백한 기능입니다. 두번째 기능은 베르그손의 논변 속에서 말하자면 첫번째 기능에 중첩되는 것이고, 포착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 동일한 미생물이 사실 베르그손의 논변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 제가 생각하기로는 푸앵카레의 영향을 받은 고찰을 예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찰은 베르그손의 수많은 추론들의 배후에 위치한 것으로, 층위의 질문, 즉 크기의 상대성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공간의 상대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베르그손은 다른 곳에서 거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거인은 미생물과 상보적인 비유로, 거리 층위의 다른쪽 끝에 위치하여 거대한 거리를 수축시킴으로써 자신의 층위에서 준직관적인 동시성의 조건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즉 거인은 과학적 동시성을 거치지 않고서도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을 하나의 단일한 지각적 행위 속에 수축시켜 직관적 동시성의 조건 속에 위치함으로써 이 두 사건을 동시간적이고 동시적인 것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덧붙이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미생물들, 아니, 모든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을 함에 있어서 행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찰과 측정의 조건 속에 위치하는 경우에 물리학자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발표 후에] 이 점에 대해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논변은 명료합니다. 그것은 과학적 관점을 직관적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미생물이 사태를 처리하고 시간을 처리하는 방식을 통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질적이고 상대적인 공간이라는 수학적 표상은 사실상 경험의 서로 다른 층위, 서로 다른 평면을 연결하는 원리에 속하는 것으로, 근접적이고 직관적인 동시성의 영역과 물리학자가 상대성 이론의 조건 속에서 기술된 과학적 동시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층위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일종의 연속적 연관을 드러내어 줍니다.

베르그손은 이 점을 알아챘지만, 그는 이것을 다소간 혼합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즉 사태들은 중첩되어 명확히 분절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법, 직관의 방법에 있어 이러한 상황은 전형적인 것입니다. 직관은 눈을 열기만 하면 세계를 볼 수 있고 본원적인 영감이나 원천인 체험된vécu 경험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직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직관은 아주 복잡한 지성적인 작업입니다. 그것은 과학과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애매함의 지점, 그러니까 여기서는 서로 다른 층위들, 혹은 서로 다른 평면들, 추상의 평면과 직관의 평면 사이의 왕복운동이라는 애매함의 지점을 찾아내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그저 잘라내어 서로 다른 실재의 평면들을 너무 빨리 분해해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입니다. 이 애매함의 영역에 위치하여 이 영역을 가로지르고 그 안에서 움직임으로써, 인용하자면, “하나의 동시성에서 다른 동시성으로”, 그러니까 자연적 동시성에서 과학적 동시성으로, 실재성의 주입이 수행되는 방식을 현장에서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베르그손은 이 유동적인 영역에 위치하고자 했고, 우리를 거기에 위치시키고자 했습니다. 거의 시간이 없었고 아주 바빴던 아인슈타인을 15분 동안의 짧은 논의를 통해 이 영역에 위치시키려 했던 베르그손의 시도는 아주 야심찬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몇몇 오해들로 이어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포착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은, 이 유동적인 영역에서부터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아인슈타인을 너무 빨리 어떤 주장에 빠지게 만드는 일종의 미끄러짐입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주장은 동시성이라는 지성적 구성물을 독립적인 것으로 삼으려는 오류, 형이상학적 차원의 오류입니다. 이 구성물은 고유하게 시간적인 의미를 갖지만, 사실상 직관적 동시성이 체험되는 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현상학에 대해, 메를로-퐁티에서, 어떤 점에서는 이미 후설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사태에 대해 추론하게끔 합니다. 그것은 지각의 자연적 조건에 정박되어 있는 인간적 경험의 본원적 기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과학 구성의 역사 속에서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간극-없음, 모든 지성적 가공과 추상적 평면들이 이 본원적 정박과 일종의 연속적 연관을 보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아인슈타인이 말하듯 기술적 조건 속에서 규정된 동시성들이 계속해서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 과학적 동시성을 다른 크기가 아니라 실재의 시간적 차원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양자의 연관을 유지하는 이러한 실재성의 주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베르그손은 현상학자일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현상학자가 아니죠. 이 기나긴 “미생물적” 여담을 거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가 보기에는 고유한 의미에서 베르그손의 문제가 되는 주제, 사실상 이러한 사례, 미생물이라는 이러한 반대 사례, 반대 사유실험을 통해 도입된 주제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재의 층위라는 주제, 혹은 제 생각으로는 이게 더 적절한 용어로 보이는데, 사유가 시간에 대해 채택하는 원근법perspective이라는 주제입니다. 저는 미생물이 여기서 원근법의 원리를 육화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인 아이디어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단번에 특정한 거리 속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시간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시야에 넣지 않는다면,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구체적으로는 동시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순수한 국소적 일치로서의 동시성, 원거리 동시성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시계바늘을 읽는 작업에 정박케 하는 지금-여기의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일종의 지리-시간적 토대로서 시-공간상의 각각의 지점에 단번에 위치시킨다는 생각은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극도로 사후적으로 가공된 무언가를 실재 속에 투사하는, 재투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인위성은 그것의 파생성을 드러내어 줍니다. 실제로 일차적인 것은 하나의 시간, 원거리에서 경험된 동시성입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의미의 동시성, 물리이론의 틀 속에서 이해된 동시성이 아니라, 더 직접적이고, 말하자면 더 “자연적인” 원거리 동시성입니다. 그것은 근접한 사건들의 총체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의 동시성이고, 말하자면 주변을, 환경을 규정하는 두꺼운 동시성입니다. 우리는 이 동시성에 대해 관점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에 있어 제가 암시적으로, 그리고 조금 은유적으로 말한다는 점은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컨대 심리학적 질서, 이 질문에 대한 고유한 의미에서 심리학적 작업을 참조해보도록 합시다. 아동기의 시간 의식과 시간 범주의 발달에 대한 피아제의 텍스트에서 말입니다. 피아제는 이 점에 대해 베르그손보다 훨씬 명료하게, 아주 단순한 설명을 합니다. 피아제의 설명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국소적인 동시성의 소여는 점차적으로 시간의 선을 따라 연쇄의 경험과 짝지어지더라도 아직은 구체적으로 시간적인 면모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범주로서의 시간의 관념이 연쇄나 변화의 이산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위해서는 원거리의 조정에 대한 고찰을 도입해야 합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길을 되돌아가,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역전시켜, 이미 개념적인 하나의 정신적인 작업을 통해 내 경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던 일과 이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관계지을 가능성을 붙잡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들은 말 그대로 원거리 동시성 관계이지만, 이 “거리”의 의미는 아직 동기화의 과정이나 신호 교환을 통해 틀지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의미의 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거리는 여기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나 자신을 직관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여기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동시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발표 전체를 인도하는 근본적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계 시간의 옆에 주체의 시간, 주체적이고 심리학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초점은 주체적이고 심리학적인 시간이라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의 문제입니다. 베르그손의 주장은 이 시간이란 단번에 원근법의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무언가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바는, 아인슈타인이 이 문제를 너무 빨리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 그 징후는... 1922년 아인슈타인과의 논의 몇달 후에 출간된 저서 『지속과 동시성』을 거쳐, 또한 그 후 몇 년간 아인슈타인 편에서 개입한 베크렐Becquerel이나 앙드레 메츠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연장된 차후의 논의 속에서, 되풀이되는 징후는 물리학자들의 일종의 유사논변으로, 그것은 더이상 도처에서 전체에 대해 적용되는 보편적 시간, 절대적인 총괄적 시간을 균일하게 정의할 수단이 없다는 논의 없이 확인된 사실, 제가 앞서 말했듯 쌍둥이 역설이 묘사하는 바대로 모든 것이 매 순간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 가속하고 있기 때문에 고유 시간들이 일상적인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편차를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니까 징후는 이렇게 불가피하고 넘어설 수 없는 사실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실은 형이상학적인 주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고, 성찰 없이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것으로 발표를 끝마치려 합니다. 이 주장은... 가능한 변형태가 몇 개 있는데요. 대략적으로 말하면, 한편으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국소적인 지속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변이의 선들을 국소적으로 패러미터화 하는 방식들인 고유 시간들은 존재하지만, 불변하고 객관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조정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 존재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괴물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시-공간일 수 있겠죠. 어쨌건 시간은 생성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블록-우주라는 형식 속에 응결된 시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로 펼쳐진 이 블록-우주 속에서는 더이상 우리로 하여금 이 우주의 발생이나 시간적 전개를 목격하게 해줄 보편적인 생성의 베이스라인을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방식으로 정의할 수단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직관은 “시간은 국소적인 용법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시간으로부터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적 성격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조금 전에 설명했다시피, 이 시간적 성격은 거의 전적으로 우리가 시간에 대해 단번에 하나의 원근법을 채택할 수 있고, 또 채택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원근법을 채택한다는 것은 동시성의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시성의 관념을 실재 자체의 한 차원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지 관성계의 사용이나 관성계의 자의적 선택에 결부되어, 동시성의 선들에 대한 총괄적 틀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만 곧장 상대적인 것임이 상기되어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하나의 인공물이 아니라요. 이러한 상대화의 확인 너머에서 동시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리고 예컨대 베르그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한 것처럼, 필연적으로 총괄적일, 그러니까 말 그대로 보편적이어서 우주 전체의 층위에 있는 동시성의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지역적인 동시성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러한 동시성을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층위의 개념이 개입됩니다. 하나의 관찰자, 혹은 하나의 역학계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통해 규정된 동시성의 구역들, 동시성의 영역들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 상호작용 또한 일상적인 인과제약 하에 있습니다. 빛보다 빨리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제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시간이 없으니 이 점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논의가 가능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상대성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즉 상대성 이론 자체로부터 시간에 따른 공존의 양태를, 시간에 따른 사물들의 연결 양태를 사유하기 위한 도식을 끌어내려는 사람들에 의하면, 제가 생각하기로는 베르그손이 예감한 것처럼 동시성의 여러 양태들을 실제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양태들은 물론 아주 비표준적일 것이고, 아마도 물리학자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지만, 객관적일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내인적 크기를 통해, 말하자면 고유 시간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관성계의 선택에 의존적이지도 않을 것이지만, 다소간 확고한 특성을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즉, 시-공간 상의 여러 영역에서 사건들의 집합들이 서로 예컨대 모든 방향으로 신호를 방사할 수 있는 원점의 사건의 관점과 같은 적어도 한 원근법에서는 동시성의 막들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음... 묘사를 해드려야겠네요. 몇몇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어야 했겠지만, 그 경우에는 세부사항을 설명했어야 했을테고 시간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시-공간이라는 고전적인 표상 속에서 민코프스키의 다이어그램을 사용함으로써 이 동시성의 구역 혹은 영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영역은, 이 얘기까지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화이트헤드에 의해 정의된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몇몇 물리학자들에게 베르그손보다 더 잘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그가 “동시간성”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에게 동시성의 한 변종으로, 아주 단순한 형태를 띱니다. 하나의 사건을 고찰해봅시다. 시-공간상의 한 사건의 지점을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빛의 속도로 모든 방향으로 퍼져가는 광선의 방출이라고 해봅시다. 이 지점으로부터, 음 그러니까 이 사건은 어쨌든 지표화된 것입니다. 이 원점의 사건이 여는 원근법이 있는 것이죠. 이 지점으로부터 우주의 모든 사건들을 고찰해 봅시다. 원리상, 그러니까 원리상의 이유로, 이 원점의 사건에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사건들을요. 예컨대 은하의 다른쪽 끝에서 일어나는 일을 고찰해 봅시다. 충분히 제한된 시간 간격 동안 인과적 연결을 갖기에는, 그러니까 빛보다 느린 속도로 점차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에너지를 주고받기에는 충분히 먼 거리에 있는 사건이요. 그러면 우리는 말하자면 두 사건들 간의 인과적 연결 불가능성이라는 분리의 관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일반화해 봅시다. 그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게 되는 것은 에딩턴Eddington이 “절대적인 다른 곳”이라고, Absolute Elsewhere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 도식에서 두 개의 빛의 원뿔의 외부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영역을 “동시간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역은 하나의 지표화된 사건, 하나의 원점의 사건과 관련하여 이 사건과 인과적으로 단절되고, 따라서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이 사건과 동시적인 사건의 총체, 그렇게 단절된 시-공간상의 영역 전체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시성은 평면적인 동시성, 순간의 동시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동시성을 생각하게 되지만요. 평면적인 동시성은 실제로 상대적인 것이죠. 이 동시성은 절대적인 동시성, 관성계의 선택과 독립적인 동시성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동시성은 실천적인 이유로 완전히 무용한 것이죠. 이 동시성은 물리학자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철학자에게 이것은 극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역적 동시성의 여러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베르그손이 그의 추론 속에서 암암리에, 하지만 미묘하고 암시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던 바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확대된 동시성의 학설과 같은 것을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확대된 동시성의 학설은 물리학의 이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학설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처럼 이 학설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는 단순히 산타 클로스에 대해 말하듯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형이상학이나, 시간을 바구니 속의 사과처럼 셀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다수의 시간이, 운동 중인 계만큼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형이상학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고 적절한 형이상학이었습니다. 과학적 결과물을 참조하여 형성되는 공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질문이 더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어쩌면 물리학과 물리학이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형이상학 사이의 연속적인 대화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릅니다. 물리학자는 형이상학자입니다. 그건 불가피합니다. 물리학자가 일요일마다 철학책을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처럼 엄격하게 과학적인 결과를 넘어 그들 학문의 토대와 일반적 범위, 추상의 역량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이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실재를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인 범주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는 시간들의 “단일성”과 “다수성” 같은 것들이지만 다른 범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결”과 “통일”의 문제, 사건들을 시-공간처럼 통일된 형태로 “총체화”하는 문제... 아마도 사건들의 총체화를 사유하는 다른 방식도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문제들이 더 있겠죠. 여러분께 이런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하지만 또한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졌던 대화가 어떤 점에서 어려웠던 것인지를 환기하려 했습니다. 이번 세기에는 이런 대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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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뒤링 - 철학의 비정상성에 대한 주석 (베르그손의 한 강의로부터)

[옮긴이 주. 이 글은 베르그손의 1903년 12월 11일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 대한 주석이다. 이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이 점을 반복한다. 철학은 특별한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를 거부한다. 우리가 권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특정한 사유방식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각주:1] 그러나 어떤 노력인가? 기실,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동시적인 노력이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1903년 12월 11일의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각주:2] 그 후 철학적 활동의 변별적 특징화--이것이 바로 이 강의의 주제인데--는 "두 방법들", 즉 과학의 방법과 철학의 방법 사이의 구분을 통해 정확해진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노력들에 대한 이 첫번째 이미지는 인식의 두 이상들 사이, 별개의 두 영역의 규범성 사이의 정적 대립에 이르기는 커녕, 관계적이고 강도적인 측면을 간직한다. 이 이미지는 보충관계 이상의, 물리학적 의미에서 힘의 결합과 같은 무언가를 암시한다. 어쨌든 이 이미지는 사유의 일상적 방향의 "역전"이라는 여전히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방적인 이미지를 복잡화한다. 과학과 철학 간의 성공적인, 혹은 실패한 만남에 대한 성찰들을 일상적으로 부양하는 상대적 운동의 비유들 너머에서, 사태를 역동적으로 고찰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자.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업의 일상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각주:3] 같은 해, 조금 앞서 출간된 「형이상학 입문」의 유명한 이 공식은 우리에게 생성의 실재성을 놓치게 만드는 지성적 습관들의 영향력을 해체할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행 방향을 "뒤집어", "뚜렷한 윤곽을 지닌 개념들"에서 출발해서만 실재에 다다르는 작업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표적은 개념적 사유 자체, 혹은 개념적 사유가 포함하는 규정성의 요구라기보다는, 우리를 개념들에서 시작하도록 만들고, 개념들을 때로는 궁극 범주들처럼, 때로는 실재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을 실재의 기준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측정기나 체처럼 기능하도록 하는, 요컨대 개념들에서 계속적인 구성물이라는 쟁점을 발견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규정된 위치들과 기능들로 응고시키는 운동이었다. "실재의 모든 굴곡을 따르고 사물들의 내적인 삶의 운동 자체를 채택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들"[각주:4]에 호소하는 모순어법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난점은 여기에 있다. 유동적인 개념들도 여전히 개념들이다. 그리고 이 개념들이 삽입되는 사유의 운동은 갑작스런 분기를 통해 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지성주의의 사면을 거슬러 오르는 데 열중한다.[각주:5]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유의 운동이 그 방향을 역전시킨다 해도, 그것은 사실상 주도적인 계수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동일한 선을 따라 작업한다.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가했던 사람들은 이 점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은 더 해명할 필요가 있다. 1903년의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과 명시적으로 아주 가까운 용어들로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을 구분하며 시작함으로써 사태를 정확히 한다. 한편에는 과학적 인식이 연장하는 "일상적인 인식"의 노력이 있다. 이것은 고체, 부동성, 고정되고 명확한 윤곽을 지닌 실재들을 향하는 인식이다. 다른 한편에는 운동의 운동성 자체--베르그손이 "실재적 변화"라고 부르기에 이르는 것--에 대한 포착이 요구하는 특별한 노력이 있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인식 기법"[각주:6]은 우리의 고유한 활동성이 증언하는 가능성, 즉 우리 안에서 원하는 대로 특정한 운동을 생산할 뿐더러 그 운동을 우리 밖으로 투사할 가능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적 공감 작업"을 통해 그 운동을 우리 밖에서 생산되는 것으로서, 그러니까 공간 속에 펼쳐지는 기하학적 선의 형태가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한 쪽 끝에서는 그것을 만들어낸 운동에, 그러니까 지속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경험할 가능성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 기하학적 선의 자취를 정신적으로 (다시) 주파할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이러한 작업이 요구하는 노력은 이 작업이 사물을 현장에 되돌려놓기 위해 "자연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야"[각주:8]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유가 자연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은 사유로 하여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재구성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발생을 반대로 개념화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일련의 친숙한 대립들이 반대되는 방향이라는 말로 정식화된 이 첫번째 구분을 강화한다. 과학은 분석을 특권화한다. 과학은 정확히 결과물들, 즉 일단 운동이 실현된 후에 그 운동이 남긴 자취들에서 출발하여 작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직관은 직관에 의존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베르그손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이 특성을 설명하는데, 이 사례들은 직관의 전면적이고 총괄적인 성격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내밀하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마치 총괄적인 것처럼" 안다. 하지만 한 영혼의 형태,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영혼의 거동을 "표현하기에는 어떤 말도 충분히 단순하지 않다."[각주:9]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표현을 빌자면, 좋은 화가는 모델로부터 그 모델의 독자적singulière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물결치는", "구불거리는" 선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발생적 선"[각주:10]은 형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 선은 한 개인의 다양한 가시적 형태들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이자 단순한 행위 혹은 운동을 번역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전반적인 음조는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21세기 초에 뒤쳐진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강의의 정확히 이 부분에서 이 철학자는 우리를 위한 놀라움을 준비해 두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면역체계의 환기를 위한"추가접종piqûre de rappel"이라는 의미에서--하나의 환기rappel을 준비해두었다. 철학과 예술(모성애의 사례를 고려한다면 여기에 "감정"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에는 "중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철학적 직관은 바로 개체적인 것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철학적 직관,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범주, 유들과 관련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새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자문한다거나, 그 얼굴 생김새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들, 물질의 문제, 의식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사변할 것이다. 이것들은 분석의 결과들이라기보다는 철학자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하는 직관들이다."[각주:11]

귀중한 환기점이다. 베르그손주의가 우리를 추상들로부터 떼어내어 곧장 독자성의 영역으로 향하게 한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사유의 개별화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혼동한 모든 사람들은 이 환기점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일반 관념의 학문으로서 철학의 전통적 개념화에 대한 비판은 진정한 개체성을 드러내는 질적 차이에 접근할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함을 고발하는 베르그손의 빈번한 언급과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일반성의 요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적인 것générique의 요소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된다. 철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유들, 실재의 층위들 혹은 영역들, 경험의 폭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경험 자체나 예술의 작업을 대체하여 우리에게 개별적 실재들을 포착하게 한다고 자처한 바가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직관은 지성적 활동의 평면 위에 감성을 중복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우선은 방법, 즉 개념들의 기예로서의 무언가이다. 더욱이 이러한 방법은 이중적이다. 베르그손은 곧장 이 점을 설명하려 애쓴다. "방법은 이중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철학사로의 회귀와 학설들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각주:12] 이것이 바로 "지성주의적 환상에 대한 지성적 반대급부"[각주:13]이다. "거짓 문제들"의 해명, 그리고 우선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 요컨대, 이차적인 분석. 그러나 또한, 그리고 동시적으로, 베르그손이 다른 곳에서 사실상 문제들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체계들의 역사.[각주:14]

하지만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이러한 비판적 차원이 철학적 활동이 배양되는 인식의 생산 과정에서 그가 분석적 기법들에 인정하는 충분히 긍정적인 성격을 시야에서 놓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언어편중주의verbalisme의 비판, 개념들의 단순한 조작적 변증법에 머무는 이론들에 대한 거부가 분석이 필연적으로 관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분석은 관찰과 기술 작업을 통해 사실들을 도출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케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실증 과학이 철학에 주는 이점이다. 실증과학은 이론들을 생산하기에 앞서 훌륭한 소여들의 공급자이다. 의식의 직접 소여 옆에는 에너지의 감소나 기억의 질병들에 관련된 물리학적 질서나 생리학적 질서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실증 과학이 없다면 철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학이 몇몇 지점들에서 과학의 현 상태와 충분히 동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들을 충분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15]...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방법이 문제시되는 경우, 특별히 출발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발점의 선택은 운동 방향만큼이나 결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들로 시작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들이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철학적 이점을 은폐할 수 있는 합리화를 덧붙임으로써 사실들을 특정한 관점 속에 넣는 과학 이론들의 틀 속에서 제시된다 하더라도, 사실들을 경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철학적 직관이 운동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을 동반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분석이야말로 철학이 정확해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실의 선들과 접촉하고, 따라서 결국은 거기서 떨어져 나올지라도 대개의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사실의 선들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적 판형에 스스로를 적용한다. 분석은, 그리고 심지어 변증법조차, "직관을 시험하기 위해 필요한"[각주:16] 것들이다. 혹은 베르그손이 1903년 강의에서 이야기하듯, "철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석들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결과들과 동화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노력을 통해, 일종의 도약을 통해, 진정한 도약을 통해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하여, 이 직관에서 출발하고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소여들을 재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거짓된 길에 위치한 것이다. 분석과 접촉하여 끊임없이 직관을 시험하지 않고서 직관을, 뭐랄까, 진술하는 데 그치는 철학은 순전한 공상일 것이다."[각주:17]

거짓, 공상. 베르그손이 "자유롭게 내버려져" 과학이 그 실천적 조건들을 제공할 실험적 제어와는 독립적으로 그 문제를 공식화하는 철학이 이룰 일탈을 특징짓기 위해 이렇게나 단호한 용어들을 선택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난 직관은 철학 전체를 일종의 백일몽 속으로 전복시키며,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주의의 거대한 주제들--지속, 창조, 자유 등--의 단순한 언어적 반복을 노리고 있다. 그것은 우아한 착란délire--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착란은 dé-lirer, 즉 고랑sillon에서 벗어나기를 의미한다--의 위험이다. 최선의 해독제는 다시 한번 말하건대, 시작점에 주의를 기울이는[깨어있는] 것이다. 개념들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지만, 직관에서만 출발해서도 안된다. 언제나 사실들을 통해, 분석이 밝혀낼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 시작해야 한다. 심지어 일단 직관에 "자리잡은" 뒤에도, 사실과 접촉하여 직관을 전개하는 일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깨어있어]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직관이 말하자면 분석 쪽으로 자기 자신을 구부려서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공통 표면"[각주:18]을  통해 분석을 뒤따르는 이러한 복잡한 운동이 베르그손주의의 독특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일상적인 모티프, 흐름이나 방향이라는 개념들과 연결된 직관들의 벡터적인 모티프와의 단절을 드러내는 하나의 위상학적인 이미지가 강제된다.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여러번 여기에 호소한다. 그것은 비틀림torsion이다. 베르그손은 수학자 에밀 보렐에게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적 활동은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일종의 비틀림"[각주:19]의 결과다. 이 표현은 이미 『창조적 진화』에서부터 등장한다. 진정한 운동성, 그러니까 생성의 창조적 측면을 사유하는 것은 지성에게 있어 "지성의 자연적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지성이 "스스로 비틀리는 것"[각주:20]을 전제한다.

이 이미지는 레옹 브룅슈빅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 아름다운 헌사의 텍스트에서, "지속 속의" 사의 특징적인 작업이 실천적으로는 아주 힘든 직관의 작업이기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각주:21]는 역설을 강조한다. 직관이 요구하는 노력이 그렇게나 힘든 것이라면, 그 이유는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이 비틀림으로 인해 관건이 되는 것이 단순히 일상적 인식과 과학의 지성적 진행이 수행되는 것과 평행한 길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본성에 반하는 저지받은 운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베르그손은 앞선 모든 고찰들을 충분히 잘 요약하는 기이한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함이 절대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각주:22] 이것이 "철학함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이지 않다..."가 아님에 주목하자. 이 뉘앙스를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어쩌면 들뢰즈처럼 "상궤에서 벗어난 운동들"에 체계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와, 과학적 인식의 자연적 운동을 언제나 몇몇 정확한 지점에서 바로잡거나 교정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인식이 실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방식 중 하나로 남는 실증적 형이상학 사이의 차이는 여기에서 작동할지도 모른다.





  1.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2007, p.95. 베르그손은 청중들과 독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요구되는 이 노력을 "과격하다violent"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Ibid., pp.157, 210, 213). 이러한 준-생리학적인 보충을 무엇이 정당화하는지는 뒤이어 보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édité par A. François, Paris 2018, p. 19.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이 강의는 그 해의 첫 강의이다. 이 강의는 베르그손이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 라틴 철학사" 강의직(강의명에도 불구하고 근대 철학으로의 수많은 주제이탈이 이루어졌다)을 맡아 수행했던 이전 3년 간의 강의에서 제시되었던 연구들을 방법론적으로 요점정리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14. [본문으로]
  4. Ibid., p. 213. [본문으로]
  5. Ibid., p. 206: "만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면 형이상학은 단지 사유 작업의 자연적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 정신의 확장을 통해 즉각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물 속에 위치하여, 결국 개념들에서 실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서 개념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일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6.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1. [본문으로]
  7. Voir Durée et Simultanéité, Paris 2009, pp. 151-156. [본문으로]
  8.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
  9. Ibid., p. 23. [본문으로]
  10. Ibid. 이 사례는 다음 해에 펠릭스 라베송에게 헌사되어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64에도 실린 저자 소개에도 등장한다. "발생적 축"이라는 표현은 라베송의 것이다. [본문으로]
  11.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69. [본문으로]
  14. 1899년부터 테오뒬 리보가 가지고 있었던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근대철학 교수직으로 옮길 때, 베르그손의 본래 계획은 전통적인 "체계들의 역사"를 "문제들의 역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voir R.-M. Mossé-Bastide, Bergson éducateur, Paris 1955, p. 65). 인과의 관념, 시간의 관념, 기억의 관념, 자유의 관념, 의지의 관념, 어떤 관념이 문제시되건 간에, 베르그손은 그의 강의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체적인 문제들의 변형을 추적하고, 그보다 앞서 서로 다른 학설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던 방식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의 정확한 공식화를 도출하고자 하는 데 할애하였다. 베르그손은 이 "위대한 문제들"에 있어 상반되는 두 주장들이 종종 공통 전제 위에서 반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그는 연속성의 외양 하에서 사실상 새로운 문제를 여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에도 동일한 관심을 기울인다("유"를 통한 사유에서 근대적인 "법칙" 관념으로의 이행이 함축하는 자연 관념의 변형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시간 관념에 대한 1902-1903년 강의의 핵심에 위치한 이 질문은 기억 이론들을 다루는 1903-1904년 강의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창조적 진화』의 3장과 4장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5.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6.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2007, p. 239.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폴-앙투안 미켈과 함께 서명한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 : 교토 선언문」을 참조하라. 이 글은 «Dissertatio: Revista de Filosofia», volume suplementar IV, dossiê Bergson, 2016 (https:// periodicos.ufpel.edu.br/ojs2/index.php/dissertatio/article/view/11010/7097)에 실렸고, 영문 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17.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p. 25-26. "끊임없이"라는 부사는 아주 축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그손은 1916년 마드리드의 학생들에게 이 점을 환기시킨다.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철학은 언제나 여러분이 대학에 있었을 때의 정신의 기질, 새로운 대상에 대한 연구나, 심지어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연구에 맞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기질을 요구한다"(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Paris 2011, p. 483). [본문으로]
  18.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44. [본문으로]
  19. H. Bergson, Réponse à un article d’É. Borel, janvier 1908 (dans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357). [본문으로]
  20.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op. cit., p. 162. 이 뒷부분에서, 베르그손은 오성이 개입시킨 장애물들을 극복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동일한 의미에서 "의지가 스스로 행하는 비틀림"에 대해 이야기한다(p. 251). [본문으로]
  21. La vie intérieure de l’intuition, texte reproduit en annexe de 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987. [본문으로]
  2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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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 - 기억 이론의 역사 1강 1903/12/11


여러분,

우리는 지난 3년 간, 철학과 문제들의 역사에 대한 일반적 입문을 살펴보았고, 작년의 강의에서는 결론을 끌어내고 철학을 하기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과 그 노력의 본성을 살펴보고 정의하려 했다.


우리는 이 노력이 그 본성과 방향에 의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즉 과학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방식으로 알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과 다르다고, 근본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이다.


이 결론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도록 하자. 뒤이을 내용을 위해서는 이 점이 필수적이니 말이다.


일상적 인식과 일상적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과학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고 조금은 거친 형태로 요약하자면, 이 인식은 무엇보다도 고체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보통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고정되고 확고하며 부동적인 윤곽을 가진 고체적 사물들에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행동은 이런 부류의 사물들에 대해 수행된다. 우리는 아주 명확한 윤곽을 지닌 사물들에 영향을 미친다. 말 그대로 말하건, 비유를 통해 말하건 간에, 우리는 견고함[고체성]을 필요로 한다.


물질적 사물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질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질을 액체적인 형태로 개념화하려 해 보자. 우리는 그것의 유동적인 부분들을 고찰하여, 이 액체가 액체인 이유는 그 부분들이 더 많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들 자체는 고체들인가 액체들인가? 그것들이 액체들이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유동적 부분들을 고찰하게 될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확고하고 고정된 윤곽을 지닌 안정적인 무언가에 도달할 때까지 다시 한 번 동일한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그것이 입자라거나 분자, 혹은 원자라고 원하는 대로 말해 보자.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입자를 아주 확고하고, 말하자면 고체적인 윤곽을 지닌 것으로 표상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왜 운동은 액체적이거나 기체적이라기보다는 고체적일 것인가? 원자론은 일반적으로 운동이 고체적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안정적이고 완전히 확고한 윤곽을 지닌 이러한 표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체적 물체가 물질이 겪는 변천의 마지막 단계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고찰해본다면, 물질의 최종 상태, 그 종점에 도달한 물질의 입자와 같은 무언가를 이 변천의 기원에 두는 것은 아주 철학적이지 않은 처사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태를 고찰한다. 반복하건대, 우리는 고체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행동은 고체들에 집중한다.


나는 이것이 말 그대로도 참이지만, 비유적으로도 참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동성을, 그러니까 결국 운동을 표상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일을 행하는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운동체의 운동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이 운동체가 자리를 옮겼다고 말하고 이 이동을 잇따르는 위치들로 표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말하자면 점 A와 점 B라고 부르는 두 끝점들 사이에 운동체가 지나쳐 가는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향하는 점 M, N, P 등을 끼워넣는다.


이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이 이동 자체를 분명히 표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련의 잇따르는 위치들로 표상하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동에서 위치들로 나아간다. 우리가 언제나 고체적 입자들을 가지고 우리의 액체성을 재조합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운동과 운동성을 위치의 연속을 가지고 재조합할 거이다. 이 위치들은 고체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안정적이고 고정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학이 이러한 방식으로만 운동을 다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과학은 운동을 위치들의 연속으로 표상해야 한다. 이동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을 벗어나는 것이거나, 아니면 과학이 새로운 위치들을, 언제나 위치들만을 개입시킴으로써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작업을 통해서는 적어도 그 자체로는 포착될 수 없는 이러한 운동체의 운동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운동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운동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작업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기법을 통해서 인식된다. 우리가 운동성인 한에서의 운동을 인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새로운 인식 기법에 호소하는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 운동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내적으로 이 점을 의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산하는 이 운동을 밖으로 투사할 수 있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운동체의 내부에 위치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안에서 포착하는 것을 그 안에서 포착하고 그 안에서 붙잡을 수 있다. 아! 그 때 우리는 운동에 대해, 행동에 대해 내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작업을 통해... 음 뭐라 말해야 할까? 우리가 작년에 말했던 것처럼 지적인 공감 작업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운동체의 내부로 옮겨가 말하자면 이 운동체의 운동성과 행위에 일치하는 이러한 작업과 운동체의 바깥 쪽에 위치하여 운동체의 위치들을 뒤따르고 위치들의 가산과 병렬을 통해 운동을 재구성하려는 작업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다. 후자의 경우, 즉 일상적인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경우, 우리는 운동으로부터 그 운동이 공간 속에 남겨둔 부동적인 흔적들, 지점들, 말하자면 잔여들을 포착한다. 그것들은 고체적 잔여들이다. 사람들은 이 잔여들을 요소로 삼아 운동을 재구성하려 하지만, 그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재구성해내는 것은 운동의 대략적인 모방물이다. 이 근사치를 원하는 만큼 멀리까지 밀고나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모방에 불과하다.


운동 그 자체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구성을 추상함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반대로 스스로를 생산하는 운동 자체 속에 위치하려 노력하는 인식 작업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작업을 직관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인위적 재구성, 대략적인 운동, 어림잡은 모방물, 사물의 실천적 등가성에 도달하는 작업을 우리는 분석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분석이 인식의 일상적인 기법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철학 외적인 인식에서는 정상적인 기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철학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석은 인식의 일상적인 방식이다. 반대로 직관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기법일 것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경사로를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다. 자연적인 것, 자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물들을 찾는 것이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물들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동성들을 붙잡는 것이지 운동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는 운동을, 행동을 안정적이고 서로에 대해 고체적인 요소들의 조합과 병렬을 통해 표상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말했던 이 직관, 전형적인 철학의 기법인 이 직관이 비록 일상적인 인식 방식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일상적 삶 속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관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직관을 가지고 있다. 혹은 적어도 우리가 임의의 대상에 대해 내밀하고 심층적인, 말하자면 총괄적인 인식을 가지는 경우에 우리는 이 직관을 소묘한다. 일상적 인식들 가운데 언제나 가능한, 가장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을 고찰해보자. 말하자면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갖는 인식을 생각해보자. 자신의 아이의 일화를, 자신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수천의 사태들을 이야기하는 어머니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어머니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이 결코 자신이 지각하고 아는 것을 정확하게 완전히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어머니들이 사람들이 가끔 “안다”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에서처럼 언제나 그들의 아이를 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평가함에 있어서, 즉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를 비교함에 있어서, 혹은 자신의 아이와 사람들이 제기하는 이러저러한 이상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실수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인식이 총괄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총괄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복잡한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해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말도 이를 표현할 정도로 충분히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혼의 형상, 정신적인 윤곽, 정신의 윤곽이다. 하지만 윤곽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의 표지, 무언가, 뭐랄까...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있는 무언가, 하나의 행동이다. 그것은 운동적이고 유동적인 윤곽이다. 그것은 아주 섬세한 무언가이고,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결코 끝낼 수 없을 것이다. 단어를 사용한다면 사태 주위를 선회하면서 가능한 모든 외적인 관점들을 추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관점들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기실 이러한 관점들을 아무리 접근시키더라도 언제나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가능한 관점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 사태를 표현하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을 끝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표현 불가능한 형상에 있어서 이 사태는 완전하고 총괄적인 것이다. 이것은 직관의 한 사례, 말 없는 인식의 한 사례이다. 말이 개입하자마자, 그것은 분석, 과학, 기술, 일화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경험한 것을 인식하게 하는 방법들이지만, 기술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하나의 단순한 사례였다. 다른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장의 미학, 창조함으로써 예술적 창조에 속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제시하려 했던 사람의 미학을 연구한다면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학 가운데 라베송이 즐겨 인용하는 한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아주 주목할만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선 우리에게 예술의 목적이 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분명한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이렇게 말한다. 특히 생에 대해서 말이다. 다음으로--이 점이 벌써 아주 주목할만한 생각인데--그는 생을 특징짓는 것이 하나의 물결치는 형태, 구물거리는 형태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생명체들을 구분해주는 것, 하나의 생명체를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것이, 그 생명체의 고유한 구불거림의 방식이라고 덧붙인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구불거림을 가지고 있다. 예술의 목표는 이 구불거림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생김새를, 예컨대 한 모델의 얼굴과 두상을 고찰할 때, 먼저 사람들이 보게 되는 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선이 존재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신의 사무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선은 말하자면 발생적인 선이지, 진짜 선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이다. 그것은 얼굴의 선들을 발생시키는 운동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무언가, 극도로 단순한 무언가이지만, 유동적인 것이다. 너무나도 유동적인 것이어서 예술가는 그것을 고정시킬 수 없고, 그의 정신의 시선으로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없다. 그럼에도 이것이 나머지 전체의 열쇠가 되는 것이며, 예술가가 이 무언가를, 다른 모든 것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이 알지못할 무언가를 붙잡게 된다면, 그는 일종의 닮음을, 그의 초상화의 본질 자체를 붙잡게 되는 것이다.


음... 나는 이렇게 말해볼 것이다. 측정을 통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다면--이러한 것은 가능할 것이다--, 즉, 얼굴의 치수를 재고, 그것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놓아, 얼굴의 세부사항을 정확히 재현하는 화가가 있다면, 사태를 밖으로부터 고찰하는 이 화가는 우리가 조금 전에 분석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일을 수행할 것이다. 그는 분석을 통해 작업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유사성에, 점점 더 완전해지는 닮음에 도달할 것이고, 그것은 점증하는 어림잡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대한 예술가, 천재적인 예술가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식으로 작업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그 예술가는 자신의 모델을 심층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어느 한 순간에 모든 다른 것이 유래할 발생적인 축, 운동의 발생적인 선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 빈치의 말에 따르면, 이 선은 화폭 위에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으로도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체의 열쇠를 제공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의 원천, 기원에 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고찰하여 서로 대립시켰던 두 가지 기법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에 대한 사례들을 발견하였고, 위대한 예술가들에게서 그것들에 대한 서술과 용법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서로 반대되는 방향과 의미를 지는 두 기법을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과학적 인식을,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인식을 규정했던 것이다.


나는 조금 전에 예술에서 사례를 빌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철학이 예술이라고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철학의 기법과 예술가의 기법 사이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중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는 언제나 개체적인 것을 되찾으려 하고, 내가 조금 전에 인용한 직관은 개체적인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반면,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직관은 사물들의 범주, 유들과 관련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새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자문한다거나, 그 얼굴 생김새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들, 물질의 문제, 의식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사변할 것이다. 이것들은 분석의 결과들이라기보다는 철학자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하는 직관들이다. 우리가 말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이다.


직관을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법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정의한 바 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몇몇 사례들을 제공하려 애썼다. 방법은 이중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분석에 대한 연구와 비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철학사로의 회귀와 학설들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요점은 두 가지이다. 분석의 비판과 체계의 역사.


먼저 분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분석에서, 즉 사실들에 대한 기술, 관찰, 실증 과학의 소여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증 과학이 없다면 철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학이 몇몇 지점들에서 과학의 현 상태와 충분히 동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들을 충분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철학은 과학 전체와 동화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증 과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화가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기 위해 우선 그 모델을 관조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델을 주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모델을 결코 충분히 주시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모델을 측정하고 그것을 화폭 위에 전개한다고 무언가 뛰어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에서 출발한다 해도, 우리가 직관에서 출발해서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화폭 위에서 이 칫수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초상화는 닮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철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석들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결과들과 동화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노력을 통해, 일종의 도약을 통해, 진정한 도약을 통해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하여, 이 직관에서 출발하고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소여들을 재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위치한 것이다. 분석과 접촉하여 끊임없이 직관을 시험하지 않고서 직관을, 뭐랄까, 진술하는 데 그치는 철학은 순전한 공상일 것이다. 철학은 질증 과학과 접촉하여 언제나 끊임없이 검증될 때에만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분석을 가지고서는 절대 직관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직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관에서 출발하여 직관을 따르고 직관을 전개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리를 빗겨가 공상 속에, 꿈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직관이 아니다.


이상이 첫 번째 지점, 분석에 대한 비판이다. 두 번째 지점은 체계들에 대한 연구, 철학사로의 회귀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철학사는 이런 관점에 대해 이중적인 효용을 갖는다. 한편으로 철학사는 우리가 말했던 직관이 위대한 사상가들, 위대한 철학자들, 거장들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철학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힘이 닿는 한에서 따라야 할 모델을 제공해준다. 철학사는 이러한 첫 번째 이점, 첫 번째 효과를 갖는다. 둘째로, 철학사는 해야 할 것 말고도 피해야 할 것도 알려준다. 철학사는 철학이 제기하는 거대한 난점들, 해결 불가능한 유명한 문제들, 체계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대립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직관 옆에, 띄엄띄엄 나타난 직관 옆에, 철학사의 아름다운 대로와 같은 직관 옆에, 이러한 길을 따라 갈림길들, 때로는 오랫동안 따라지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여러 길들이 존재한다. 이 길들은 직관보다는 분석의 방향으로 향하는 길들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역할이 과학적인 분석을 행하고, 과학을 고찰하는 것이라는, 과학을 더 멀리 밀어가고 더 멀리 연장하며 과학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피해하기 어렵다. 철학자는 과학을 더 멀리까지 따라가고 과학과 같은 길로 나아감으로써 철학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마치 과학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양, 마치 과학 너머에 무지 말고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양 말이다. 이 무지는 아름다운 공식들 밑에 숨겨져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 막다른 길에 도달하는 것이며, 대립에, 모든 부류의 모순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과학보다 더 멀리 나아가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들을 일반화하는 것, 이미 획득된 결과들을 붙잡아 그것을 확장하고, 거기에 더 높은 일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그 결론 속에서 일반성의 등급을 시험했으며, 우리는 그보다 멀리 나아갈 권리가 없다.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간다면, 그만큼 확장시킬 수 있을 다른 과학적 일반화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일반화들이 서로 일치한다면 그것들은 더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경우 여러 일반화들 대신에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확장시키고 더 멀리까지 밀고나가 하나의 체계를 만드냐에 따라 하나의 일반화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차이나고, 서로 분쟁하는 여러 체계들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적 소여에 근거할 것이나, 모두가 과학적 소여들을 너무 많이 넘어설 것이고, 결코 화해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직관이 이루었던 것을 보여주는 철학사는 사람들이 철학적 계시의 진정한 목표와 형이상학의 진정한 목적을 망각하여, 철학의 역할도, 대상도, 방법도 갖지 않는, 단순히 연장되었을 뿐인 과학을 철학의 색조로 제시할 때 겪게 되는 위험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분석은 과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실증 과학에 속한다. 반면 철학은 직관에 의존해야 한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두 가지 방법이다.


우리는 올해의 강의에서 이러한 일반성들을 드러낸 뒤에, 올해와 내년에는 몇몇 구체적인 문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는 심리학의 문제로 시작하려 한다. 이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철학의 목표가 직관을 취하는 것이라면, 철학이 연구되는 대상과의 지성적 공감 속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요컨대 가장 쉬운 것은 심리학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내적이며, 우리가 가장 쉽게 공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덜 쉬운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이라고 말했다. 맞다. 반성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밖으로부터 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해야 할 직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당히 큰 노력을 가정한다. 비록 이 노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외출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심리학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중에서 우리는 먼저 기억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의식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기억이 없는 의식, 즉 선행하는 것과 뒤따르는 것에 대한 인상이 없는 의식은 없다. 기억이 없는 의식을 가정해 보라. 그러면 언제나 순간적인 것 속에, 현행적 순간 속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선행하는 순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의식에 대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의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일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무의식을 정의하려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순간적 정신이다. 원한다면, 그것은 순간적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이 존재하는 한, 기억이 존재한다. 기억은 의식의 특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난 몇 해간 행했던 증명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귀결은 실존의 서로 다른 정도들이 그만큼의 기억의 정도들에 따라 특징지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증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삭제하고 순간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기억이 의식의 본질 자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을 연구할 것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말한 두 가지 방법, 분석에 대한 연구와 비판, 그리고 체계의 진화에 대한 연구를 적용할 것이다.


역사는 고찰하지 말고, 분석부터 시작해보자. 오늘 나는 이 연구의 구도를 그리기 위해 단지 이 분석과 역사에 대해 간략히 몇 마디만 하려고 한다.


분석부터 시작해보자. 기억에 대한 분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심리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들의 총체이다. 올해 강의의 첫 번째 시간에 우리는 이 결과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몇몇 결론들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의 거대한 선들을 아주 간략하게 상기시킬 것이다.


기억의 양상들, 기억의 형성과 전개를 고찰한다면, 네 가지 계기, 네 가지 본질적인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 상기시켜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지점은 기억의 형성이다. 단순한 사례를 들도록 하겠다. 시각적 기억, 우리 모두가 특정한 얼굴을 보고 갖게 되는 기억, 예컨대 친구의 얼굴을 보고 갖게 되는 기억을 생각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이 얼굴을 지각했다. 당신은 시각적인 인생을 갖게 되었다. 인상은 망막 위에 맺힌다. 그 인상은 특정한 감관으로, 뇌 중추들로 보내졌다. 이로부터 특정한 변양이 생산된다.


이렇게 하여 특정한 뇌 중추 속에 변양이 생겨난다. 이 변양은 어떤 것인가? 이 인상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미지들을, 은유들을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사태가 축음기처럼 일어난다고 말했다. 뾰족함 침이 축음기 원판 위에 도안을 그린다. 이 도안이 남아서 진동을 만들어내고, 진동을 찍어낸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은유들을 사용한다. 사실 뇌 중추 속에서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 사람들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특정 수의 세포들, 혹은 사람들이 일컫는 뉴런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변양되었다. 이 뉴런들은 서로 연결되었다. 즉, 어떤 시각적 인상, 망막에 맺히는 인상이 주어진다면, 이 인상은 뇌로 보내져 특정한 세포들의, 뭐랄까, 역동적인 연합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양된 특정 세포들의 소통을 결정한다. 세포들 간의 이러한 안정적인 연합이 이제부터 기억을 축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더 명료한 은유를 원한다면, 전기 램프들을, 장식조명을 위해서 몇몇 도안들에 따라, 예컨대 꽃 모양으로 배치된 에디슨의 램프들을 가정해보자. 그 램프들을 서로 연결하는 선은 특정한 도안을 구성한다. 이런 부류의 가능한 무한한 도안들이 존재한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각적 기억에 대해서 특정 수의 세포들, 뇌의 뉴런들이 관념적인 선에 의해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형상, 이러한 도안이 이제부터 거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물질적 등가물일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뇌의 메커니즘의 형성.


이제 시각적 기억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 기억은 재생산될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상기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특정 수의 세포들이 자극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인상을 받는다. 거기에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기억이 재생산될 것이다.


조금 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비유를 다시 사용하자면, 한밤 중에 에디슨의 램프들이 그리는 꽃 모양이 있다. 전류가 흐르면 모든 전구가 켜지고, 꽃 모양이 한밤 중에 그려질 것이다. 전류가 흐르기를 그친다면,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뇌세포들이 거기에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최초의 변양이 다시 생겨날 때, 전류가, 즉 신경 전류가 흐를 때, 전구가 켜진다. 기억이 한밤 중으로부터 나온다.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전류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면 기억은 무의식으로 다시 들어간다. 기억의 상기는 이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뇌의 메커니즘이 다시 작동될 때 우리는 이 기억이 처음의 인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 현상이 처음보다 덜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 뇌의 상태가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더 이상 최초의 상태가 가졌던 힘과 강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억을 이루는 것은 덜 강렬해진 최초의 상태, 완화된 최초의 상태이다.


이게 첫 번째 계기와 두 번째 계기이다. 이제 세 번째 계기를 살펴보자. 뇌피질 속에 저장된 이 기억은 이웃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들은 심지어 이 기억을 잠식할 것이다. 이 기억이 다시 활기를 얻어, 국재화되고, 자극받을 때, 그것은 또한 이웃 기억들도 자극한다. 결과적으로 이 기억은 의식 속에 다시 나타날 때 다른 기억들을 뒤따라 불러낸다.


이 기억들은 어떤 것들일까? 우선 가장 가까운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본래 기억과 동시에, 본래 기억과 함께 인상을 준 기억들, 본래 기억과 연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다음으로, 본래 기억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기억들, 즉 본래 기억과 닮은 기억들도 있다. 이런 이유로 기억 전체로 되돌아간 기억은 자신과 함께 다른 기억들을, 자신과 근접한 기억들과 자신과 닮은 기억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근접성과 유사성, 이것들이 바로 기억들이 서로를 암시하는 두 가지 법칙, 즉 기억 연합의 법칙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기이다.


네 번째 계기. 아! 그것은 기억의 정확한 국재화이다. 즉, 정신에 표상되는 기억이 과거의 특정한 한 지점에 국재화되어 있다는 사태이다. 나는 뗀느가 이 작업에 대해 제시했던 그 모든 세부사항들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전적인 것으로 남은 분석이다.


뗀느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기억은 삽입을 통한 몇몇 표지들jalons 덕에 과거 속에 국재화된다. 즉, 예컨대 특정 시기, 특정 범주의 기억을 위치시켜야 할 과거의 정확한 한 지점을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우리는 기억들의 쌍들을 불러내 그 사이에 국재화할 기억을 끼워넣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두 기억 사이에서 그 기억의 정확한 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억을 미끄러지도록 할 것이다. 그 순간에 기억은 과거 속에 국재화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기억 형성의 네 단계, 네 계기들이다. 이것이 기억에 대한 분석 속에서 거대한 참조지점들이다. 뇌의 메커니즘의 형성, 메커니즘의 자극, 연합, 국재화. 이러한 분석을 우리는 그 모든 세부사항에 있어서 전개하고, 서로 다른 전개 방향을 따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분석인 한에서 수용하가능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수용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분석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기억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 모든 일은 마치 이것이 진정한, 본질적인, 근본적인 과정인 것처럼 일어난다.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이러한 것인 양 일어난다. 심지어 사태가 진짜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양 처신하고 추론하지 않는다면, 기억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분석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태가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심리학적인 관점 옆에는 다른 관점, 철학적 관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이 네 가지 계기를 붙잡아, 원한다면, 마지막 계기에서 시작해보자. 네 번째 계기에서 세 번째 계기로, 세 번째에서 두 번째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 계기로 나아가 보자.


국재화를 먼저 다루어보자. 하나의 기억을 국재화하여 그것을 참조지점이 되는 다른 두 기억 사이에 위치시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알고 있음을 가정한다. 과거 속에 국재화할 기억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나는 이 기억을 그 사이에 위치시킬 두 기억, 혹은 여러 기억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기억들을 어떻게 찾게 될 것인가? 내가 이 작업, 뗀느가 말하는 삽입의 작업이 수행되는 순간에 국재화가 이미 수행되어 있거나, 혹은 거의 수행되어 있거나 잠재적으로 수행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국재화를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표현하기 위해, 심지어 그것을 나 자신에게 표현하기 위해, 그 국재화에 대해 표현 가능하고 소통 가능한 관념을 갖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이렇게 진행해야 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진행하는 순간, 나는 이미 해결을 향한 길 위에 있게 된다. 심지어 해결책은 이미 발견되어 있다. 이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억을 국재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심층적인 느낌에 호소해 보자. 기억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그에 대한 분석을 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기억에 내재화하도록 노력해 보자. 내가 어떤 기억에 스스로 내재화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 기억이 국재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하나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하는 시기의 표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 표지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 각자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실존의 서로 다른 시기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색조와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이전에, 오래 전에 살았던 장소를 다시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각하면서 우리가 지금 지각하는 것 말고도 다른 것이 존재했음을, 어떤 뉘앙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덧붙어 있었음을, 말하자면 그 광경을 둘러싸고 있던 후광이, 가장자리가 존재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 가장자리를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더 이상 찾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과거 속으로 이행하게 될 것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 경우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할수록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 우리가 지각하는 명확한 윤곽이 이러한 종류의 고유한 인상의 재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것을 다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떤 장소를 다시 보려 할 때 실망을 겪으며 기억 속에, 순수한 꿈 속에 남겨두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는 점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 사물을 대면할 때보다도 더 사물 자체에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지 못할 과거의 특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불가분적인 무언가이다.


그러한 시기의 기억을 국재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단순한 인상을 취하여, 그것을 굴절시키고 분할하고 분산시키려 노력한다. 우리는 특정한 평면의 위로 매우 높은 곳까지 찾으러 가서 발견한 몇몇 불가분적인 지점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일련의 굴절을 통해 조금씩 분할하여 특정한 평면 위에 중첩시킨다. 뗀느는 이 평면 위에서 기억들을 발견한 것이다. 뗀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특정한 기억이 동일한 평면 위에서 발견된 다른 두 기억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 분산은 이미 행해진 것이다. 국재화의 본질적인 지점 전체는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국재화의 과정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계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국재화 과정은 삽입이나 병렬의 과정이 아니다. 그 과정은 생물학적 과정, 수정란의 분열 과정과 훨씬 더 유사한 것이다. 수정란은 배아의 모든 단계를 가로지르며 분열되고 분할된다. 직관은 이러한 것이다. 그 시기는 기억들로 분할되고 분열된다. 이 기억들은 분산되어, 이 시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들의 전개를 한 평면 위에서 구성한다.


국재화가 이렇게 일단 실현되고 나면, 우리는 이 국재화를 이해하기 위해 직관을 통해 그 과정의 내부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직관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과들을 취하여 형체를 갖게 된 기억들, 의식적인 것이 된 기억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평면 위에 분산된 기억들의 작업 자체를 따르도록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것들이 분산되도록 하는 운동을 포착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본성에 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외려 철학적인 본성의 노력일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방향으로 행해지는 노력이 아니다.


이제 세 번째 지점에 도달했다. 이전의 가설에서는 국재화의 조건이 되는 연합--국재화를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연합의 과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하나의 실재이다. 아무도 그 점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의 연합, 기억을 통한 다른 기억의 암시. 누구도 우리의 기억들이 그들 간의 유사성과 또한 근접성에 의해 서로 이끌린다는 점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기억들의 삶을 설명하는 데 전적으로 충분한 것인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모든 기억들에는 각기 그 기억에 유사하고, 따라서 그 기억에 이끌릴 수 있는 수천의 기억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한 기억이 수천 수만, 원하는 만큼 존재한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닮아있다. 정도의 문제이다. 두 대상이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공통점이 없는 두 대상은 없다.


일단 기억이 호출되고 나면, 기억이 불려오고 나면, 언제나 그 기억이 불려온 이유는 그것이 앞선 기억과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누구도 그것이 불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마찬가지로 유사하고 선행하던 다른 수천의 기억들도 마찬가지로 불려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왜 이 기억이 불려왔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 번째 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세 번째 지점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기억을 고체적인 사물들처럼, 말하자면 서로를 끌어당기는 물체들처럼 표상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기억들 간의 인력이라고 불러왔던 것을 통해 현상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자, 사물들이 일단 이루어진 후에 행해지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우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물 속으로 침투하게 해주지 못한다.


두 번째 지점과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몇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을 삼가고 요약에 그쳐야겠다. 단지 다음과 같은 내용만 말해보려 한다. 우리가 이 두 지점을 함께 고찰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단 수립된 메커니즘의 형태 하에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억들의 대화이다. 뇌가 기억에 필요불가결하리라는 사실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뇌가 없다면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의 작업이 뇌의 작업이며 기억의 손상이 뇌의 손상에 상응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어떤 기억이 특정한 뇌의 장치에 상응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분석 속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태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양 행동하는 것은 이득이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가설이 일으키는 극복 불가능한 난점들은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가진 형이상학을 한켠에 치워두고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 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친구의 얼굴을 포착했다. 당신의 망막에 인상이 맺혔다. 이 인상은 뇌 중추들로 전달되어 특정한 메커니즘이 남겨졌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겠다. 하나의 시각적 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의 인상이 존재한다. 먼저 나는 이 사람을 한번만 보았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볼때마다, 그를 동일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주변 환경 속에서, 동일한 조명으로 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를 5분동안 한번밖에 보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그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적어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고 말했다면, 내 망막 속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이미지가 맺혔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뇌에도 이에 상응하는 수천 수백만의 [이미지들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이다. 당신은 하나의 기억이라고 말했지만, 수백만의 기억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뇌의 이 수백만의 장치들이 단일한 무언가를 형성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그 점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주도권이, 즉 이 모든 것을 통일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정신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모든 점은 사실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의식 상태의 본질 자체를 망각하고 있다. 그 본질이란 의식의 유동성, 즉 의식이 서로 다른 수천, 수백만의 형태들을 통과해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있다. 당신은 무한정한 수의 이 모든 이미지들을 고정시킨다. 당신은 그 이미지들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시킨다. 당신은 고체적인 것을 갖는 것에 몰두하여 이 모든 이미지들을 그것들을 낳은 대상과 혼동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이 하나의 이미지를 뇌의 장치의 윤곽들에 본따게 된다. 이 점은 놀랍지 않다. 당신은 그 윤곽들에 정확히 들어맞을 수 있도록 각각의 요철을 미리 표상한다.


따라서 사실 이러한 분석 전체는, 여기가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인데, 이러한 분석 전체는 어떤 의식 상태로서의 기억을 무언가 견고하고 정지해 있는 것으로 만들어, 거기서 운동과 작용, 즉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기보다는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자 하는 편파적인 관념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린다.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분석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결과물들을 취하여 이 결과물들을 통한 사물의 대략적 재구성, 즉 침전물을 통한, 과정의 결정화들을 통한 과정의 대략적인 재구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은 불가피한 것이다. 분석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기억의 심리학의 한 측면밖에 보여줄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것을 위한, 그 과정을 만질 수 있고 정지된 결과들 속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즉 더이상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 연구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 강의의 전반부가 될 것이다. 전반부는 상당히 길 것이다. 강의의 중반부에서 우리는 이론들의 역사적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일 것이다--이것이 우리 강의의 결론일 것이다--. 이 연구가 다다른 거대한 형이상학적 난점들,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내속적인 난점들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이 난점들은 철학이 너무나도 자주 자신의 역할이 분석을 연장하여 분석과 동일한 방향으로 분석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초래된 것이라는 점 말이다. 아! 이런 방식으로 사태를 이해한다면, 기억을 뇌의 과정에 덧붙어 그 선을 정확히 따르는 무언가처럼 표상한다면, 그러면 먼저 왜 물질 말고도 의식이 존재하는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이 두 사물이 서로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한다면, 문제를 다른쪽 끝에서 붙잡는다면, 즉 고체적인 것, 물질에서 출발하여 의식을 거기에 중첩시키는 대신 동적인 것, 액체적인 것, 의식에서 출발하여 물질이 생성의 여러 유형의 완만한 결정화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한다면, 사태는 훨씬 단순해질 것이고 불가해한 것처럼 보였던 문제는 해결 가능한 것은 아니라 해도 언젠가 심대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 강의의 중반부일 것이다. 이론들의 연구와 비판 말이다. 후반부는 한 두 강으로만 이루어지게 될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 귀결을 보게 될 것이다.


다음 주 금요일에 우리는 이 강의의 전반부에 착수할 것이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분석들을 연구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의의 전반부는 상당히 길 것이고 또 가장 구체적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가능한 한 많은 사실들과 관찰들을 포함시켜 더 교훈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국한되어 있었던 다소 추상적인 일반성들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이다.


Henri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PUF,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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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4/4)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철학의 길 (2017년 6월 22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예술의 대상을 찾아서 떠나볼까요. 예술의 대상“들”이 아니라 예술의 대상 “자체”, 예술의 기능, 예술의 존재이유, 예술의 목적 말이죠.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실재가 우리의 감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면, 우리가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술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베르그손 교수님,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녹음된 목소리 : 베르그손 아카이브, 베르그손이 읽는 『웃음』의 발췌문)


앙리 베르그손 : 예술의 대상은 무엇인가? 실재가 우리의 감관과 의식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면, 우리가 사물들이나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예술은 무용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예술가일 것이다. 그 경우 우리의 영혼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어 계속해서 전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 레트 : 안녕하세요 폴-앙투안 미켈.


폴-앙투안 미켈 : 안녕하세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미켈 : 네, 베르그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인데요.


반 레트 : 정말인가요?


미켈 : 이건... 이건 정말이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는 이 철학자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이 드네요. 


반 레트 : 제가 알기로는 베르그손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데요. 1936년 6월 3일 예술의 대상을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미켈 : 이걸 듣고 나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점을 고백해야겠군요(웃음). 


반 레트 : 사람들이 이걸 들을 때마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침 잘 됐네요. 우리는 내일 바로 이런 효과를 다룰거니까요. 여하간, 당신은 뚤루즈 2, 르 미라일 대학의 현대철학 교수입니다.


미켈 : 바로 그렇습니다.


반 레트 : 당신은 가르니에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사유와 운동』을 내셨죠. 이번주에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프랑스 대학출판의 까드리주 총서 판, 그러니까 다른 출판사의 판본이지만요. 당신은 다른 출판사에서 피에르 몽테벨로와 세바스티앙 미라베트의 주석을 포함하여 이 책을 기획하신 거지요.


미켈 : 맞습니다. 『사유와 운동』의 다른 판본이요.


반 레트 : 예. 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다섯 번째 강연인 「변화의 지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것입니다. 1911년 5월 26-27일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행해진 강연이죠.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 텍스트는 아주 어려운 텍스트라고요.


미켈 :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 텍스트는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이 방송 덕에 이 점이 훨씬 더 잘 드러나겠지만, 베르그손이 고등학교 졸업반terminale의 철학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철학자라는 이미지 말입니다. 사실 이 글이 쉽게 쓰여있긴 하지만, 이 글을 조금 건드려보기만 하면, 이 텍스트 이면에 자리한 문제들을 이해하려고 해보면, 이 텍스트는 엄청나게 미묘하여 여러 방식의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가 거대한 난점들에 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죠.


반 레트 : 그럼 출발해보죠!


미켈 : 네. 뭐 출발하죠. 문제 없습니다(웃음).


(음악 : Coltrane, My favorite things)


반 레트 :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만한 지점이 하나 있다. 만일 감관과 의식이 무제한적인 범위를 가졌다면, 만일 지각능력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방향으로 무한정 뻗어간다면, 우리는 개념화할 필요도 추론할 필요도 없으리라는 점이다. 개념화는 지각할 수 없을 때 쓰이는 부득이한 수단이고, 추론은 지각의 빈칸을 메우거나 지각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추상적인 일반 관념들의 효용을 부인하지 않는다—은행권의 가치에 반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폐가 단지 금에 대한 하나의 약속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화 또한 그것이 표상하는 가능적 지각을 통해서만 가치를 갖는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1911년 베르그손을 초청한 옥스포드 대학의 위원회에게 보내는 감사의 말이 끝난 뒤, 이 강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첫번째 요점은 지각과 개념화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개념화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개념화는 지각할 수 없을 때 쓰이는 부득이한 수단이다.”


미켈 : 그렇습니다.


반 레트 :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폴-앙투안 미켈.


미켈 : 음 그건...(웃음) 제 생각으로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첫번째 지점이 있다면, 이 내용은 『사유와 운동』의 첫번째 강연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아니 사실 첫 페이지부터 나오는 내용이죠. 


반 레트 : 네. 


미켈 : 첫번째 강연의 첫 페이지요.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에서 가장 결여되어 왔던 것은 정확성이다.” 그래요. 왜 철학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되었을까요? 철학은 추상적인 경우에 정확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철학이 “체계”에 대한 사유가 될 때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철학은 그때 너무 큰 옷을 입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체계들에 대한 사유는 너무 큰 사유입니다. 그래서 이 사유는 더 이상 실재를 접촉하지도, 실재에 다다르지도 못합니다. 실재를 접촉하고 실재에 다다르기 위해, 베르그손은 여기서 철학을 과학에 비교하는데요. 그가 정확하게...(웃음) 정당하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대되는, 직접적인 정확성이 존재합니다. 과학은 실험적이라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죠. 그렇죠? 베르그손이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실재에 다다르게 해 주는 것은 바로 경험입니다. 베르그손은 경험의 철학자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 텍스트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그손이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손의 입장은 항상 다의적이지요.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개념을 평가절하합니다. 반대로 그는 지각에 가치를 부여하지요. 아무렇게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지각에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이유는... 제 생각으로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베르그손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각의 확장입니다. 어떻게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그리고 누가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분명히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지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각의 확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질문 뒤에는 인물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누가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누가 지각의 확장을 실천하는가?”


반 레트 :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베르그손의 목소리가 읽어 준 발췌문에서 출발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베르그손은 “예술의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 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결국에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미켈 : 벌써 세번째 질문에 답하시는군요.


반 레트 : 예술은...


미켈 : 그 인물은 예술가입니다(웃음).


반 레트 : 음... 맞아요. 하지만 「변화의 지각」이라는 강연에서 예술가는 아주 일찍 등장하지요. 결국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우리가 실재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다면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암시된 바는 예술의 기능은 실재와의 이러한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점이겠지요.


미켈 : 정확합니다. 하지만 보세요. 당신은 곧바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개념적인 사유, 체계의 사유가 추상적인 것이 된다면 경험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당신이 동시에 말한 바에 따르면, 예술에서 우리는 실재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술에 있는 이 실재와의 접촉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요?


반 레트 : 아니, 그 반대가 아닌가요? 베르그손은 그 반대의 말을 합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실재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면 예술이 무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에 함의는, 예술이 우리에게 이 직접적 접촉을 준다는 것이죠.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나타나는 경험의 차원, 하지만 확장된 경험의 차원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러한 경험이 확장되는지. 예술가는 이 확장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가가 기대하는 것과, 옥스포드 강연의 주제인 변화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이러한 질문 말입니다.


반 레트 : 곧장 이 강연의 첫번째 발췌문을 들어보도록 하죠. 


미켈 : 네. 그러시죠.


반 레트 : 「변화의 지각」의 첫번째 날 강연에서 발췌한 발췌문입니다. 우리는 예술가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소개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요. 폴-앙투안 미켈. 조르주 클래스가 읽는 다음의 발췌문을 들어보시죠.


(음악 : Ravel, Miroirs M 43 : Une barque sur l’océan)


조르주 클래스 : 수 세기 전부터 우리가 자연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우리에게 보게 만드는 것을 그 역할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예술가들이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정신 속에서, 즉 우리 안팎에서 우리의 감관과 우리의 지각을 명시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 위대한 화가란 그로부터 나온 사물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 만인의 시각이 되었거나, 만인의 시각이 될 그런 사람들이다. 코로나 터너와 같은 사람들만 생각해보아도, 그들은 자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수많은 측면들을 포착하였다. 그들은 보았던 게 아니라 창조했던 것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상상력의 산물을 우리에게 전달했던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의 발명들을 채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며 우리는 단지 위대한 화가들이 우리에게 묘사해준 이미지를 통해 자연을 보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왜 우리는 어떤 작품들—거장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되다고 말하는가? ... 우리가 터너의 작품이나 코로의 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경탄하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의 일부분을 우리가 이미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각했지만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반짝이고 사라져가는 시각이었으나, 마찬가지로 반짝이고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일군의 시각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 이 일군의 시각들은 상호 간섭을 통해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일상적으로 갖는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시각을 구성한다. 화가는 이 시각을 분리시켜낸 것이다. 그가 이 시각을 화폭 위에 잘 고정시켜 두었기에, 이제 우리는 실재 속에서 화가가 본 것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변화의 지각」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강연, 이 텍스트 속에서 아직 “변화” 개념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지각”이라는 관념이 어떤 관심사를 겨냥하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부분에서, 그러니까 이 강연을 개시하며 베르그손은 개념화가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며, 지각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침내 예술가라는 인물의 이미지, 예술가라는 인물이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를 철학에 결여되어 있는 이 지각을 대면하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폴-앙투안 미켈.


미켈 : 예. 어떤 의미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 지각을 확장시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제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 확장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반 레트 : 지각의 확장 말이지요.


미켈 : 네. 아주 단순한 첫번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해석은 제가 가지고 있던 해석임을 말해두어야겠군요. 제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저는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확장은 화가가 그의 시각을 덧붙인다는 사실이라는 해석이지요. 화가는 그의 시각을 덧붙이고, 그의 시각을 우리에게 제안하고, 그의 시각을 우리와 소통합니다. 우리는 사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화가가 사과에 대해 갖는 시각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건 사과가 아니라, 화가가 사과에 대해 제안한 시각입니다. 그런데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우리가 사태를 단지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이건 주관주의적 전회를 일으킬 것입니다. 사실 베르그손이 바로 이 점을 겨냥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이 인용하는 두 작가, 두 화가는...


반 레트 : 터너와 코로 말이군요.


미켈 : 터너와 코로는 종종 “전-인상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인즉슨, 여기서 이 화가들, 위에서 언급한 터너와 코로가 행한 일이 대상을, 풍경을 그리는 대신, 인상을 그리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요. 이것이 첫번째 해석입니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 텍스트를 단지 이런 식으로만 읽는다면, 확장이 이런 것이라면, 화가가 우리에게 자신의 시각을 전달해주는 것이라면, 제 생각으로는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텍스트의 의미를 완전히 놓쳐버리게 됩니다. 네. 베르그손은 아주 미묘합니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만 읽는다면 베르그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텍스트의 의미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자 베르그손이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바를 잘 보세요.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베르그손은 여러 표지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표지는 이것입니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정신 속에서, 즉 우리 안팎에서 우리의 감관과 우리의 지각을 명시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예술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 안에서, 내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 안에 있는 것과 우리 밖에 있는 것 간의 소통입니다.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아닌 무언가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 단순히 우리의 세계, 자연적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체험된 영역, 의식의 영역에 머무는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미켈 : 베르그손을 의식의 철학자로만 여기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주론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예술가의 몸짓이 지각을 탈주관화 한다는 것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반 레트 : 예술은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구요.


미켈 : 탈주관화랄까... 어쨌든 예술을 통해 안과 밖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반 레트 : 예술가의 안팎이요?


미켈 : 네. 그럼요.


반 레트 : 회화를 보는 사람의 안팎이기도 한가요?


미켈 : 회화를 보는 사람의 안팎이기도 하죠. 정확합니다. 자 보세요. 다른 구절을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제시하는 위대한 화가는 ““자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수많은 측면들을 포착한다.” 그러니까 사실 베르그손은 여기서 논문 전체의 주제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우리가 변화에 대해,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죠. 우리는 지속이 아니라 변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가 뒤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코로와 터너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변화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반 레트 : 무슨 변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켈 : 명시적인 차원에 말이죠. 용해되는 장면dissolving view, 여기에 사물의 운동성이 있습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터너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거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녹아내림입니다. 용해되는 장면은 녹아내림이지요. 사물의 운동성을 보십시오. 사물 속의 운동성을요. 그건 단지 내 안에, 내 시각 안에, 내 체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행입니다. 예술가는 바로 여기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확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옮겨가도록 만드는 일종의 연결부호, 일종의 바톤터치입니다. 그것은 안에서, 그러니까 의식의 체험에 내재적인 지속에서, 우주 전체에 내재적인 지속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다른 말도 합니다. “왜 우리는 어떤 작품들—거장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되다고 말하는가?” 예술이 우리는 진리와 접촉시킨다는 말이지요.


미켈 : 물론입니다. 그건 다른 말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죠. 코로나 쿠르베를 고려해보면, 그들은 또한...


반 레트 : 쿠르베요? 터너가 아니라?


미켈 : 네. 쿠르베. 아니, 아니. 이들 역시 사실주의로의 경향에 놓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르그손은 인상파를 언급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1911년에 인상파는 이미 유명했죠. 왜 베르그손은 인상파를 언급하지 않는 걸까요. 베르그손은 여기서 코로와 터너를 언급합니다. 모네가 아니라요. 인상파는 1890년대부터 이미 유명했지요. 왜 베르그손은 그들을 언급하지 않는 걸까요? 예술에서 진리는 몽상fantaisie이 아닙니다. 예술은 무언가 참된 것을 말해줍니다. 단지 예술가의 상상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이라는 이러한 기능이 있습니다. 소통이라는 기능 배후에는 예술작품이 갖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가 철학자와 동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 베르그손은 예술가에 대한 경시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강연의 다음 부분을 따라가다보면,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 철학자가 바통을 이어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술가는 한편에 치워두게 되죠.


반 레트 : 예술가를 치워두기 전에, 베르그손과 함께 예술가라는 이 인물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철학자에, 그러니까 이 강연의 주제인 “변화의 지각”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는지는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니까요. 


미켈 : 네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렇게 씁니다. “따라서 예술은 지각 능력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조금 전에 설명하셨으니 이 구절은 이해가 가네요.


미켈 : 네네.


반 레트 : “하지만 예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예술가가 언제나 “관념론자”로 여겨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가가 삶의 실증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우리보다 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정신나간 사람distrait”이다. 그렇다면 왜 예술가는 실재로부터 더 떨어져 있음에도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죠. 어떻게 “거리”가...


미켈 : 아주 훌륭한 질문이네요.


반 레트 : 어떻게 “거리”가 우리를 참된 것을 보는 데 더 접근시켜주는 것인가요?


미켈 : 좋은 구절을 참조하셨네요.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예술가가 관념론자라는 말은... 이 말이 구분하는 바는... 음 다른 저작으로 옮겨가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여기서 “지각의 확장”이 “지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1896년의 저작인 『물질과 기억』이 보여주는 바대로의 지각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술가가 관념론자라는 말은 예술가의 역할이 우리를 우리의 필요로부터 떼어내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적 필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적응할 필요 말입니다. 반대로 지각의 기능은 우리를 필요에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지각의 기능 중 하나라고 말해야겠군요. 우리가 지각을 정교히 분석한다면,


반 레트 : 네.


미켈 : 지각은 복합적입니다. 지각은 두 요소를 갖습니다. 하지만 두 요소 중 하나는, 지각이 삶에 대한 주의의 기관으로서의 뇌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각은 필요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죠.  지각은 확장시키는 대신 생략합니다. 지각은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확장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 레트 : 그러면 예술가에게 고유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군요? 지각이 제한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지각을 확장하는 것인가요?


미켈 : 역설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지각 속에서 지각이 수행하는 기능은 단지 생물학적인 기능일 뿐이기 때문이죠. 단지 생물학적인 기능이요. 지각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가 지각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그렇죠?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심지어 짚신벌레조차 필요를 갖습니다. 짚신벌레는 이 필요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지각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갖습니다. 모든 생명체가요! 이걸 위해 뇌를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에서 이 일은 뇌를 통해 일어납니다. 뇌는 긴장의 기관, 행동의 기관 등으로 불릴 수 있죠. 하지만 이 일은 모든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면 예술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예술은 비유적인figurée 방식, 조형적인figurative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어 우리를 실재의 방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방향, 즉 이 생물학적인... 적응의 방향에서 떼어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확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각의 확장을요. 그건 단지 지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 “반 고흐”(1991))


반 고흐 : 머리가 아프네요.


클레망틴 가셰 : 키니네 좀 드릴까요? 슈발리에 부인!


슈발리에 부인 : 네 아가씨.


클레망틴 가셰 : 반 고흐 씨에게 키니네 좀 갖다 주세요.


 


가셰 박사 : 단순한 일을 하는게 어찌나 어려운지요.


슈발리에 부인 : 밖에서 점심을 먹읍시다. 15분쯤 후에 준비될거에요.


반 고흐 : 이것 봐요. 언제나 똑같네요. 뉘넌에서는 어머니와 누이가 내가 일하는 동안 계속해서 나를 방해해서 화가 났었죠. 단지 그 형편없는 네덜란드 식사를 먹으라고 말입니다. 내 누이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땐 내 작업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여자들은 물질적인 것밖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가셰 박사 :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클레망틴 가셰 : 드세요.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그림은 안 그리고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으면 당신 말처럼 죽어버릴 거에요. 


반 고흐 : 포즈를 잡아보세요.


클레망틴 가셰 : 제 생각이 궁금하세요?


반 고흐 : 관심없습니다.


클레망틴 가셰 : 저는 그대로 그린 그림들을 좋아해요. 내 드레스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이 드레스는 너무 무거워요. 마치 납으로 만든 것 같군요. 옷자락이 거의 끌려다니겠어요. 손도요. 제 손을 갈고리 손을 만들어 놓으셨네요. 정말 쓸모없는 일을 하셨어요. 이 색깔은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한 건가요? 당신의 풍경화는 이렇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런거에요 뭐에요?


가셰 박사 : 그림적 변형이야. 클레망틴, 진정하고 입 다물어. 모델은 그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 없어.


클레망틴 가셰 : 명언 나오셨네요!


가셰 박사 : 놀라워. 놀랍다고 말해야겠네요. 이 끊긴 연보라색 하며, 이 리듬, 이 바탕, 이 손들, 드레스의 이 소용돌이들...


클레망틴 가셰 : 그거 1톤은 돼 보이는데!


가셰 박사 : 파도와도 같은...



클레망틴 가셰 : 저는 이 연보라색이 싫어요. 저는 연보라색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걸요. 벽도 하나도 안 닮았어요. 물론 제가 여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보라색 배경 위에 있는 보라색 뚱보가 나란 말이에요?


(음악 : Gabriel Fauré, Ballade en Fa dièse maj op 19)


반 레트 :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생은 우리가 눈가리개를 쓰기를, 우리가 오른쪽도, 왼쪽도, 뒤쪽도 아니라 우리가 걸어갈 방향인 앞쪽만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요소들의 점진적인 연합을 통해 구성되기는 커녕 갑작스러운 분리의 결과이다. 우리는 광대한 잠재적 인식의 장 속에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들여 현실적 인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머지 것들을 무시해버렸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을 듣고 계십니다. 10시 22분입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텍스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가르니에 플라마리옹 판 『사유와 운동』을 펴낸 철학자 폴-앙투안 미켈과 함께 「변화의 지각」이라는 제목을 가진 강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폴-앙투안 미켈. 우리는 조금 전에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 “반 고흐”에서 뽑아낸 장면을 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먼저 예술가의 삶과 일반적인 삶, 매일매일의 삶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상적인 삶은 예술가의 삶에 끼어들지만, 말하자면 예술가가 창조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성과는 다른 시간성을 갖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이 장면은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그림적 변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줍니다. 포즈를 잡은 모델은 반 고흐에게 “당신이 그린 것은 지각된 것과 완전히 다르고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후에 제가 읽은 이 강연의 몇몇 구절들은 이 지각상의 차이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그리고 이 구절이 아주 뛰어납니다. “생은 우리가 눈가리개를 쓰기를, 우리가 오른쪽도, 왼쪽도, 뒤쪽도 아니라 우리가 걸어갈 방향인 앞쪽만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이게 바로 예술가의 지각과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로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읽었던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주셨으면 하네요. 왜냐하면 곧 보게 되시겠지만...


반 레트 : 알겠습니다. “교수님”.


미켈 : 다음 문장에서 베르그손은 인식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으니까요.


반 레트 : 아, 뒷부분을 더 읽으라고요?


미켈 : 네.


반 레트 :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요소들의 점진적인 연합을 통해 구성되기는 커녕 갑작스러운 분리의 결과이다. 우리는 광대한 잠재적 인식의 장 속에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들여 현실적 인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머지 것들을 무시해버렸다.” 더 읽을까요? 이 다음 부분을 말씀하셨던 건가요?


미켈 : 아니오, 아니오.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에 대한 또 하나의 상투적 표현tarte à la crème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봐라. 인식은, 따라서 과학은 대상에 대해 상대적인 시각밖에 가질 수 없다. 절대에 접근하는 것은 예술가와 철학자다.” 이 입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 또한 상투적 표현들 중 하나고, 베르그손의 사유에 대한 가장 진부한 클리셰입니다.


반 레트 : “또한”이요? 상투적 표현들이 많이 있나요?


미켈 : 조금 전에 보셨다시피, 예술이 주관적 인상이라는 것이 있지요. 이번 것은 인식이 상징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똑같습니다. 베르그손이 이런 말을 하는 텍스트들이 있지요. 물론입니다. 예컨대 마찬가지로 『사유와 운동』에 실려있는 1903년의 강연[역주 : 「형이상학 입문」]의 경우, 아마도 이 방송에서 누군가를 초청해서 이 강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이 강연에서 베르그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실 수 있겠죠. 1903년에 베르그손은 “과학은 대상 주변을 돌 뿐이고, 결코 대상 속으로는 진입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베르그손이 그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해도, 『사유와 운동』에 실린 첫번째 강연의 앞부분에서는 반대로 과학이 정확하다고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과학이 정확한 것이라면, 과학이 대상 주위를 돌 뿐이고 대상 속으로는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혀 설명할 수 없어요. 사실, 본질적인 방향은 이와는 반대로, 인식에, 과학에 실재에 “접촉하는” 차원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심지어 지각에도 이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지각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각에 이미 실재의 차원에 접촉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실 과학에는 이미 “확장”의 한 형태의 존재합니다. 단지 과학에 존재하는 확장의 형태는 예술의 확장과 동일한 본성을 갖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지금 설명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반 레트 :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왜냐하면 이번에는 제가 몇줄 뒤를 읽어본다면, 베르그손이 실제로 과학적 기획에 속하는 것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뇌는 이러한 선별의 작업을 목적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기억의 작업을 가지고 이 점을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음 강연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과거는 필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보존된다. 과거는 전적으로 존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적 관심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그 말인 즉슨, 뇌 자체가 그 구성 방식으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떨어짐, 이러한 선별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말이고, 뇌가 행동을 위해 본질적인 것만을 보존한다는 말이죠.


미켈 :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지각에 대해서도 그 말은 참이면서 거짓입니다. 베르그손이 쓴 구절을 하나 읽고 싶군요. 허락하신다면요. 이 구절은 『물질과 기억』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뽑아낸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 레트 : 그 책은 1896년에 쓰인 것이죠.


미켈 : 1896년 맞습니다.


반 레트 : 훨씬 전에요.


미켈 : 맞습니다. 하지만 『사유와 운동』에서도 재발견되는 내용입니다. 두번째 강연을 읽으시면 정확히 같은 내용을 보게 되실 겁니다. 『창조적 진화』에도 나오는 내용이고요. “따라서 오히려 형이상학적 질서에 속하는 이 두번째 결론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순수 지각 속에서 진실로 우리 밖에 위치하며, 직접적 직관 속에서 대상의 실재성을 접촉한다.” 우리는 우리 밖에 위치하고, 직접적 직관 속에서 대상의 실재성을 접촉합니다. 순수 지각 속에도 직관이 있습니다.


반 레트 : 누구의 지각인가요? 지각 일반인가요?


미켈 : 베르그손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만을 참조한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통상적으로는 내가 내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의식의 체험들을 다시 발견할 때에 철학에서 직관의 차원에 가닿게 되지요. 여기서는 내가 나 자신의 밖에 위치함으로써 직관의 차원에 가닿게 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요. 지각 속에는 단지 유기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지각 속에 이미 형이상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속에도 단순히 상징적이고 상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차원, 형이상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이 형이상학적 차원이란 무엇인가요?


미켈 : 곧장 설명해드리죠.


반 레트 : 설명해주세요.


미켈 : 그 말은 우리가 실재를 접촉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지각은 두 측면을 갖습니다. 첫번째 측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아주 어려움을 겪는 측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측면이 없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요. [베르그손에게는] 반사réflexion 이론이 존재합니다. 지각은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킵니다. 지각은 사물이 우리 위에서 반사된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지각에서 우리는 완전히 탈인격화됩니다. 지각은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킵니다. 그것은 사물이 우리 안에서 반사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지각에는 두번째 차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차원은 처음부터 서로 교차되는 것인데요. 이 두번째 차원은... 이 사물이 우리 안에 반사될 때, 우리 안에는 무언가가, 유기적인, 생물학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건 뇌입니다. 뇌는 긴장의 기관이죠. 뇌는 추려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반사되는 이 사물들을 추려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이 생물학적 기능입니다. 당신의 말은 이 점에서 옳습니다. 생물학적 기능이 있습니다.


반 레트 : 아니요. 제가 해석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미켈 : 하지만 거기에 더해, 지각 속에는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차원도 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보는 상황을 보시면 베르그손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곧장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저는 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압니다. 이 정도로 식은 죽 먹기입니다.


반 레트 : 음. 많은 철학자들이 그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텐데요.


미켈 : 잠시만요. 우선 설명을 끝낼 수 있게 해주세요. 그 후엔 하고싶은 말씀을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저는 제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물론 당신이죠. 제가 당신이 거기에 있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을 알게 된다면, 저는 제 감각으로 향하게 됩니다. 저는 제 자신으로 되돌아갑니다. 제가 가진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으로요.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을 참조한다면, 저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다시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는 거지요. 결국 저는 당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실재적인, 구체적인 증거도 갖지 못합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하지만, 지각 속에서는 저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압니다. 이 직관은 무엇일까요? 이건 특별한 직관입니다. 이 직관은 나로 하여금... 이건 차후에 메를로-퐁티가 이어받을 지각의 역설인데요, 저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저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을 제 자신으로부터 나옵니다. 당신이 아니라요. 이 직관은 대체... 사실을 말하자면, 지각 속에는 나로부터 온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온 것들도 있습니다. 나와 자연의 관계로부터요. 지각이 전해주는 형이상학적 메시지는... 음 이건 처음부터 지각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인데, 그 메시지는 이러한 것입니다. “나는 단지 내 세계, 사유의 체험된 세계, 의식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세계가 아닌 세계 속에도 존재한다.”


반 레트 : 두 세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군요.


미켈 :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재성의 이중화입니다.


반 레트 : 뭐라구요?


미켈 : 내재성의 이중화요. 나는 내 안에 있는 동시에,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부로부터 나 자신이 체험한 지속을 느끼기에 내 안에 있는 동시에 지각을 통해 내 밖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인 즉슨,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전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여하는 전체는 내가 아닙니다. 과학의 메시지는 내가 참여하되 나 자신은 아닌 이 전체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화의 메시지입니다. 그건 단지 상징적이고 인위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건 형이상학적 메시지입니다. 그건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은 당신이 아닌 우주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죠. 이게 그 메시지입니다. 이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점은, 왜 과학은 예술이 아닌지, 그리고 왜 예술은 과학이 아닌지입니다.


반 레트 : 조금 뒤에 이야기해주시죠. 먼저 베르그손에게 발언권을 넘겨보도록 할까요. 배우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를 통해서요. 베르그손의 이 구절은 청취자 여러분들 가운데 가장 회의적인 분들도 전향convertir시켜 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를 구성하는 내적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외적인 세계에도 참여하는 이중적 내재성이 존재하는가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이 이중적 내재성을 향하도록 우리를 동요시키는 경험이 존재합니다. 베르그손은 이 경험을 “급작스런 주의의 전향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들어보시죠.


클래스 : 충분히 강하고 실천적 관심에서 충분히 떨어져 나온 생에 대한 주의는 불가분적 현재 속에 의식적 인격의 지나간 역사 전체를—순간적인 것이나 동시적 부분들의 총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연속적인 현재로—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분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멜로디, 단어의 의미를 확장해 말한다면 끝에서 끝까지 하나의 영속적인 현재를 구성하는 멜로디이다. … 예외적인 경우에 주의가 갑작스럽게 생에 대해 기울이던 관심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러면 그 즉시 마법처럼 과거는 현재가 된다. 예기치 못하게 목전에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등산가, 물에 빠진 사람, 목 매달린 사람에게는 일종의 급작스런 주의의 전향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의식의 방향전환 같은 것이 생겨나, 그때까지는 미래를 향해 돌아서서 행동의 필요성에 빠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그것들에 무관심해진다. “망각되어 있던” 수천의 세부사항들이 다시 상기되어 그 사람의 역사 전체가 움직이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음악 : Debussy, Rêverie L68)


반 레트 : 10시 30분 프랑스 문화방송입니다. 드뷔시의 “꿈”을 듣고 계십니다. 이 곡은 베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습니다. “불가분한 것으로 지각되어, 한편에서 다른 편 끝까지, 이 말의 의미를 확장시킨다면, 영속적 현재를 구성하는 멜로디.” 이 구절은 「변화의 지각」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번주 내내 다루는 『사유와 운동』에 실린 강연 말이죠. 우리가 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폴-앙투안 미켈이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결국 우리를 영속적 현재에 대면케 하는 이 “멜로디”라는 관념을 통해 변화라는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변화의 관념은 이 강연에 등장하는... 이 강연의 목표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시죠.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 다른 것, 즉 멜로디 자체에 결부된 영속적인 현재에 접근케 만드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등산가나 물에 빠진 사람, 목 매달린 사람의 이러한 “관심의 전향.” 이것이 어떻게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가요?


미켈 : 음.. 직접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건 아닙니다. 우선 저는 이 문제에 돌입하기에 앞서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로 되돌아가고 싶네요. 과학자와 예술가의 차이가 무엇인지의 문제 말입니다. 우리는 두 인물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과학자가 있고, 예술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과학자를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과학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프랑스 철학 문화의 한 부분은 이 점에서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이 부분은 과학에 문의하지 않고서 철학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크나큰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죠. 그럼 결여된 것은... 음 여기에 응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간략히 말하면, 그렇다면 과학적 관점에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요? 과학의 “설명적” 관점에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요? 이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예술의 “표현적” 차원을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대한 사유, 변화에 대한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음 베르그손은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당신이 과학자의 작업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본다면, 과학자는 우주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이건 이미 엄청난 일입니다. 과학자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우리의 껍질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점이 과학자의 위대한 성공입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와 관련된 것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와 관련된 것 이상을 이야기하죠. 과학자는 우리가 우리보다 큰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 우리에 관련된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우리보다 더 중요한 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요. 그건 바로 우주입니다. 결국 우리는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이 우주 속에서 더이상 대수로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우주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는 변화를 “분석”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서요. 과학자는 움직이는 것을 분석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서요. 즉, 등식에 도달하기 위해, 구조를, 이론적 체계를 끌어내기 위해... 음 이 점으로 상세하게 들어가지는 맙시다. 오늘 방송의 목적은 이런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 과학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해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이 방법의 배후에 위치한 철학적 입장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 입장은 “존재”에 가치를 두려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음 그런데 여기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폴-앙투안 미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미켈 : 예컨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한 행성을 생각해봅시다. 이 행성은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아킬레스의 화살은 어떤가요. 이것도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당신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을 생각할 때, 당신은 이 운동을 “운동의 구조”를 통해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조는 완전히 영원한 것이죠. 운동의 구조는 행성의 운동 배후에 존재할 대칭성을 보여주는 어떤 등식, 어떤 공식을 통해 주어집니다. 이 대칭성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겠죠. 이것이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고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움직이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움직이는 것은 불가피하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설명해야 할 “현상”이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재”의 층위로 옮겨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여기서 “실재”의 층위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겠죠. 따라서 과학자들의 논리 속에 위치했을 때에는, 생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생성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요. 예술가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변화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철학자와 가까운 입장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죠. 베르그손의 사유를 통틀어 문제시되는 철학은 서양적 사유 속에서는 아주 이상야릇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성의 철학입니다. 존재의 철학이 아니라요.


반 레트 : 그럼 변화가 실재 속에서 가장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미켈 : 당연하죠. 


반 레트 : 아주 역설적이군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미켈 : 비록 진정으로 논의를 거친 뒤에는 실체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반 레트 : 네. 베르그손은 변화가 실체적이라고 이야기하죠. 베르그손은 존재를 변화로 대체하려 하는 것인가요?


미켈 : 맞습니다. 베르그손은 전통 형이상학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죠. 이 위계는 과학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spontanément 작동하고 있습니다. 고전 과학 속에는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 형이상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할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이 위계를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위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도울 인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그를 돕는 이 인물이 바로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는 사물 안의 변화를 봅니다. 우리 안의 변화를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 안의 변화를 봅니다. 당신이 반 고흐를 언급하셔서 말인데요. 잘 보십시오. 그는 드레스에서 뭘 보았지요? 그는 소용돌이들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 소용돌이들은 무엇인가요? 그건 흐름들입니다. 그것은 그가 보는 것, 그리고 자연을 전달해줍니다. 그것은 반 고흐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폭력을 전달해줍니다. 그것은 정신의 폭력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폭력이기도 합니다. 이 두 폭력은 이 우주적인 표현성expressivité을 전달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가 보는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변화의 지각」을 구성하는 두 강연을 읽는다면, 베르그손이 예술가라는 인물의 예를 들고 과학자라는 인물을 언급한 뒤에는 어쨌건 철학자에 다다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철학은 예술이나 과학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다는 말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철학자는 말과 화해하고 개념적 도식을 재발견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조금 전에 개념을 평가절하했지만, 개념에 조금의 가치를 되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제 첫 저작의 제목이 그러한 것이긴 하지만[역주 : 미켈은 『베르그손, 형이상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철학자는 상상력을 가진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사유는 또한 개념들을 통해 표현되는 사유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부터 종종 직관이 지성 위에 올라타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직관에는 변증법적 차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창조적 진화』에서요. 그렇습니다. 이건 전통적인 의미의 개념은 아닙니다. “일반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건 개념적 도식입니다. 철학적 개념에는 언제나 개념과 이미지 사이의 연관이 존재합니다. 지속이나 생의 약동 같은 개념을 보세요. 언제나 이런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유할 수단을 제공합니다. 베르그손에서 한 철학적 개념의 의미는 결코 명시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자는 이 의미를 붙잡게 되겠죠. 철학자는 결국 실재에 대한 하나의 시각vision을 도출해 줄 것이니까요. 화가는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주시함으로써 이 시각을 형상화할 뿐입니다. 화가는 변화에 속하는 무언가를 형상화하여 표현하겠죠. 하지만 철학자는 실재에 대한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철학자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임을 말해줄 것입니다. 이것이 실재에 대한 하나의 시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이죠. 


반 레트 : “우리의 지각 속에서 얼어붙어 불변하던 것들이 다시 데워져 운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우리 주위에서 생기를 얻고,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거대한 약동이 존재와 사물을 실어간다. 우리는 이 약동이 우리를 고무시키고, 끌어당기며, 지탱함을 느낀다.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되고, 이러한 생의 증대가 그와 함께 중대한 철학적 수수께끼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제기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이 수수께끼들은 실재에 대한 응고된 시각이 낳은 것으로, 우리의 생명성의 인위적 약화를 사유의 용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사물들을 지속의 상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 사유하고 지각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적 지속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실재적 지속 속으로 파고들어 갈수록, 우리는 원리의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이 원리는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의 영원성은 불변하는 영원성이 아니라 생의 영원성임에 틀림없다.” 「변화의 지각」에 대한 이 강연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폴-앙투안 미켈. 이 강연의 목적은, 목적이란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우리 주위에서 생기를 얻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이 변화, 이 생성이 우리가 대면한 것이 되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이 논의의 결정적인 지점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베르그손이 스피노자의 공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알아채셨을 겁니다. 스피노자의 공식을 이어받아 그것을 변형시키지요. 그것은 “지속의 상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가 됩니다[역주 :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 아래서sub specie æternitatis”라고 말한다].


반 레트 : 그렇죠.


미켈 : 즉 지속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이 지속이 우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이 우리가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이 강연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이상 단지 의식의 체험된 지속을 분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내재적 지속에 빠져들 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죠. 이 이행이 양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요. 우리는 이 방향으로 아주 조금 나아갔을 뿐입니다.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실재에 대한 시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이러한 생성의 형이상학을 정당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단지 암시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반 레트 : 네.


미켈 : 예술가는 변화를 보여주고, 과학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암시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합니다. 변화를 구성해야 합니다. 개념적 도식을 거쳐 구성된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 점을 다룰 수 없겠네요. 「변화의 지각」은 이 점을 다루는 텍스트는 아닙니다. 이 점은 『물질과 기억』에서, 『창조적 진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그 텍스트들은 「변화의 지각」보다 먼저 쓰인 것들이죠.


미켈 : 그렇습니다. 예컨대 “두 질서”에 관한 이론이 그러합니다. 이건 이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본질적인 지점입니다. 두 질서에 관한 이론 말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저는 실재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특정 관점에 위치한다면 실재는 정신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관점이 존재합니다. 위의 관점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 관점은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실재는 물질이다.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의 이러한 영속적인 미끄러짐이 존재하기에, 무엇이 실재인지 분석할 경우 결코 단순히 어느 한 관점에 정지할 수 없게 됩니다. 관점의 복수성을 포괄해야 합니다. 이 관점의 복수성에서 생성의 형이상학[역주 : 미켈은 생성의 수학이라고 말했으나,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이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실재에 대하여 한번에 전부 정의할 수 있는 정지된 실체성의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이론은 베르그손이 그의 생성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도구들도 있지요. 『물질과 기억』에는 다른 도구들도 있습니다..


반 레트 : 어쨌건 제가 조금 전에 읽은 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 작업의 존재 의미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된다.” 베르그손은 단지 이론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예술가와 과학자의 경우를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를 철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다다라야 하는 생의 역량과 같은 것이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겠죠. 그가 우리에게 권유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이건 실천적인 문제로군요.


미켈 : 잘 이야기하셨군요. 저는 극동 지역에 자주 갑니다. 극동 지역. 그러니까 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갈 일이 많습니다. 제가...


반 레트 : 일본에서는 베르그손이 많이 연구되지요.


미켈 : 프랑스 철학이나 베르그손 철학을 한국인들, 일본인들, 중국인들과 함께 논의할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동원하여 생성의 사유와 생의 사유 간의 연관을 알아챕니다. 이 연관은 거의 직접적인 것입니다. 이 점도 오늘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일입니다. 사태의 질서를 역전시킨다면, 밑바닥에 있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고 말한다면, 실재에 대한 “생기론적” 접근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원리와 같은 것은 없고...


반 레트 : 하지만 베르그손이 이러한 사유를 발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시겠지요. 생성으로 존재를 대체하는 이러한 사유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입니다. 그렇게까지 새로운 건 아니죠.


미켈 : 네. 헤라클레이토스와 함께 노자를 인용할 수도 있겠죠. 당신도 아시다시피요.


반 레트 : 그러니까요. 수많은 길이 있겠죠. 베르그손이 이 사유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미켈 : 네 베르그손이 발명한 것은 아니죠.


반 레트 : 그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미켈 : 하지만 서양에는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서양은 다소 이 전통에 대립하여 세워졌지요. 이러한 사실이 베르그손의 작업의 가치와 특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음악 : Ella Fitzgerald, You've changed)


반 레트 :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릅니다. “당신은 변했군요.” 하지만 베르그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변화, 즉 생성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이해하게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폴-앙투안 미켈, 오늘 베르그손에 대해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켈 : 제가 감사합니다.


반 레트 : 다시 한번 당신이 가르니에-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출간한 『사유와 운동』의 판본을 언급해두려 합니다. 피에르 몽테벨로와 세바스티앙 미라베트의 해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키메 출판사에서 나온 당신의 책 『과학에 비추어 본 베르그손』도요.


미켈 : 감사합니다.


반 레트 : 10시 48분 프랑스 문화방송입니다. 제랄딘 모스나-사부아의 “2분의 광고”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제랄딘.


제랄딘 모스나-사부아 : 안녕하세요 아델.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 레트 : 오늘 당신의 주의를 끈 책을 살펴보니, 베르그손에 관련된 책이네요. 제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스나-사부아 : 정확합니다.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주의 좋은 끝맺음인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에 관련된 이 책은 리오넬 아스테지아노의 책입니다. 이 책은 베르그손의 첫 저작인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에서부터 그의 마지막 저작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물론 그의 강의까지, 베르그손의 전 저작을 다루면서, 베르그손을 다른 철학자에 접근시키려는 대담한 기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철학자도 아니고, 여러분이 오늘 이 다른 철학자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셨는데요. 이 철학자는 스피노자입니다.


반 레트 : 네.


모스나-사부아 :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로 하나의 대담한 기획인데요. 이 양자를 접근시키는 것은 단지 두 거장 철학자를 접근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 서로 극도로 다른 두 철학자를 접근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에티카』의 체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철학자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지속, 자유를 통해 모든 독단론에 대립하는 철학자가 있는 것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들뢰즈 - 1981년 2월 3일 스피노자 강의 8)


질 들뢰즈 : 환희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신체에 맞는 어떤 신체와의 만남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것입니다. … 따라서 나는 내 신체에 맞는 이 신체를 사랑합니다. 증오가 슬픔에서 나오듯, 사랑은 환희에서 나옵니다.


모스나-사부아 : 극도로 다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해서만큼이나 스피노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제삼의 철학자가 있으니까요. 그건 질 들뢰즈입니다. 조금 전에 이 주제, “환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질 들뢰즈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번주 동안 이 주제를 환기시켜 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이 저작 속에서도 이 주제가 발견됩니다. 두 철학자를 인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환희는 환희에 속한 것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가”라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죠.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환희는 자유의 감정을 일으킬 뿐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저작의 2부는 이 질문에 답변하는 매혹적인 페이지들을 제시하는데요. 스피노자의 환희와 슬픔 사이의 구분, 베르그손의 감동과 정감 사이의 구분, 그 존재 속에 코나투스와 생의 약동을 보전하는 사태. 마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서로에게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 양자가 환희가 왜 실재의 회피가 아니라, 반대로 더 고양된 실재를 볼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반 레트 : 멋진 기획이군요. 꼭 읽어야겠네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에서 환희와 자유』.


모스나-사부아 : 네 멋진 제목이죠. 리오넬 아스테지아노의 책이고요, CNRS 출판사입니다.


반 레트 : 감사합니다 제랄딘. 감사합니다 여러분. 철학의 길이 끝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앙리 베르그손의 『사유와 운동』 시리즈가 이렇게 막을 내리네요. 내일은 “금요 철학의 길”로 돌아올 것입니다. 내일도 베르그손주의자와 함께 하네요! 철학자 까미유 리끼에가 이번에는 페기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페기의 철학, 어떤 바보에 대한 기억』. 내일 10시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생방송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이 방송을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시리즈 방송도요. 프랑스 문화방송 사이트의 철학의 길 페이지에서 방송 다시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에서 다운받아 원하실 때 원하시는 곳에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랄딘 무스나-사부아의 2분 광고도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주 제작을 맡은 니꼴라 베르제, 베르그손에게 목소리를 빌려준 조르주 클래스, 오늘 음악을 맡은 엘리즈 르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철학의 길 팀, 마리안 샤소르, 리비아 가리그, 앙뚜안 라봉, 니꼴라 브클루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여러분의 댓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학의 길은 『철학』지의 파트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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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3/4)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철학의 길 (2017년 6월 21일)


아델 반 레트 :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덥네요. 정말 덥습니다. 무기력, 녹아내림, 불쾌... 당신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사유와 운동』에서 베르그손이 전해주는 성찰들에 잠겨들기에 완벽한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베르그손은 우리가 사유와 다시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성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지성은 실재를 재단하여 실재와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사유와 접촉하는 것은 직관의 단순성을 통한 것입니다. 우리를 넌지시 앙리 베르그손에게로 데려다 줄 상쾌한 장미빛 마티니와 함께 이 프로그램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음악 : Pink Martini, Sympathique)


반 레트 : 그래도 조금은 일travail을 해 볼까요. 이건 오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르그손의 직관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직관은 어떤 작업travail의 결과물이지요. 안녕하세요, 다비드 라푸자드.


다비드 라푸자드 : 안녕하세요.


반 레트 : 당신은 파리 1 팡테옹-소르본 대학의 부교수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베르그손에 대한 책,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오늘의 주제와] 핑크 마티니와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이 노래 “공감적sympathique”입니다. 그들은, 아니 그녀들은 공감적인 것이 환상적인 일이라고 노래합니다. 베르그손에게 “공감”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희”나 “생의 약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공감도 베르그손이 중시하는 개념이죠.


라푸자드 : 네 공감도 아주 중시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방법으로서 중시됩니다. 즉 공감은... 공감은 베르그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직관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직관이 공감의 한 형태라고 말하곤 하지요. 따라서 양자가 동의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양자는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을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세계와 직관적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는 이 정의는 끊임없이 되돌아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면, 무엇에 대한 직관이 가능한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르그손은 공감을 개입시킵니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공감이, 아니 직관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접촉, 즉 세계와의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다른 사물과 관계맺게 해주는 것은 공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공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공감은 자기 자신의 운동과는 다른 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무언가의 내부로 들어가는 사태입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지성은 존재하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면서 그 사물들을 분석하고, 재단하고, 명명하고, 하나의 체계로 조직하는 반면, 공감은 말하자면 사물들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거의 엄밀함을 결여한 것처럼, 일종의 시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엄밀한 무언가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밖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 안에 반향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비를 통해서요. 따라서 나는 밖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스스로 묘사하고, 그 운동을 마치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스스로 일으킵니다. 따라서 타자, 타자적인 무언가, 음 뭐라고 할까요, 그건 춤의 운동일 수도 있고,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임의의 운동일 수도 있는데, 여하간 나는 그 운동을 내 안에서 재생하고, 그것을 재생함으로써 거기에 직관적으로 접근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닌 거군요?


라푸자드 :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하나의 인식 방식입니다. 공감이 사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운동에 접근하게 하는 한, 공감은 하나의 인식 방식에 대한 묘사입니다. 따라서 공감은 “공감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반 레트 : “함께 느낀다”는 거군요.


라푸자드 : 정확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말의 어원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함께 느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에게서 분명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모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운동시키는 것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거의...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공감은 운동의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맞습니다. 그 점을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운동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번주에 『사유와 운동』이라는 텍스트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봅시다. 이 책은 191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다양한 강연들과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니, 1911년이군요.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텍스트, 베르그손이 이 저작의 네 번째에 위치시킨 강연은 1911년 4월 10일 볼로뉴에서 열린 세계철학회에서 행해진 강연이니까요. 이 글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입니다.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직관이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의 작업의 관심은 우리가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항상 개념들은 아니라는 점을, 또한 어쨌건 개념이 반드시 지성의 사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 속에서, 25페이지 가량 되는 이 짧은 텍스트의 끝부분에서 공감이라는 이 개념을 발견합니다. 이 개념은 정확히 베르그손이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정박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죠. 당신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우리를 우리 밖으로 이끌어가고, 우리가 밖에서 목격하는 것을 우리 안에서 재생하게 만드는 이런 종류의 약동을 통해 우리와 세계 사이에 수립된 연결고리와 같은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라푸자드 : 바로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은 최근에 뇌 연구 분야에서 행해진 발견에 아주 매혹되었을 것 같습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된 발견 말입니다. 이 뉴런은 밖에서 행해진 것으로 지각된 운동을 재생하는 뉴런입니다. 마치 그것이 실제 세계 속에서 유효하게, 즉 현행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잠재적으로 재생하는 듯 말입니다. 예컨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사람은 아이에게 숟가락을 기울이면서 아이와 동시에 입을 열지요.


반 레트 : 모방mimétisme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모방의 한 형태와도 같은 것이죠. 하지만 더 심층적으로,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에 대해pour soi 재생하는 사태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에 대해”라는 말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관건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세계에 밀착시키고, 세계에 다시 매어주는 이러한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르그손은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정신은 자기 자신의 바탕에서 다른 것들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은 그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 다른 것들을 발견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네.


반 레트 : 우리에 관한 무언가를요.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공감은 우리 안에서 타자성의 한 형태를 밝혀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타자성은 사실 가장 내밀하게 구성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손은 직관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이면서도 여기서 관계를 맺는 자기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당신이 공감에 대해 정의한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무엇인지 정의해야겠군요. 다비드 라푸자드.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읽을 텍스트, 「철학적 직관」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들어보시죠. 이 구절에서 우리는“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는 베르그손의 주장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발췌문에서 베르그손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합니다. 당신이 조금 전에 든 “거울 뉴런”의 사례는 베르그손이 과학적 연구의 영역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베르그손이 쓴 그의 모든 작업들은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굉장히 많이 참조하고 정리해 두었지요. 단지 그의 사유는 변하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를 구분해둡니다. 자 들어보시죠.


조르주 클래스 : 과학은 행동의 보조이다. 그리고 행동은 결과를 겨냥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성은 원하는 특정한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특정한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과학적 지성은 사물들의 하나의 배치에서 하나의 재배치로, 하나의 동시성에서 다른 동시성으로 나아간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시한다. 혹은, 그것이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 간극 속에서 다른 배치들을, 그러니까 여전히 동시성들을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을 가지고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속으로 진입하여, 운동을 뒤따르며, 사물들의 생 자체인 생성을 채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후자의 임무는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운동에 대해 부동의 시각만을 취하여 반복하지 않는 것을 따라 반복들만을 모아들이면서 실재를 편의에 따라 잇따르는 평면들로 분할하여 인간의 행동에 종속시키는 데 전념하는 과학자는 자연을 기만하고 자연에 대해 불신과 싸움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반면 철학자는 자연을 동료로 여긴다. 과학의 준칙은 베이컨이 제시했던 것이다. 지배하기 위해 복종하라. 철학자는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공감을 추구한다.


(음악 : Bill Evans, Here's that rainy day)


반 레트 :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로 베르그손의 글을 들으셨습니다.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입니다. 10시 12분 1934년 출간된 베르그손의 텍스트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는 다양한 강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은 그 중 4번째 강연인 「철학적 직관」을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읽고 있습니다. 한편에 과학을, 다른 한편에 철학을 대립시키는 이 글은 아주 명료하네요. 조금 과하기까지 합니다. 베르그손의 작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흑백논리로 이해할지도 모릅니다. 과학은 거의... 음 나쁜 과학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반면, 반대로 철학은 직관의 편에 선다는 식으로요. 어떻게 하면 베르그손을 더 잘 이해하고, 이 점에 대한 오해를 완화시킬 수 있을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먼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의 모든 저작들이 과학을 아주 많이 참조한다는 점이지요. 그 말은 곧... 음, 우리가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을 편다면, 이건 베르그손의 첫 번째 저작인데요, 거기에는 정신생리학과 관련된 문제가 많습니다. 베르그손의 두 번째 책인 『물질과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어증이나 뇌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많지요. 『창조적 진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데요. 그 이유는 베르그손이 라마르크주의나 다윈주의의 가설들, 세포생물학의 연구들과 논쟁을 벌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과학에 대항하여 작업하기보다는 과학과 더불어 작업한다고 말이지요. 단지 베르그손은 과학의 풍부함과 풍요로움이 균등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베르그손은 자신의 작업을 전진시키기 위해 과학에 관심을 쏟지만, 과학에 하나의 한계를 할당합니다. 과학이 모든 영역에서 아무리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이 한계는 과학에 내적인 것입니다. 이 한계는 바로 지성입니다. 과학의 한계는...


반 레트 : 역설적으로 한계지어지는군요.


라푸자드 : 역설적으로. 네 맞습니다. 과학은 과학을 전진시키는 것에 의해 한계지어져 있습니다. 지성은 재조합가능하고, 분석가능하고, 재단 가능한 견고한 요소들 위에서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들은 체계들로 배치될 수 있어야 하고, 방정식들로 정돈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처럼, 물론 베르그손은 때로 그의 사유에 미묘한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지성은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의 재조합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지성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음 저는 이 한계가 인간 종의 구성적 한계라고 말하고 싶군요. 베르그손이 보기에 인간 종을 다른 동물 종들과 구분하여 특징짓는 것은 인간의 지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인 필요에 포함된 지성은 정신 속의 거의 전 영역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간 정신에 가장자리가 존재합니다. 바로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죠. 일종의 모호하지만 극도로 비옥한 이 영역이 바로 직관입니다.


반 레트 : 이 말은 곧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지성이 일종의 계산 능력이나 논리 능력으로 환원된다는 말인가요?


라푸자드 :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성은 또한 실천적이기도 합니다. 지성은 우리에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지요. 지성은 세계에 대해 행동할 수 있게 해주고, 세계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 세계를 재단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 레트 : 지성은 공간적인 것이군요. 재단한다는 것은 공간의 편에 있는 것이니까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시간을 공간이 아니라 지속의 편에서 사유하려 하지요.


라푸자드 : 물론입니다. 네, 지성은 공간적입니다. 맞습니다. 심지어 지성의 모든 생산물을 공간의 관념이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거기에는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이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은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의 기저에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바로 그 점입니다. 이미지들을 포함하여, 공간은 과학 영역에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표상하는 즉시, 우리는 사실 이 표상을 공간화하게 됩니다.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우리는 직관을 통해 접근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에 속하는 것은 전혀 공간적이지 않죠.


라푸자드 : 맞습니다. 지성은 본성상 표상적입니다. 그리고 직관은...


반 레트 : 직관도 정신 속에 위치해 있지요?


라푸자드 : 직관은 정신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직관이 전제하는 바는... 베르그손의 말처럼... 음 이것은 베르그손의 가장 유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인데요, “철학은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인간적 조건을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적 조건을 구성하는 지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해방된다는 말은 지성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컨대 지성을 일종의 관념에, 직관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직관은 모호하고, 비규정적이고, 불명료한 것이지만,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는,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예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 잠재성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들과 많은 작업이 필요합니다.


반 레트 : 벌써부터 직관을 정의하려 시도해야 하겠군요. 직관에 대한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정의를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장켈레비치 아카이브, 직관이란 무엇인가 (source :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 13/05/1967))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 직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가장 가까이서 사유하는 일종의 곡예의 기술입니다. 거의 사물 안에 들어갈 정도로, 사물 안에 들어가 있기에 더 이상 그것을 사유하지 않을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죠. 당신이 너무 멀리에 있다고 해보죠. 거리두기와 물러섬, 과도한 의식이 그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경우 당신은 진상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쪽에 위치한다면, 당신은 진리를 모든 면에서 알게 되지만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합니다. 이는 불꽃 주변의 불나방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방이 불꽃에서 멀리 떨어진다면 나방은 불꽃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 이미지는 차갑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죠. 나방이 불꽃 안에 위치한다면 나방은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불꽃에 대한 직관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고, 불꽃을 스쳐 지나가며, 불꽃과 접하는 곡예적인 기술입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그 불꽃에 의해 불타버리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진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어떤 번개같은 순간에, 진리는 우리 시각의 대상이 됩니다. 직관의 대상 말입니다. 직관 속에서 당신은 진리를 사는 동시에 진리를 사유하게 됩니다. 당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알게 되지요.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이 “행동인으로서 사유하고 사유인으로서 행동하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고 한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라는 말이고,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이 되라는 말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목소리, 아니 죄송합니다. 장켈레비치의 목소리의 어조는 베르그손이 묘사하는 생의 약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생의 약동은 결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동시에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죠. 이 목소리는 1967년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이라는 놀라운 제목을 가지고 있는 방송 중에 발화된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문화방송이었구요. 베르그손이 제안하는 정의는, 아니, 장켈레비치였죠.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손에 대한 한 저작의 저자입니다. 이 저작은 아주 훌륭하고, 접근 방식을 다각화하지요. 게다가 베르그손에게 보내는 가장 멋진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장켈레비치의 정의는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직관에 대해 말한 바를 이어가는군요. 직관은 나방이 불꽃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특정한 거리입니다. 알맞은 거리 말이죠. 너무 멀면 직관을 갖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우면 그것에 의해 불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떤 작업을 발명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점은 지금으로서는 반직관적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여기서 이 거리는 우리가 지성적인 인간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관은 단지 우리 정신의 가장자리에만 위치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보기에 작업이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발췌문에서 장켈리비치는 일종의 번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번개를 쫓아 이 번개를 다시 만나려고, 혹은 이 번개를 정식화하려고 하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직관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해볼 수도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마주쳤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컨대 우리는 생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합니다. 그리고 생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어떻게 솟아난 것인지도 모를 일종의 예감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부를 탐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다윈의 텍스트, 라마르크의 텍스트, 생물학자들의 텍스트, 자연주의자들의 텍스트를 읽고 나서, “자, 생 속에는, 그리고 어쩌면 이러저러한 사물들 속에도 생적인 측면이 있다”와 같은 가설을 그려보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가설들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을 납득해야 하구요. 수많은 청사진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정식화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건 다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정확히 그들이 말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말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 우리의 정신을 맴도는 일종의 “부정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니오”들이..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있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말하고자 하는 것 주위를 맴돌게 되지요.


라푸자드 : 주위를 맴돌고,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명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작업 속에서, 생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접근하려 한다고 해 봅시다. 베르그손은 생 속에서 생적인 것을 규정하려 하지요. 생 자체가 아니라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을요. 베르그손은 그가 시험해볼 수 있는 그 모든 가설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따라서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긍정적인 가설이 점진적으로 그려지고 점진적으로 나타나, 자신을 강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설은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이 바로 창조적 약동이라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가설을 찾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오랜 작업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그것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명명하는 것인가요? 그 가설이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명명할 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정확히 말해야겠군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반 레트 : 그러니까 그건 발견이군요?


라푸자드 : 그건 발견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우리가 조금 전에 공감에 대해 말했던 바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만, 타자적인 무언가로 발견합니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죠. 따라서 그것은 창조인 동시에 발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재이지만 너무 불명료한 선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선재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제시된 빛을 통해 수행한 작업이 이러한 불명료함을 밝히고 그 선재성에 더 많은 명료성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철학자의 작업은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을 밝혀내서 거기에 일종의 형태를 부여하는, 혹은 적어도 그 위에 말들을 부여하여 그것을 아마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겠군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적합하지 않은 수단, 즉 지성의 수단을 이용하여 타자에 속하는 것을 다시 전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네. 바로 그 점말입니다. 철학자는 직관의 편에 있지만, 또한 지성의 편에도 서있으니까요. 그리고 철학자는 자신의 지성에 호소하는 것 말고 다른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지요. 그럼 베르그손은 다른 수단이 없음에도 이 수단을 규탄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장켈레비치의 나방과 같은 것입니다.


반 레트 : 네.


라푸자드 : 베르그손은 그와 동시에 직관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직관으로 되돌아간다는 조건에서요. 한 번 직관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죠. 이 직관은 길잡이입니다. 그건... 우리는 지성을 발휘할 때는 언제나 직관과 가까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반 레트 : 이 점이 베르그손으로 하여금 이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 가운데 하나를 쓰도록 만들었나 보군요.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이런 설명을 제시합니다. 결국 철학자가 말하려 하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점이고, 이 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철학자는 그것을 말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말이죠. 단순성이 결국에는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고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매우 매우 풍요로운 것이라는 이 관념에 대해, 조르주 클래스가 읽는 베르그손의 텍스트를 들어보시죠. 


클래스 : 우리가 철학자의 사상 주변을 도는 대신 그 속에 더 자리잡으려 할수록, 우리는 그의 학설이 다음과 같이 변형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복잡성이 감소하고, 다음으로는 학설의 각 부분들이 서로의 내부로 들어가, 결국에는 하나의 단일한 점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이 점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점차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리라는 점을 느낀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공하는 것을 정식화하면서 그의 정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그러고 나서는 그의 수정을 또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따라서 이론에서 이론으로 교정을 거듭하며 그는 완성되어 간다고 믿었으나, 그가 했던 일은 단지 복잡성이 복잡성을 불러오고 전개가 전개에 병치되어 놓이면서 그의 본원적 직관의 단순성을 상승하는 근사치로 되돌려주었던 것뿐이다. 따라서 그의 학설의 무한히 증가할 복잡성은 그의 단순한 직관과 그가 이 직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들 간의 통약 불가능성에 불과하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이미지이지만,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철학자의 정신에 출몰하는hante 것이고, 그의 사유의 우여곡절을 통틀어 그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것이며, 직관 자체는 아니라 해도 필연적으로 상징적인 개념적 표현보다는 훨씬 더 직관에 가까운 것이다. 직관은 “설명들”을 제시하기 위해 이 이미지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음악 : Bugge Wesseltoft, Road home)


반 레트 : 직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철학적 직관은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오늘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에서 우리는 이 일에 도전하려 합니다. 「철학적 직관」은 베르그손이 1911년 행한 강연의 제목입니다. 이 글은 1934년 출간된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이 모음집을 다룰 것인데요.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합니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 문장들이 요약하는 바, 아니 설명하는 바, 아니 표현하는 바는... 여기 있는 것을 표현하는 어려움에 대해 베르그손이 말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 적절한 용어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여하간 이 문장들이 표현하는 바는 철학적인 몸짓 자체, 탁월한 예술적인 몸짓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는군요.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단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이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쓰고 또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고 또 작곡하면서 생을 보낸다는 말이니까요. 사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관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성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구요.


라푸자드 : 네. 그렇지만 이미...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것이 쉬운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죠. 쉬운 것은 바로 지성이 우리 인식의 가능한 재조합을 통해 접근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식들을 마음대로 재조합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해독하려 합니다. 반면 단순한 것은 끝점에서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서 우리가 작업에 대해 말한 바와 겹쳐집니다. 교수에 대해 말할 경우에 이 점이 두드러지죠. 가장 단순한 교수들, 가장 어려운 것들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말하는 데 성공하는 교수들은 가장 많이 작업하는[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마지막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작업을 거친 이후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고, 일종의 그림자처럼 작업의 전 과정동안 작업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그 단순성 자체에 있어, 그 응축성 자체에 있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발견되는 관념은... 뭐라고 할까요, 베르그손주의의 골격이 되는 관념입니다. 우리가 더 고양될수록, 우리는 한층 더 단순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 더 밀도있고 응축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압축하여...


반 레트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습니다. 맞아요. 극도의 밀도를 갖는 점이죠.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이 단순성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더 분산되고 더 공간화되며 정신의 강렬한 생을 더 이완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단순성은 이런 종류의 극도의 밀도를 가진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접촉하고 있으면서도 지성에 의해 이로부터 분리되어 있지요. 지성은 본성상, 그러니까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성의 본성입니다. 지성은 본성상 공간화할 수밖에 없고, 다시 말하면 재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최소의 노력을 향해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단순한 것을 향한 이 노력을 줄곧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의 말을 들으니 왜 베르그손이 논리혐오의 길에 빠지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논리혐오는 지성이 우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데려갈 수 없고 직관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성에 대한, 지성에 대한 증오를 갖는 것이지요. 왜 신비주의에 빠져서 일체의 철학적 작업, 그러니까 이성의, 지성의 작업을 몰아내면 안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제 생각으로는 철학에 내속적인 일종의 교육론이 이 지점에 있습니다. 몇몇 개인들은 아마도 충분히 강하고 강렬한 직관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신비가들의 경우나, 베르그손의 말하는 것처럼 몇몇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시각을 가지고, 사태를 지성의 재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실천적 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직관에 의해 전복되는 이러한 특권을 갖지 못한 채로 언제나 지성의 양태들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작업을 통해, 고된 일을 통해, 겸허한 희생을 통해 이 직관에 도달하여 그것의 덮개를 벗겨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반 레트 : 직관을 표현하기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군요. 그런 이유로...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이 지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구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선택지가 없는 동시에, 베르그손에게 이것은 단지 예술가, 신비가와 같은 예외적인 존재들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과 직관적인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텍스트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표현되는 이 “매개적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반 레트 : 여러 마디로 말하셔도 됩니다(웃음).


라푸자드 : 네. 여러 마디로 말해도 되지만(웃음), 뒤이어 설명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그건 일종의 몸짓geste입니다. 그건 철학자가 수행하는 몸짓이지만, 철학자가 그것을 수행하는지도 모르면서 소유하고 있는 몸짓이죠. 그것은... 하지만 이 몸짓 자체는 결코 직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건대 직관은 불가지한 것의 한계에 위치해 있고, 이 몸짓은 베르그손이 “매개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이미지는 개념 너머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철학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철학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경계에 있는 것입니다. 지성의 산물인 한에서 철학은 개념들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직관과 지성 사이에는 일종의 매개적인 영역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 장소에서 이미지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철학의 발생적 운동을 수용하려 하는 이미지들을 말이죠.


반 레트 : 이건 심적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시각적 이미지인가요? 그러니까 무언가에 대한 시각적 표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미지 말입니다. 아니면... 아니면 심적인 이미지인가요. 예컨대 이 이미지가 하나의 회화, 그림을 의미하는 건가요?


라푸자드 : 아닙니다. 그건 심적 이미지입니다. 동시에 이 이미지는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이미지를 빌려올 수는 있습니다. 어떤 운동을 표상하느냐에 따라서요. 말하자면 어떤 움직임이냐에 따라서 말이죠.


반 레트 : 예컨대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어떤 이미지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까요? 아니, 베르그손은 이미지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나요?


라푸자드 : 그건... 음 베르그손 자신이 사용했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죠. 이건 사실 베르그손이 드는 흔치 않은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그가 다른 영역에서는 사례들을 들긴 하지만요. 베르그손은 「철학적 직관」에서 버클리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버클리의 저작을 오랫동안 애독한 뒤에, 그러니까 오랜 작업 뒤에, 버클리의 저작 속에 제시되어 있는 가설들과 주장들이 어떤 것인지 검토한 뒤에, 서로 결부되어 있는 두 가지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말합니다. 그 중 하나는 물질이 일종의 투명한 막과 같다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지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버클리는 관념론 철학자이지요. 분명 베르그손이 많이 읽었던 철학자구요. 베르그손은 이 강연에서 버클리에게 몇몇 페이지들을 할애합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베르그손이 언제나 철학사를 참조하고 있다고 해도, 왜 베르그손이 특히 버클리를 다루고 있는지 물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버클리 또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직관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지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버클리는... 버클리가 만들어 낸 철학 전체를 통틀어 버클리가 찾던 것은 일종의 신과의 직접적 접촉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말하자면 이 중심적인 점을 어떤 이미지 속에서 다시 붙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신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러한 비물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버클리는 물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다른 이미지도 참조해볼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아마 더 생생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생의 약동, 즉 모든 생명체에 내속하는 생명성을 수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편들로 폭발하고, 이 파편들이 또 다른 파편들로 폭발하는 어떤 포탄의 관념입니다. 이것은 역동적인 이미지, 자연 속에서 전개될 수 있었던 다양한 형태들과 종들을 가로질러 영구히 폭발하고 있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한 잔의 물 속에 녹아드는 설탕 조각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베르그손은 지속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하지요. 우리가 물 속에 설탕 조각을 넣을 때, 우리는 설탕 조각의 완전히 용해되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압축할 수 없는 시간이 바로 베르그손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이 이 텍스트에서 설명되는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단지 교육적 은유일 뿐인가요?


라푸자드 : 저는... 교육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이미지는 사유의 대상이 가진 역동성, 운동에 속하는 어떤 지점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우리의 정신을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과의 공감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지요. 마치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어떤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아마도 그에 대한 직관에 합류할 수 있겠죠.


반 레트 : 그 때문에 베르그손이 펼쳐내는 귀중한 자원들이 그의 문체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군요. 어쨌든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죠. 1959년 RTF에서 이루어진 대담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메를로-퐁티 아카이브, 베르그손의 문체 (source : Henri Bergson, 19/10/1959, RTF))


모리스 메를로-퐁티 : 베르그손에게는, 직관적 철학자의 면모와 논쟁하는 철학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논쟁하는 철학자는 이전 철학이나 상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철학자입니다. 사실 이 두 철학자는 상당히 다릅니다. 베르그손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 학계의 교양은 가장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발표 중의 우아함이나 섬세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논증의 영역에 있다고 느낍니다. 그때 베르그손은 아주 능수능란하고 설득력있지요. 그런데 갑자기 몇몇 단어들이 탐사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 예술의 특정 기법들과 다행스럽게 마주치기에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이 자연에 선행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의 문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문체는 어떤 순간에는 언제나 연마되어 있고, 언제나 우아한,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다소 학적이기도 한 문체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문체는 제 생각으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특질을 갖습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힘과 활력이라는 특질을 갖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직관에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음악 : Keith Jarrett, Rio part IX)


반 레트 : “베르그손을 묘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가 분명히 유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언제나 반쯤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언제나 그가 보고 있는 형태를 아주 어렵게 기술하고 있는 사람의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고뇌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뒤섞여 있는 덩어리에서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양 엄지와 검지를 움직였다.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확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마치 베르그손이 사태의 혼란스러운 흐름 속에서 극도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특정한 곡선을 볼 수 있는 것 같았고, 베르그손은 아주 주의깊게 말을 고르고 은유와 묘사를 사용하였기에 다름아닌 그가 보고 있는 곡선의 정확한 형태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형태의 진술일 것이다. 베르그손은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각자의 사람이 계속해서 강연자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반쯤 감긴 눈, 고뇌하는 듯한 휴지,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듯한 엄지와 검지의 몸짓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문학비평가 토머스 에르네스트 흄Hulme이 기술하는 앙리 베르그손의 일화입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볼로뉴 강연에 참가했었죠. 이 강연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으로, 우리가 이번주에 다룰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음, 우리는 조금 전에 베르그손의 두 문체를 구분하는 메를로-퐁티의 목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논쟁하는 베르그손과 직관적 베르그손이 있었죠. 말하자면 갑자기 별안간 나타나는 시적인 약동을 가진 베르그손 말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제가 그 뒤에 읽은 흄Hulme의 글과 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주 우아하고, 거의 학적인 논쟁하는 사람인 동시에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을 향하는 직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거의 완전히 인격을 바꾸는 것 같네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저는... 제가 읽었던 내용에서는,


반 레트 : 앗, 처음 보시는 건가요?


라푸자드 : 예. 책에 실린 내용밖에 알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 두 발췌문에서 충격적인 점은 어떤 애착... 정확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애착입니다. 직관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모호하고 흐릿하고 비결정적인 무언가이기는 커녕, 물론 직관이 비결정적이고 불가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직관은 우리를 정확성을 향해 인도하고, 정확성을 향해 밀어갑니다.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구절들, 번개와도 같은 통찰력의 묘사들은 사실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커다란 정확성의 순간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정확성을 가장 높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 사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 사물을 생각할 때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 모음집의 첫 번째 논문에서부터 철학사에서 정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지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개념의 일반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식이지요. 


반 레트 : “철학사에서 가장 결여되어 왔던 것은 정확성이다.” 이것이 이 모음집의 첫 문장입니다.


라푸자드 : 맞습니다. 정확히 그러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위해 재단된 의복은 정확히 이 사물을 위해 재단되어야 하고, 다른 어떤 사물에도 맞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그것은 아주 우아하고 현대적인 형태의 충족이유율입니다.


반 레트 : 맞아요. 그리고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정확성이 꼭 지성의 편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 말이죠.


라푸자드 : 네 그렇습니다. 정확성은 바로... 음... 베르그손은 라베송에 대한 텍스트에서 자신이 전통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는데요. 거기서 베르그손은 추상적 관념을 정의하는 두 가지 방식을 언급합니다. 한편으로, 추상적 관념, 예컨대 색의 관념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것입니다. 이 색들은 모두 구체적인 관념이기 때문이죠. 이 경우 추상 관념은 어떤 내용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한편으로 색의 관념은 구체적인 흰색 빛과 일체를 이룹니다. 이 빛은 프리즘을 통해 모든 색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완벽히 구체적인 이런 흰색 빛은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각각의 구체적인 색들은 모두 이 빛이 갖는 하나의 뉘앙스라거나 하나의 정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유해야 할 사태는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적 실재의 등급들이 됩니다.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이러한 것입니다. 실재 전체는 지속이라는 요소의 내부에서 사유되며, 각각의 구체적인 실재들은 지속이 갖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완전히 정확한 하나의 리듬이 됩니다. 물론 어떻게 각각의 실재가 그 자체로 지속의 특별한 리듬인지를 포착하려면, 이 지속과 가능한 한 직관적인 접촉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반 레트 : 직관 덕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왜냐하면 지금은 실재를 감각하는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시니까요.


라푸자드 : 직관 덕이지만, 공감이 수반되는 직관이어야 합니다. 그건...


반 레트 :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죠. 자신의 고유한 직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미 이 직관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당신이 말하는 리듬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정도에... 뉘앙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겠죠.


라푸자드 :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우선은 이런 것이죠.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리듬을 맞출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 리듬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베르그손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점은, 물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물질인 바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생 속에 있는 생명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 안에서 생명적인 것을 발견해야 하지요. 기타 등등. 따라서 베르그손이 사유한 모든 것, 즉 물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것, 생명적인 것, 사회적인 것... 베르그손이 이것들을 사유한 것은 단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상응하는 것들로... 평행하는 것들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는 이건 우리가 친구와 교제할 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관건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있던 친구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니까요. 우리는 그 친구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그만의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몸짓, 혹은 존재 방식이 그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죠. 


반 레트 :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용어를 통해 베르그손의 저작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사르트르 아카이브, 철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소명vocation은 베르그손에서 왔다 (source : diffusé le 21/04/1980, 사르트르의 죽음 며칠 전, TF1))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 왜 문학이 아니라 철학 쪽으로 방향을 잡으셨던 건가요?


장-폴 사르트르 : 아, 그건 베르그손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장애를 가지신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콜로나디스트리아라는 분이죠. 그는 첫 번째 작문 주제로 “지속의 감정”을 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베르그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책이었죠. 저는 그 책들에 사로잡혔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철학은 엄청난 것이구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베르그손을 거의 베낀 작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베껴쓰는 일은 잘 없지만,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베르그손이 진리를 말했는데, 왜 내가 다른 말을 해야 하지?” 그래서 저는 거의 요약에 가까운 작문을 제출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 어떤 성적을 받으셨나요?


사르트르 : 망했었지요. 그보다 2년 전에 저는 철학 수업에서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는지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일차적으로는 작가였지요. 그런데 철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도래했습니다. 이건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철학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음악 : Bill Fleming, Vim vigor and vitality)


반 레트 : 네. 생명성, 혹은 어쩌면 생의 약동. 베르그손은 이 생명성 혹은 생이 가진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신 바에 따르면요. 우리도 여전히 이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이 탐색을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내일은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 주의 기획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오늘 우리와 함께 「철학적 직관」에 대해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푸자드 :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반 레트 : 아주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베르그손을 읽고싶게 만들어 주시는군요. 청취자 여러분도 『사유와 운동』에 빠져보도록 하십시오.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판매중입니다.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다비드 라푸자드의 책,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도 읽어보시죠!


(음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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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2/4)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철학의 길 (2017년 6월 20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상상해 봅시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무엇으로 이루어질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고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겠죠. 가장 좋은 일도, 가장 나쁜 일도. 가능이 항상 좋은 소식인 것은 아닙니다. 노래를 들으며 1분 30초간 이 문장을 생각해보시죠.


(음악 : Lucienne Delyle, Tout est possible)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아르노 프랑수아.


아르노 프랑수아 : 안녕하세요, 아델 반 레트.


반 레트 : 철학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랑수아 : 감사합니다.


반 레트 : 당신은 푸아티에 대학의 교수죠. 당신은 최근에 『자유 문제의 변천』을 출간했습니다. 이건 베르그손이 1904-1905년에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의록입니다. 당신은 또한 최근에 벨 레트르 출판사에서 『건강에 대한 철학의 요소들』을 출간하였지요. 오늘 우리는 당신과 함께 베르그손의 이 텍스트 「가능과 실재」를 읽어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가능하다. 최악의 일까지 포함하여”라고 노래하는 뤼시엔느 드릴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종종 가능은 희망과 관련되지만, 여기서 가능은... 최악의 면모를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어디에 위치해 있나요?


프랑수아 : 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극도로 양면적인 말이죠. 우선 이건 자유에 대한 호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열려있고, 실재가 더 나은 것이 되기 위해 우리의 개입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처럼요. 이와 동시에 정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이미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의 형태로 단지 실현되기만을 기다리며 이미 존재한다는 말이죠. 이런 이유로 철학자들은 가능이라는 주제에 대해 매우 양면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자유를 옹호하고자 할 때, 어떤 이들은 가능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처럼요. 다른 이들은 가능이 자유의 숙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앙리 베르그손은 1859년에 태어나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르그손의 출간된 마지막 저서인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것은 191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강연과 논문들을 모은 모음집입니다. 3번째 텍스트를 제외한다면 말이죠.[역주 : 착오가 있는 듯하다. 6번째 텍스트인 「형이상학 입문」도 1903년에 출간된 텍스트이다.] 「가능과 실재」(1930)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이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이미 얘기한 적 있는 주제로 되돌아가보려 한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연속적 창조라는 주제이다. 나는 이 창조를 매 순간 경험한다고 믿는다. 내게 일어날 일의 세부사항을 떠올려봐도 소용없다. 일어나는 사건에 비하면 나의 표상은 어찌나 빈곤하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인가! 실현에 동반되는 무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어떤 회합에 참여해야 한다고 해보자. 나는 거기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테이블에 어떤 순서로 앉아 어떤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도착하여 내가 기대한 것과 꼭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 보자. 내가 그들이 말하리라 생각했던 것을 그들이 그대로 말한다고 해 보자. 이것들 전부는 나에게 독특하고 새로운 인상을 준다. 마치 이제는 그 장면이 예술가의 손길이 닿은 개성적인 선으로 그려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 장면에 대해 만들었던 이미지에 작별을 고하자! 그것은 이미 알려진 것들로 만들어 사전에 그려질 수 있는 단순한 병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림이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즈의 것과 같은 예술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독창적인 것이다.” 베르그손은 예를 드는 데 재주가 있군요. 아르노 프랑수아. 그가 기술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 삶의 매 순간을 구성하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입니다.


프랑수아 : 네, 이 텍스트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아주 중요하기도 하지요. 사실 베르그손이 답하고 있는 질문은 끊임없이 다시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보통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이 질문에 대답하곤 하지요. 베르그손처럼 새로움을 믿는 누군가, 창조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믿는 곳에서는 당신의 무지가 드러날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예상되어 있었고, 기입되어 있었어요. 단지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새로운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베르그손은 평생동안 창조와 새로움의 실재성을 증명해줄 수 있는 두드러지는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예술을 많이 언급합니다.  여기서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즈가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강연의 끝 부분에서는 라파엘로가 언급됩니다.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벨라스케즈 대신 라파엘로가 언급되지요. 하지만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엘리트적인 사례일 겁니다. 만인에 대한 것이 아니지요. 여기서 베르그손은 진정으로 매 순간 우리 모두에게 창조와 새로움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사례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이 회합의 사례입니다. 모든 것이 줄지어 있습니다. 사태가 펼쳐지면 우리는 그 사태가 본질, 예상된 것들, 개념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 텍스트의 첫 구절부터 자신이 이미 다룬 주제로 되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1930년에 말이죠. 이 글은 1930년 11월 스웨덴 학술지인 『노르딕 저널Nordisk Tidskrift』에 실린 글입니다. 왜 스웨덴 학술지인지 한 마디 해 주시죠. 이 학술지가 왜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가요?


프랑수아 : 네. 이 글에는 긴 내력이 있습니다. 이 글은 본래 1920년 옥스포드에서의 발표를 의해 쓰인 글이죠. 다음으로 이 글은 1927년 노벨상 수상 수락 연설을 위해 두 번째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스웨덴 학술지에 실린 것이죠. 베르그손은 노벨상 시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이 글을 대독하도록 했습니다. 3년 뒤 이 글은 스웨덴 학술지에 실리고, 종국에는 우리가 이번주 내내 다루게 될 연설과 강연 모음집, 1934년의 『사유와 운동』에 수록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이 글은 베르그손 사유의 가장 늦은 시기에 쓰인 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가 이미 다루었던 주제로 되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지요. 『창조적 진화』와 다른 글들에서 다루어진 주제인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연속적 창조”라는 주제 말입니다. 이 관념은 베르그손의 글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에게는 아주 친근한 관념입니다. 베르그손은 왜 다시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새로이 기여할 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프랑수아 : 정확히 말해,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반론에 직면했습니다. 베르그손은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였지요. 모든 형태의 결정론, 모든 형태의 과학적 실증주의가 언제나 베르그손과 대립하고 있었고, 베르그손은 평생동안 싸우고 논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또한 베르그손은 우리 지성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의 구조 자체가 만들어진 방식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사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창조를 사유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창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증명하려 계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시도를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독창성은 새로움을 가능으로부터 떼어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가능은 새로움이 아니죠.


프랑수아 : 맞습니다. 가능은 미래보다는 과거와 훨씬 더 관련이 있습니다.


반 레트 : 아주 반직관적이군요?


프랑수아 : 네 완전히 반직관적이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말하자면 조금 더 고차적인 의미로는 직관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실재성을 참조한다면 말이죠. 사실 우리가 가능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일어난 일을 회고적으로 투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이 언제나 이미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사실은 시간이 그 일을 실어다 준 것이고, 시간이 창조의 새로움을 전달해주는 것이죠. 우리는 단지 사후적으로만, 조건법 과거 시제로만, 회고적으로만, 시간이 실어다 준 일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반 레트 : 음. 당신은 아주 간단하고 당연하게 말하시는군요. 하지만 사실 이 지점은 매우 섬세하고 복잡합니다. 어떻게 가능이 과거의 편에 위치할 수 있나요? 어떤 사태가 과거에, 음 어떤 사태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 그러니까 가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식에도, 사실에도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인가요?


프랑수아 : 가능의 관념은 인식에도, 사실에도 아무 것도 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해해야 하는 점은... 음.. 베르그손이 펜을 들 때... 가능을 대하는 하나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칸트에서 이 전통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 전통에 따르면 가능성은 비-모순을 의미합니다.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말은 단순히 그것이 모순적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논리적인, 더 나아가 심지어 논리주의적인 우리의 사유는 비모순적인 모든 것이 어떤 신의 지성 속이나 어떤 예지적인 천상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행동한다는 것은 이러한 창백한, 추상적인 존재, 즉 가능들 중 하나를 떼어내어,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이 되지요. 나머지 모든 가능들을 영원히 비실재 속에 남아있게 만들면서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렇게 씁니다. “가능을 그것의 자리로 되돌려보내자. 그러면 진화는 계획의 실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고,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자유에 무제한적인 영역이 허락될 것이다.” 가능을 현재와 미래로부터 잘라내어 그것을... 과거에 둔다는 사실이, 음 이 점은 조금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지요. 이 점은 여전히 반직관적이고, 가능을 과거 쪽에 둔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니까요. 여하간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어떤 점에서 이 사실이 자유의, 비결정성의 증대를 가져다주는 것인가요?


프랑수아 : 음, 그 이유는,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가 행동할 때, 아니 창조할 때, 즉 이전에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혹은 아마도 개요나 전조의 형태로만 존재했지 결코 그것이 일단 실현된 후에 갖게 될 구조에 따라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을 나타나게 할 때, 베르그손의 생각은 여기서 가능이 우리가 가진 자유에 대항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가능은 말하자면 이케아의 그림이나 작은 설명서 같은 것이니까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케아에서 가구를 설치할 때에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이미 실현해야 할 가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가구를 방에 더하는 일일 뿐입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행동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이케아 설명서가 미리 만들어져 있음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을 생각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만 시간이 진정으로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하지만 행동이 가능해야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프랑수아 : 행동이 가능하다면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능하다는 말은,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불가능하지 않다non-impossible”는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자주 사람들이 “불가능하지 않음”과 “가능함”을 혼동한다고 말하지요. 여기서 “불가능하지 않음”은 어떤 실질적인 장애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여기서 “가능”은 조금 더 두드러진 의미를 갖는 것, 말하자면 대문자 P를 가진 것입니다. 칸트의 가능, 라이프니츠의 가능 같은 것들이죠. 이것은 미래 사건들의 모든 성질들을 이미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천상계에, 어떤 신적인 지성 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되는 어떤 실재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 레트 : 자, 반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정확성을 기해보도록 합시다. 라이프니츠를 예로 들어보죠. 라이프니츠는 가능세계의 사상가입니다. 신은 모든 가능세계들, 자신의 처분 하에 놓인 서로 다른 세계들의 모든 가능한 조합들을 검토하고, 그 중 하나의 세계를 존재의 상태로, 그러니까 가능에서 존재로 이행하도록 합니다. 최선이라는 기준에 따라서요. 이건 도덕적 기준이죠. 최선의 세계. 우리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계는 존재하는 세계죠. 우리가 그 속에 존재하니까요. 이 설명의 문제는, 그러니까 베르그손이 라이프니츠에게 제기하는 반론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우리의 처분 하에 있는 가능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 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프랑수아 :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중요한 모델입니다. 그는 베르그손의 강연 전체에 걸쳐 베르그손의 대척점에 위치한 모델이죠. 가능이라는 말이 우선 라이프니츠가 사용했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제기한 반론이 어떤 것일까요? 사실 베르그손의 반론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 라이프니츠는 실재보다 가능에 더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반면,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반대로 실재는 가능에 비해 어떤 증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가능이 실재보다 더 적은 존재를 갖는다고요.


프랑수아 :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깔대기 도식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적인 선택, 라이프니츠의 신이 내리는 선택은 깔대기 모양의 선택입니다. 수많은 가능들이 존재하고, 단 하나의 가능, 최선의 가능만이 실현되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는 거꾸로 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능보다는 실재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실재가 훨씬 더 풍부한 시간, 창조, 새로움을 담고 있는 반면, 가능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니까요. 다음으로 두 번째 반론은 실재가 가능과 닮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으로는, 신이 하나의 가능을 실현할 때 신은 단지 이미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던 것에 추가적인 피와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재생산할 뿐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유령같은 도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가능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가능에 피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을 창조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이미 주어진 것, 이미 예상된 것, 어떤 형태로도 이미 존재하던 것과 전혀 닮지 않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요.


반 레트 : 그러니까 가능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새로움의 도래를 막는 것이군요.


프랑수아 : 음 맞습니다. 그 문제는 새로움의 도래를 막는 것입니다. 이 강연의 주요한 목적은 반대로 새로움의 도래를 막아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활동에서 새로움의 도래를 막아서는 장애물을요. 진정으로 실천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이 강연은 말하자면 자유liberté를 해방하려libérer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로 이 텍스트, 「가능과 실재」의 다른 발췌문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여기에도 아주 생생한 사례가 등장하는데요. 그것은 하나의 대화입니다. 물론 가상의 대화이지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을 법한... 어쨌든 “가능”했던 대화죠(웃음). 그것은 베르그손과, 문학의 미래를 묻는 기자 사이의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생은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 같은 것이 아니다.” 들어보시죠.


(음악 : Vincent d’Indy, Sarabande et Menuet)


조르주 클래스 : 세계대전 중에 몇몇 신문과 잡지들은 당시의 끔찍한 불안을 외면하고 후에 평화가 복구되었을 때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였다. 그것들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학의 미래였다. 어느 날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물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하면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는 물었다. “적어도 당신은 어떤 가능한 방향들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태를 상세히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합시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당신은 적어도 총괄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겠지요. 예컨대, 내일의 위대한 희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대답을 듣고 내 대화 상대방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언제나 기억할 것이다. “만일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무엇일지 제가 안다면, 저는 그것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미래의 작품을 어떤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에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이미 철학과 오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가 보기에 나는 철학에서 이 수납장의 열쇠를 얻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 작품은 아직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 재능있는 사람이나 천재가 나타나면 그가 어떤 작품을 창조하겠지요. 그때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고, 그를 통해 호고적으로, 혹은 소급적으로 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측불가능하고 새로운 실재가 창조됨에 따라, 실재의 이미지가 그 배후의 무규정적 과거 속으로 반사됩니다. 그렇게 하여 실재는 언제나 가능했던 것이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이 순간에 언제나 가능했던 것이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 실재의 가능성이 그 실재성에 선행하지 않으나, 일단 실재가 나타나고 나면 선행하게 될 것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능은 과거 속에 위치한 현재의 신기루 같은 것이죠.”


(음악 계속)


반 레트 : 여러분은 지금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을 듣고 계십니다. 10시 17분입니다. 오늘은 아르노 프랑수아와 함께 베르그손의 『사유와 운동』 방송의 두 번째 편, 「가능과 실재」를 읽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글이네요. 아주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글은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제기하는 문제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네요. “가능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리고 베르그손은 “가능이 과거 속에 위치한 현재의 신기루”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가능을 정의하는 데 미래는 전혀 쓰이지 않는군요. 자,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시죠.


프랑수아 : 이 텍스트는 유머로 가득한 텍스트입니다. 베르그손에게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유머가 많이 있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베르그손이 “만일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무엇일지 제가 안다면, 저는 그것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건 허영심이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전에 갖지 못했던 희곡 작가의 재능을 단번에 갖추게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더 진지하게도, 더 놀랍게도,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내가 그것을 안다면, 나는 그것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일 것이다”라는 말이지요.


반 레트 : 그렇군요.


프랑수아 : 내일의 위대한 희곡이 어떤 것일지 안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도 이 말을 하는 우리와 이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저자를 구분해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앎과 자료를 모아들였다는 말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 작품이 어떤 것일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현재가 미래로 진입하는 지점에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면 이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의 사례는 왜 제시된 것인가요?


프랑수아 : 이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이라는 사례는 극도로 생생한 사례입니다. 사실 베르그손이 “내가 철학자로서”라고 말할 때 그는 학문에 대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를 이 수납장의 열쇠를 가진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신의 지성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가능한 것들의 수납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들입니다. 도래할 가능성들, 결코 실현되지 않았던 가능성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유사한 지점을 지닌 모든 주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철학자는 이 수납장의 열쇠를 열어서 거기에 선재하는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단 하나만을, 최선의 가능성만을 끌어내 실현되도록 하는 사람이겠지요.


반 레트 : 네. 가능의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베르그손은 인식 속에서 우리와 일체를 이루는 환상들을 규탄하려 합니다. 그것은 도래할 일의 예측이 가능하다는 환상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새로움의 정 반대에 위치합니다.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결정론은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요. 그런데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바로 이 점에서 가능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능은 이미 존재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이미 존재했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것은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프랑수아 : 그 수납장이 사실은 텅 비어있는 것이거나, 혹은 그것이 무언가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생산된 것의 기록보관소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일어날 일에 대한 조금의 정보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가능”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잘못 사용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가능이라는 말이 인간적 필요에 상응하는 바가 있지 않나요?


프랑수아 : 자,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의미에서 가능에 대해 베르그손이 행하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었다”라는 의미에서요. 책과 같이...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환상은 우리의 정신에 자연스러운, 적어도 베르그손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가능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셨지요. 이 필요는 분명히 우리 정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행동이 이루어질 때 행동도 그 자체도 자신의 뒤편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투사합니다. 즉 베르그손은 자유에 대한 그의 철학 속에서 가능 개념의 어떤 용법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가 이러한 가능성의 회고적인 투사인 한에서 자유는 모든 가능의 밖에서 전개되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행동은 창조합니다. 베르그손에게는 이 점이 중요한 핵심이죠.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행동이 실재를 창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를 통해 또한 가능성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생각을 아주 멀리까지 밀고 나갑니다. 그는 심지어 어떤 특정한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음... 베르그손은 위대한 개인들을 믿었죠. 이 점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무튼 베르그손은 위대한 개인들을 믿었습니다. 여하간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특정한 개인들이 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영웅이나, 위인 같은 사람들 말인가요?


프랑수아 : 음. 베르그손이 「가능과 실재」를 쓸 때 그는 아직 도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향해 거의 다 도착해 있었죠. 이 마지막 책은 실천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것으로, 세 가지 영역에, 즉 도덕과 종교, 그리고 정치의 영역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 세 영역에 존재하는 몇몇 개인들의 행동이 그 자체로 창조적이라고, 그러니까 예술가의 경우에서처럼 작품을 창조할 뿐 아니라 창조자를 창조하기도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자들을 창조하는 것이 베르그손이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위인”의 기준이죠. 그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창조하는 것이고, 심지어 이전에는 말 그대로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태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역사를 사유하기 위해 진정으로 극단적인 추론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반 레트 : 하지만 그 위인들이 가능을 입증하면 가능은 동일하게 남겠군요. 가능은 언제나 도래할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에 속하니까요. 이 점을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실재적인 것보다 어떤 가능이 선행하여 이 가능을 우리가 실재의 상태로 도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가능하다, 혹은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어떤 정신의 작업입니다. 이 정신은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하는, 아니 사후적으로 말하는 정신입니다. “이 일은 가능한 일이었어. 결국 일어났으니까.” 베르그손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례를 드는데요. 그것은 “햄릿”의 사례입니다. 당신은 창조자 애기를 하셨죠. 베르그손은 「가능과 실재」에서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가능의 형태로 그려졌을 정신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해 그 작품의 실재를 창조해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을법한 반론에 응답합니다. 그 반론은 이러한 것입니다. 『햄릿』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쓸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앎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다른 『햄릿』을 써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응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정신은 정의상 셰익스피어 자신이 될 것이다. 이 정신이 셰익스피어 이전에 나타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보아야 부질없다. 그때 당신은 이 극의 모든 세부사항을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그 세부사항을 보충해감에 따라, 이 셰익스피어의 선행자는 셰익스피어가 사유할 것을 모두 사유하고, 셰익스피어가 느낄 것을 모두 느끼며, 셰익스피어가 알게 될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지각할 것을 모두 지각하며, 결과적으로 셰익스피어와 동일한 시공간의 지점을 점유하고 동일한 육체와 동일한 영혼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 자신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작품은 도래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군요. 햄릿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존재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논변을 가장 엄밀한 형태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변이 예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하기 몇십년 전인 1570년대으로 가서, 햄릿을 예측하려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시기 영국의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을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부르주아의 조건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각 문장을 쓸 때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의 모든 심리적 특성들, 그의 기질들, 그의 성격들을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햄릿이 어떤 것일지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자료를 축적해감에 따라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영혼에 침투해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더 많은 자료들을 축적할수록 우리는 한층 더 셰익스피어 자신이 될 것입니다. 모든 자료들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요? 우리는 햄릿을 쓰고 있는 셰익스피어가 되겠죠. 이를 기술철학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가능을 분석한다는 것은 이 가능을 하나의 실재로 변형시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적 지성의 왕좌에 앉아 스피노자의 과정적 실재 속에 잠겨든 가능입니다.


반 레트 : “햄릿”의 이 사례 이면에는 아주 본질적인 철학적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론과 자유를 대립시키는 논쟁이죠. 결국 베르그손이 암묵적으로 답하고 있는 반론은 결정론자의 반론이죠. 이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만요. 새로움이나 순수 창조 행위에 대해 말씀하셨죠. 하지만 새로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제일 원인이나 작용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물론이죠. 그게 “햄릿”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왜 『햄릿』을 만들었는지, 창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로 이어지는 모든 원인을 알고 나면, 우리는 창조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은 순수한 자유의 행위인 창조 행위를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프랑수아 : 정확합니다. 결정론과 싸우기 위해서는 가능의 이론을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금 전에 사르트르 얘기를 했었죠. 사르트르의 경우가 그렇고, 키에르케고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들을 비판합니다. 이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들을 알지 못한 채로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죠. 이들이 자유를 가능한 것들 사이의 선택으로 환원했다고, 비결정성을 가능한 것들 간의 갈등, 싸움, 경쟁으로 환원했다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우리가 읽고 있는 강연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반대로 베르그손은, 베르그손의 제스쳐는 이러한 사유의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고(웃음), 자유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모든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여전히 가능을 비판하면서도 결정론자로 남아있는 사람과 대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스피노자입니다. 이쪽 편, 그러니까 가능을 비판하는 편에도 여전히 싸움터가 있습니다.


반 레트 : 그렇군요.


프랑수아 : 가능에 대한 결정론자의 비판에 대항한 싸움이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가능에 대한 비판을 시간 외적인 필연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한 반면,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가능을 비판하는 것이 시간이, 그러니까 창조와 새로움이 도래하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반 레트 : 베르그손과 스피노자 사이에서 많은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군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반 레트 :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에 대해서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반 레트 : 맞아요. 스피노자가 받아들이는 자유의 형태는 우리를 결정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죠. 베르그손도 이 정의에 찬동할 수 있겠군요? 단지 스피노자는 자유의 행위 자체를 사유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구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과 스피노자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베르그손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베르그손의 유명한 구절이 있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펼 때마다 나는 집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낀다.” 베르그손은 강의에서 스피노자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베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말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사유한 반면, 베르그손 자신은 모든 것을 시간의 관점에서 사유했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는 정말로


반 레트 : 어떤 차이죠?


프랑수아 : 음... 스피노자가 신의, 실체의 자기 전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가능을 비판하고 과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피노자는 과정성을 영원성이라는 존재 방식에 따라 사유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원인에서 출발하는 연역가능성입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이미


반 레트 : 그것은 추상적인 한에서 논리적인 것인 반면, 베르그손에게 과정성은 지속이고 체험된 시간이죠.


프랑수아 :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스피노자는 굉장한 철학자구요. 그것은 비시간적인 과정성입니다. 베르그손에게서는 과정성이 시간적이죠.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시간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는 지속과 영원성을 두 가지 존재 방식으로 대립시킵니다. 그는 시간을 지속에 대한 단순한 측정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지속과 영원 사이에서는 교류가 불가능합니다. 지속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영원한 존재는 정리théorème의 귀결이라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반 레트 : 그러면 베르그손에게는 “영원”이라는 개념은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인가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이 보기에 영원은 다소간 “가능”이나 “진리”와 같은 방식의 실재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 하에 시간의 전개로부터 나타나는 회고적 신기루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이 이런 지점에서 천재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단어들을 이용해...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단어들이요.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해부해서 그 단어가 어떤 점에서 아무런 실재도 나타내지 못하는 “언어의 편이성”이라는 환상에 속하는지를 보여주곤 하지요. 이런 단어는 그가 “거짓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베르그손은 철학사가 일련의 거짓 문제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짓 문제들은 정신의 관점에서는 아주 잘 작동하는 문제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거짓 문제”의 정의에 대해서, 조르주 클래스가 읽어주는 「가능과 실재」의 다른 발췌문을 잘 들어보시죠.


클래스 : 내가 보기에는 거짓 문제들이 존재하며, 이 문제들이 형이상학을 불안케 하는 문제들이다. ... 첫 번째 문제는 왜 존재가 있으며, 왜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존재하는지를 묻는 문제이다. ...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무엇가가, 혹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을 수 있었다”는 문장을 분석해 보라. 당신은 당신이 다루고 있는 것이 전혀 관념이 아니라 단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서 “아무것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아무것도”는 우리가 찾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의 부재를 가리킨다. 사실 경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공허를 보여준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공허는 제한적일 것이고, 윤곽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여전히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공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충만만을 지각하며, 심지어는 충만만을 생각한다.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이 그것을 대치하는 경우에만 사라진다. 따라서 제거는 대치를 의미한다. ... 우리가 왜 존재가 있는지, 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왜 세계가 혹은 신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무가 존재하지 않는지 묻는다면, 결국 형이상학적 문제들 가운데 우리를 가장 불안에 빠뜨리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잠재적으로 하나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음악 : Keith Jarrett, Heartland)


반 레트 : 10시 30분입니다. 키스 자렛, 베르그손, 조르주 클래스였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아르노 프랑수아가 저와 함께 「가능과 실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글은 베르그손이 출간한 마지막 강연 모음집인 『사유와 운동』에 수록된 강연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사유와 운동』을 함께 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들은 구절은 “거짓 문제”를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이 글을 읽고 나니 저도 모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철학 텍스트들을, “이거 혹시 거짓 문제 아니야?”라고 혼잣말하면서요. 그러니까 “존재가 있는가”, “왜 무가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는 텍스트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거짓 문제 아닌가요?


프랑수아 : 베르그손의 관점으로는, 맞습니다. 그는 이 질문들을 하나의 불안케하는 문제로 전환시킵니다. 불안. 베르그손은 불안의 철학자가 아니지만, 불안의 자리를 마련해둡니다. 그는 불안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불안이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는지를 알죠. 흥미로운 점은, 베르그손이 불안을 위대한 불안의 사상가들, 즉 하이데거, 사르트르, 그리고 반복하건대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지점에 위치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불안이 무와 대면할 때, 가능과 대면할 때 생겨난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아챘습니다. 음, 그리고 “거짓 문제”와 “잘못 제기된 문제” 사이의 이 구분에 대해 말해봅시다. 이 구분이 아주 어려운 구분이라는 점을 말해두어야 겠군요. 사실 베르그손의 주석가들조차 이 구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 강연에서 거짓 문제는 무와 무질서에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고, 잘못 제기된 문제는 가능에 관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 레트 : 양자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군요.


프랑수아 :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구제가능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행할 수 있고, 어떤 지점까지는 이 문제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의 문제인 한에서 잘못 제기된 문제입니다. 해석자들 사이의 논의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죠. 베르그손에서 가장 나쁜 것은 무인가 가능인가. 이 텍스트에 따르면 확실히 가능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소간의 철학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으로 또한 흥미로운 점은,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가능의 문제가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다른 두 거짓 문제들에 비교해 볼때 말입니다. 이 거짓 문제들, 무의 문제와 무질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의 문제가 가능의 문제의 근저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정 반대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것은 다소 미묘한 질문입니다.


반 레트 : 네. 하지만, 음 그래도 정확히 말해봅시다. 베르그손에게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베르그손은 무의 문제가 거짓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전 철학사의 동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베르그손을 해석할 수 있죠. 그 경우에는 “부정적인 관념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죠?


반 레트 : 네, 그것 말이죠.


프랑수아 : 그건 종종 제시되는 해석이죠. 장 발과 장켈레비치가 그런 해석을 내립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하나의 비판입니다. 부정적인 관념들에 대한 비판이요. 무의 관념을 그 모체로 하는 일군의 관념들이 있다고 말이죠. 이 구절에서, 「가능과 실재」라는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이 모든 관념들의 모체가 가능의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 가능의 관념일까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그 이유는 가능의 관념이 창조의 확인에 대한 반정립 관념이기 때문이죠. 그건 앞서 강연의 시작부에 언급된 창조와 제작 사이의 혼동입니다. 가능을 믿는 것은 자연이 손을, 팔을, 눈을, 생명체를 만들 때 자연이 제작을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연은 창조를 하는 것인데 말이죠. 가능을 믿는 것은 부품들을 덧붙여서 만들어내는 이 작은 이케아 가구 설명서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능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일입니다. 그것은 도처에서 제작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창조를 발견해야 합니다.


반 레트 : 사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르노 프랑수아? 그러니까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가능이 사실은 우리 추론의 한 양상을 가리키는 논리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논리적 방식들 가운데 무언가를 가능한 것으로 여기지요. 그러니까 이에 따라 가능은 지성에 속하는 것이고, 우리가 어제 프레데릭 보름스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지성, 혹은 오성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 가능은, 가능의 관념 자체는 우리가 실재의 특수성을 놓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이죠.


프랑수아 : 네네. 실제로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논리적 용어로서의 가능이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라이프니츠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전통 전체입니다. 오늘날에 그것은 양상논리라고 불리는 논리학입니다. 가능은 양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죠. 베르그손이 보기에 실제로 가능의 관념에는 이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미래의 실재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개념화된 가능입니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가능은 행동이 일단 수행된 뒤에 행동 뒤로 던져진 것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선인들은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이전에는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가능한 것이 된 행동들을 창조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것이 구제가능한 의미의 가능입니다. 이러한 가능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반 레트 : 이 거짓 문제와 잘못 제기된 문제, 즉 가능의 문제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베르그손이 드는 무질서의 사례일 것입니다. 무질서는 단지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이 아닌 질서입니다. 우리가 무질서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죠.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내세우는 우리의 범주들이 타당하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무질서로, 즉 “놀라운 질서”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아마도 논리적인 범주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 사이의 갈등이 잘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프랑수아 : 베르그손이 보기에 무질서는 거짓 관념, 잘못된 관념입니다. 우리는 무질서에 대한 관념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이것이 인식론의 중심적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질서가 아니라 두 질서가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형이상학적 영향력을 부과합니다. 우리가 무질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질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무질서의 관념을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반 레트 : 네. 


프랑수아 : 모든 정치인은 국가가 질서를 부여하며, 국가가 없다면 카오스일 것이라고, 무질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무질서가 질서에 선행한다는 전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무질서의 관념을 비판하여 무질서라는 이 두려운 기반을 제거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국가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반 레트 : 당신이 정치의 예를 드셨으니, 이제 제기되는 문제는 도덕적 영역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의 관점에서는, 그가 가능을 자유를 사유할 수 있는 타당한 범주에서 제거하는 순간, 자유는 가능들 사이의 선택이 아니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움을, 창조를 사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분출”이 나타날까요? 이건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기원을 가지는 것일까요? 이제 가능이 과거에 각인되었으므로, 이 도덕적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들을 「가능과 실재」의 마지막 인용문에서 베르그손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훌륭한 인용문을 들어보시죠.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에게 창조가 환희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음악 : Keith Jarrett, Time on my hands)


클래스 : 사실에만 밀착해 보자. 시간은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시간의 비존재, 혹은 시간의 타락이 증명될 때까지, 우리는 단순히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이 실제로 분출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이를 통해 철학은 동적인 현상계에서 어떤 절대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더한 환희와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한 환희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우리 눈 앞에서 스스로를 발명하는 실재가 예술이 이따금 운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야기하는 만족감들을 우리 각자에게 끊임없이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재는 우리 필요의 항상성에 의해 최면에 걸린 우리의 감관이 처음에 포착했던 고정성과 단조로움 너머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사물의 새로움과 사물의 동적 독창성을 드러내어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더 더한 힘을 느끼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기원에 존재하고 우리의 눈 앞에서 계속되고 있는 위대한 창조의 작업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 능력은 자신을 다시 붙잡음으로써 강렬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자연적 필연성의 노예로서 복종의 태도로 굴복하던 우리들은 더 위대한 주인에 연결된 주인들로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연구의 결론이다. 가능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사변을 단순한 유희로 여기는 것을 삼가도록 하자. 이것은 좋은 삶에 대한 하나의 준비일 수 있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이러한 삶에 대한 준비를 베르그손은 이 텍스트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군요. 아르노 프랑수아. 말미에서 그는 이 글의 목표가 단지 철학사 속에 기입된 의미 내적으로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베르그손은 철학사와 이렇게 거리를 두지요. 이 텍스트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진정으로 좋은 삶에 대한 준비입니다. 그 말인즉슨, 이러한 성찰이 베르그손에게는 이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프랑수아 : 정확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점이 바로 무와 무질서에 대한 베르그손의 다른 성찰들에 비해 「가능과 실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말했지만, 이 강연의 목적은 실천적인 사유에 있습니다. 실천철학이요.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좋은 삶을 준비하기 위한 두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삶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더한 환희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힘과 환희입니다. 환희의 개념은 익숙하죠. 베르그손은 환희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합니다. 베르그손은 환희가 창조의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창조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든 환희가 존재하지요. 우리는 환희를 통해 창조를 알아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베르그손에게 궁극의 창조는 사물의 창조도, 작품의 창조도 아니고, 다른 창조자들의 창조입니다. 『두 원천』에서 위대한 선인들이 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힘은 더 복잡합니다. 명백히 베르그손은 어떤 신비로운 힘의 이론가가 아닙니다.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르그손에게 거짓 문제들은 참된 문제들로 대체될 운명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가능의 문제가 우리가 이런 일을 하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능의 관념 속에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구제가능한” 측면이 존재하는 한에서입니다. 참된 문제들에 대해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그의 작업의 특정한 국면에서 참된 문제들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요. 그것은 『창조적 진화』 3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참된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유, 인격성,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 신체의 분해 뒤에도 인격이 존속할 가능성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좋은 삶에 기여하는 힘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려 합니다. 베르그손이 제시한 예를 살펴보자면,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입니다. 따라서 더 강하다는 것은 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이 우리에 대해 갖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스스로의 자리인 동시에, 음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말이죠. 한 인간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인간인 한에서 다른 인간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니까요. 더 나아가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연 자체에 대한 책임을 가집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자리는 다른 종들을 마주한 자연 속의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겸허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분명히 여기에서도 우리는 현대적인 문제의식에 위치해 있습니다.


반 레트 : 음... 베르그손의 성찰들 가운데 도덕적 측면은 가려져 있는 건가요? 왜냐하면, 자 보세요. 베르그손이 이전에 말했던 모든 내용의 도덕적 함축을 알기 위해서는 상당해 오래, 무엇보다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기다려야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르노 프랑수아, 이는 우리가 오늘 관심을 갖는 내용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행위 말입니다. 창조가 우리를 강하게 해준다. 창조가 우리를 환희로 채운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자유로운 행위가 “가능”한 건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말이죠.


프랑수아 : 음... 자유로운 행위는 분명히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핵심이지만, 이는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분명히 이는 우리의 지성에 실망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은 무해한, 외적인, 단순히 이론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은 사물을 담론 속에 가두는 일입니다. 정의 자체 속에는 이미 통제asservissement의 행위가 존재합니다. 이 결론은...


반 레트 : 그러면 정의하는 대신 기술해야겠네요. 아니면 명명한다거나...


프랑수아 : “특징지어야” 한다고 합시다. 네. 특징짓기. 특징짓기는 사물이 변동함에 따라 언제나 더 길어질 수 있는 특징들의 목록을 개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정의한다는 말은... 이미 어원이 그 점을 드러내고 있지요. 정의는 한계를 그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사물이 지금 그러한 것과 다른 사물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이 다음에 될 수 있는 무언가는 해로운 것이 됩니다.


반 레트 : 네. 당신은 그것이 “실망스럽다”고 하셨죠. 정말 그렇습니다. 


프랑수아 : 네 그렇습니다. 확실히요.


반 레트 : 논리적인 추론, 심지어는 철학적인 추론의 관점에서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어떻게 정의할 수도 없는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지요? 그건 마치 사실 앞에서 회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랑수아 : 하지만 동시에 베르그손은 자유의 특징짓기에 대해 아주 명료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는 자유로운 행위의 특정한 성격, 혹은 뉘앙스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철학자가 자유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으려면 먼저 자유롭게 행위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행위가 없다면 자유의 철학도 없겠죠. 그럼 이 뉘앙스는 무엇일까요? 그건 매우 정확합니다. 그건 자아와의 닮음입니다. 그 행위가 나와 닮아있다는 말을 다른 용어로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그것은 “내 영혼의 자기성mienneté”이라고요.


반 레트 : 당신이 베르그손의 인격 개념, 성격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군요.


프랑수아 :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어원을 따져보자면, 성격은 “내 자아가 내 행동에 남긴 서명”입니다. 베르그손에서 자아의 물음은 내가 자연 법칙에 균열을 내느냐, 혹은 내가 오성에 균열을 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행동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나의 것이냐. 사실 어쩌면 이것이 자유 관념이 갖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이고, 직관적인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결단을 내릴 때 행위했던 것이 정말 나냐. 친구의, 엄마의, 아빠의 조언이 나에게 작용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아닌가...


반 레트 : 이 질문이 무한히 다시 제기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베르그손의 자아는 정의가능하다거나 닫히고 폐쇄적인 실체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자아가 행위한다면, 행위한 것이 이 자아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


프랑수아 : 음 그건...


반 레트 : 어쩌면 환희를 통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프랑수아 : 네 이미 환희는 그 기준이 됩니다. 더 많은 창조가 존재할수록 더 많은 환희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한 베르그손의 “성격” 개념은 곧바로 “역사” 개념으로 대체됩니다. 개인적 역사라는 의미에서요. 내 자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내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내 성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역사입니다. 내 역사는 내 과거이지만, 이 과거는 내가 언제나 굴절시킬 수 있는 과거입니다. 개인의 여정 속에는, 개인의 운명 속에는 그 우여곡절의 선들이 그리는, 급작스럽지는 않고 점진적인 전환들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어쨌건 간에, 환희가 창조 행위의 증상, 혹은 사실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환희는 창조 행위가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일수록 더 강렬하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군요.


프랑수아 : 맞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라는 말을 혁신을 위해, 자기로부터 떠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해 항구적으로 자기를 갱신한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여기서 자기에 의한 자기에 창조는 자기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창조자로 만드는 창조와 불가분한 창조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이 창조 자체 안에 타자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르그손의 진정한 최종적 귀결일 것입니다.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는 창조자의 창조입니다.


반 레트 : 여기 있는 환희는... 여기에 환희가 있는 거군요. 그건 꼭 기원일 필요는 없군요. 우리는 환희를 확인하고, 환희는 존재하지만 왜 존재하지는 모르는 건가요.


프랑수아 : 아니요. 음... 우리가 조금 뒤에 듣게 될 다른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희가 존재하지요. 하지만 환희가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갖는 사실입니다. 그건... 베르그손은 1911년의 강연[「의식과 생」]을 정확히 이 지점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환희의 사실 자체는 생이 전진하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음악 : Charles Trenet, Y'a d'la joie)


반 레트 : 오늘 우리에게 베르그손에 대해 이야기해주러 오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아르노 프랑수아. 다시 언급하자면, 아르노 프랑수아는 푸아티에 대학의 교수입니다. 프랑수아가 편집하고 주석을 달고 소개한 『자유 문제의 변천 : 1904-1905년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베르그손, 쇼펜하우어, 니체 : 의지와 실재』를, 벨 레트르 출판사에서는 『건강에 대한 철학의 요소들』을 출판하였습니다.


(음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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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1/4)



이 글은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인 France culture의 Les chemins de la philosophie(<철학의 길>) 2017년 6월 19일 방송을 번역한 것이다. 철학자 아델 반 레트가 진행하는 <철학의 길>은 매주 새로운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대담을 나누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2017년 6월 19일에서 22일은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서 『사유와 운동』을 주제로 4일간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아래 원고에 번역되어 있는 베르그손 주간의 첫 번째 방송은 파리 ENS의 프레데릭 보름스가 초청되어 『사유와 운동』의 두 개의 서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그손 철학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좋은 입문인 데다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 있지 않은 프랑스의 라디오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소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직접 청해한 내용이라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는데,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길..




철학의 길 (2017년 6월 19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이번주는 무슨 주고, 오늘은 무슨 날이죠? 여러분을 베르그손의 저작 속에 빠뜨리려 합니다.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지속을 찾아서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시간에서 지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손목시계를 거꾸로 돌리세요. 자명종을 끄세요. 괘종시계를 감추세요.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본래적 실존의 연속적 창조 속으로 빠져들 겁니다.


(음악 : Keith Jarrett, Part 1 (The Köln Concert, 1975))


반 레트 : 안녕하세요 프레데릭 보름스.


프레데릭 보름스 : 안녕하세요 아델 반 레트.


반 레트 : 철학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름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 레트 : 천만에요. 우리는 지금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1부를 듣고 있습니다. 그가 피아노 앞에 홀로 앉아서 청중들 앞에서 연주한 즉흥 연주죠. 전형적인 베르그손적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보름스 : 하지만 사실 모든 음악은 베르그손적입니다. 음악 자체가 불가피하게 베르그손적이죠.


반 레트 : 하지만 즉흥 연주가 조금 더 베르그손적인 건 아닐까요?


보름스 : 사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 베르그손적인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는 음악 속에서 각각의 음들이 예측 불가능하게 차례로 덧붙여지는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음악은,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은 단순히 공간 속에서 음들이 잇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시간적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의 음악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실재 자체에서 음악을 듣기만 한다면, 우리는 베르그손적인 것입니다.


(음악 계속)


(음악 교체 : Keith Jarrett, Nagoya Part IIb (1976))


반 레트 : 당신은 파리고등사범의 현대철학 교수이자, 2015년 이래로 고등사범학교 문학부 부학장이었고, 베르그손 저작의 첫 번째 비평판인 “베르그손 쇼크”를 엮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인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 주를 당신과 함께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언급하자면, 베르그손은 1859년에 태어나,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사망했습니다. 베르그손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정확히 같은 햇수를 살았던 것이지요. 하나의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옮아가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대칭성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삶의 정 가운데인 1900년에는 『웃음』이 출간되었습니다. 『웃음』은 희극성의 의미를 다룬 저작으로, 4년 전인 1896년에 출간된 심신관계를 다룬 『물질과 기억』을 연장하는 저작이었지요. 우리는 오늘 뒤따르는 구상들을 통해 계속해서 전개될 거대한 사유에 대한 회고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 시작점으로 향할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이것을 환상이라고 지적하지요. 사태가 시작하고 끝을 가진다는 생각. 시간은 현재를 가운데 두고 과거를 왼쪽에, 미래를 오른쪽에 둘 수 있는 연속된 선이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철학사에 가져온 가장 큰 기여는 여기에 있지요. 이 선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진정으로 이해된 시간은 체험된 시간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지속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직관, 즉 사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능력의 소관인 것을 어떻게 말들을 통해, 우리의 지성을 통해 포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번 주에 다룰 이 베르그손의 저작의 제목을 이해할 첫 번째 방법은 이러한 것입니다. 이 제목은 하나의 문제를 나타냅니다. 『사유와 운동』. 사유는 지성에 속하는 것일 테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것을, 즉 운동을 붙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본성상 지성의 작업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해결책이 존재할까요? 프레데릭 보름스, 이렇게 문제를 드러내 봅시다. 분명히 이 제목은 베르그손의 저작 전체에 진입하기 위한 좋은 입구인 것 같군요.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제기하는 문제이니까요.


보름스 : 물론이죠. 놀라우면서도 감탄스러운 점은, 그리고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한 점은, 당신이 베르그손에 대한 시리즈를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으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에 진입하는 출입구를 마지막에 마련해 두었지요. 이건 완전히 숙고된 처사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실 베르그손 자신이 밝히는 것처럼, 베르그손은 먼저 문제들을 다루며, 삶의 문제들을 대면함으로써 시작했고, 방법은 회고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의 정신이 회고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이러한 생각에 익숙해 있던 그는 사람들이 마지막 책을 다른 책보다 먼저 읽으리라는 점을, 그가 자신의 사유를 회고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 사람들이 그의 사유에 진입하는 방식일 것임을 완전히 의식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우리의 방송을 예측했던 것이지요. 그는 이 방송을 예상하였기에, 자신의 마지막 몸짓이 첫 번째 몸짓이 되도록 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의 마지막, 진정으로 마지막 저작에서 그는 그의 본원적인 직관을 재발견합니다. 그것은 사유와 운동 사이의 이면적인 관계에 대한 직관입니다. 사실 운동mouvant이라는 말은 아주 독특한 말입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지요. 


반 레트 : 그렇지요.


보름스 : 이 말은 운동mouvement이라는 의미의 현재 분사가 명사substantif로 쓰인 것이지요.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 전적으로 안정적인stabilisé 표현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문법적인, 혹은 수사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반 레트 : 네. 이 책은 1934년에 출간되었으며, 1903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10편의 강연을 모은 모음집입니다. 이 논문들, 이 강연들, 물론 베르그손의 모든 저작들이 훌륭하지만 시적인 동시에 정확한 언어로 쓰여져 거의 숭고한 수준에 이르렀고, 상당히 짧기 때문에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기 시작하는 좋은 입문서이지요. 헌데 이 논문들과 강연들, 특히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두 편의 서론의 내용상의 특이점은 방법 자체에 대해, 베르그손 자신의 방법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특이한 이유는 베르그손에게 방법은 철학의 몸짓geste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베르그손에게 방법은 반성과 같이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보름스 : 맞습니다. 베르그손 자신도 심리학과 철학의 몇몇 문제들, 말하자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 예컨대 영혼과 신체, 뇌 등을 다루는 1919년의 첫 번째 강연 모음집[『정신적 에너지』]의 출간 이후, 방법을 다루는 두 번째 모음집을 출간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방법은 매우 추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반 레트 : 그래요.


보름스 : 방법이라는 말은 사유하기 전에 이미 사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실재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그러한데, 우선 방법은 실재로부터 거리를 두는 간극입니다. 『사유와 운동』에서 “와”는 우선적으로 분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사유는 운동을 사유하는 데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운동과의 간극 속에 있습니다. 이 간극은 우리 정신의 본성에 기인하는 구조적인 간극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본성상, 살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 합니다. 정신은 시간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신은 시간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일종의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넘어설 수 있는 간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사유할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사유는 단지 간극 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간의 경험 속에도 존재합니다. 방법은 어떤 의미로는 철학의 핵심인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면 무슨,


보름스 : 아니, 우리의 실재성의 핵심이죠. 우리는 방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에게는 철학과 실재성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이군요. 철학이 실재와 “일치하기” 위한 몸짓으로 이해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철학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다시 붙잡는 방법인가요?


보름스 : 차이가 없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에게 직접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만 언제나 분리 위에서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실, 맞습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경험이지만, 철학은 또한 본성상 언제나 반성적이고 거리를 두고 있기에, 직접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거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유를 비판해야 합니다. 조금의 사유는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지만, 많은 사유는 우리를 실재로, 근원으로 다시 데려다 줍니다.


반 레트 : 좋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르그손의 중심적인 생각이지요. 이 요점을 설명함으로써 시작해보지요. 베르그손에게 지성과 사유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보름스 : 지성과 사유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실천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사유는 순수하고, 신체를 초월한, 무사심한 활동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순수한 실재가 존재하고, 그것을 목격하는 순수한 관객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실제로는,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입니다. 베르그손이 처음부터 생에 대해 사유한 것은 아니지만, 베르그손은 저작을 진행시켜 나가며 점진적으로 이 점을 발견해갑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이며, 우리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실천적인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실천적 기능은 실재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실재의 본질과 모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실재의 본질은 시간적이고, 유동적이고, 항구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그 속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그것을 제어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사실 실재적인 우리의 사유가,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고 시간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간을 제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겠죠. 우리의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종의 한계입니다. 베르그손은 지성에 대해 매우 간단한 정의를 내립니다. 당신이 지성에 대해서 말하셨지요.


반 레트 : 네.


보름스 : 우리가 오늘 다룰 텍스트에서 말이지요. 베르그손은 지성이 “인간적인” 사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은 사실 하나의 비판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것은 인간적이기만 한 방식, 인간 종의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사실 철학한다는 것은 인간적 사유의 한계를 의식하고, 인간적 사유가 제거해버렸던 것, 즉 항구적 변화, 영속적 변형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이제 개입되는 또 다른 용어가 있는데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것은 직관이라는 개념입니다. 지성이 우리를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직관은 반대로 우리를 가능한 한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다시 실재와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보름스 : 맞습니다. 그건 역설적인 일입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다룰 두 번째 텍스트의 초반부에서 이 역설을 강조합니다. 철학이 직관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입니다. 그것은 “본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며, “직접적 접촉”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실 베르그손의 문제는 이 직관이 본원적인 것이며, 언제나 거기에, 우리의 밑바탕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예컨대 그의 첫 번째 저작이 보여주는 것처럼 중대한 순간에 결단을 내릴 때처럼 우리의 생에 빠져들 때, 그것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지성의 염려를 넘어서게 되지요. 철학은 직관을 다시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이 직관을 우리는 지성 때문에 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철학의 역설은 철학에게는 직관이 단지 소여일 뿐 아니라 책무이기도 하기에, 직관을 방법으로 수립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두 번째 텍스트의 초반의 이 역설을,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직관을 하나의 방법으로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반 레트 : 역설적으로 보이는군요.


보름스 : 완전히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철학사 속에는 더 우월한 실재, 형이상학적 실재, 물 자체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르그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직관을 방법으로 수립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망각해버린 시간적 실재에 대한 아주 단순한 직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녹음된 목소리 : Levinas au sujet de Bergson (« Les chemins de la connaissance », 1981년 3월 2일))

필립 네모 : 1923년 프랑스 철학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엠마뉘엘 레비나스 : 프랑스 철학이라..  나에게, 시대들에 대한 내 감각[시계추]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베르그손이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모든 이들의 수업에 등장했습니다. 베르그손의 생각을 발전시키건, 그에 반대하건 간에, 언제나 그는 참조지점에 있는 철학자였습니다. 살아있는 철학자, 철학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천재성을 통해 증명했던 철학자!


(음악 : Keith Jarrett, Part 9 (Osaka, 2002))


조르주 클래스 : “우리의 지성은 우리 감관의 연장이다. 사변하기 이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생은 우리가 물질을 이용하기를 요구한다. 자연적 도구들인 우리의 기관들을 통해서건, 인위적인 기관들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도구들을 통해서건 말이다. 철학과 과학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지성의 역할은 이미 도구들을 제작하고, 주위의 물체들에 대한 우리 신체의 행동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과학은 지성의 이 작업을 훨씬 더 멀리까지 밀고나갔지만, 그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과학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물질의 지배자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학은 사변할 때조차 여전히 행동에 사로잡혀 있고, 과학 이론들의 가치는 언제나 그 이론들이 실재에 대해 얼마나 견고한 영향력을 우리에게 주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증과학과 실증과학의 도구인 지성에 신뢰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만일 지성이 물질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마도 지성의 구조는 물질의 구조를 본따 만들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가장 단순하고 그럴듯한 가설이다. 지성이 그 대상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고, 구성한다거나, 지성이 대상의 표면밖에 접촉하지 못한다거나, 대상의 외양밖에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가설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명을 위해서 원용되어 온 것은 철학이 빠져든 해결 불가능한 난점들과 지성이 사물들의 총체에 대해 사변할 때 빠질 수 있는 자기모순밖에 없었다. 기실 지성이 일부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우리가 그것을 전체에 대한 연구에 사용하려 한다면, 우리가 이러한 난점들과 모순들에 다다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말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지성의 기작과 우리 과학의 진보를 고찰하면서, 지성과 물질 사이에 실제로 대칭과 부합, 일치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사유와 운동』 2장]


(음악 계속)


반 레트 : 여러분께서는 지금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키스 자렛의 음악, 앙리 베르그손의 글, 프레데릭 보름스의 목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 프로그램은, 아니, 이번주 내내 우리는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인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는 조금 전에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사유와 운동』에 실린 마지막 글이 쓰인 해인 1923년을 상기하며 “베르그손이 프랑스 철학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두 번째 서론인 2장 중에 지성과 물질에 대한 내용을 짧게 발췌하여 들었습니다. 베르그손이 말한 내용의 새로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한다.” 이러한 말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이 어떤 것이길래, 오늘날 그렇게 회자되는 것일까요?


보름스 : 네.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방금 전에 들은 아주 아름다운 두 텍스트를, 우리가 방금 전에 들은 아주 아름다운 구절들을 연결해보려 합니다. 레비나스의 목소리는 당신이 조금 전에 언급한 주제 이상의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아 레비나스가 왜 파리에 왔을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고, 그 후에 그는 독일의 후설과 하이데거 곁에서 현상학을 공부하러 갔었죠. 그러고 나서 그는 파리로 오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을 말합니다. 그가 파리에 온 이유는 “파리가 베르그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파리, 그것은 베르그손이다.” 파리가 베르그손이라는 말은 실로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그것이 비판적인 몸짓과 주요한 성과를 이룬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이에 대해 말하지요. 이러한 비판적 몸짓은 실제로 생을 향해 돌아서 있는 우리 지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체계, 논리적 사유, 지성을 이용해서 실재를 포착하려는 철학의 이러한 바람을 비판하는 것이고, 실재의 한 부분은 이러한 체계에 저항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바로 시간입니다. 레비나스는 시간이 타자, 타자성, 근본적 타자성으로서의 근본적 변화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는 베르그손의 근본적 직관을 이어받아, 그 직관을 시간에서 윤리학으로, 시간에서 타자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베르그손에게서 매우 생생한 이러한 직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하나의 차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베르그손이 1923년에 중심적인 철학자인 동시에 중대한 반박에 맞닥뜨리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지요. 그것은 레비나스에게는 베르그손을 향한 아주 강력한 비판의 몸짓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생명적 존재들이며, 실재를 사유하기 위해 실재를 왜곡시킨다고 말하지요. 레비나스의 다른 스승인 하이데거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존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실천적 사유를 넘어서야 하고, 대상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이지요. 사물들을 대상으로, 기술적 대상으로 환원해서는 안되고, 존재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는 이러한 몸짓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아니 여겼던 것이지요. 하지만 레비나스는 다른 현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대한 베르그손의 사유를 비난합니다. 베르그손은 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에 대한 우리의 조망aspect, 실재에 대한 우리의 조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실재 자체를 떠나 존재를 향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반 레트 :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한다.”


보름스 : 네.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합니다. 사변한 후에도 마찬가지에요. 생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순수 사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의 첫 번째 의미는 실천적인 생이고, 이것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실재로 되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생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생, 구체적인 생, 세계 속에서의 행위들입니다. 그리고 이 생의 두 의미 가운데 어떤 것도 완전히 유죄판결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컨대 하이데거와 베르그손이 각기 서로 다른 기술철학을 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움직이려 하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사유의, 지성의, 기술의 특정 측면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유 전체임을 참칭한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자체의 질서 속에서라면,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기술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손은 기술의 “열린” 용법, 평화로운 용법, 박애적인bienfaiteur 용법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의학처럼 말이지요.


반 레트 : 지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설명에는..


보름스 : 반면 현상학자들에게는..


반 레트 : 실용주의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이군요.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보름스 : 맞습니다. 실용주의적.


반 레트 : 당신은 지성에 대해 말하면서 기술에 대해 말하니까요. 그건 행동하는 것이지요.


보름스 : 지성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함축합니다. 우리가 지성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목적으로 우리를 왜곡시키는 사유를 통해 모든 것을 사유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왜곡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성이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는 경우에는 지성을 비판해야 하지만, 지성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와의 큰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베르그손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그것을 급진화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이 지성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고 그를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한계짓는다는 것입니다. 기술과 지성의 능력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전적으로 비합법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의 고유한 질서 속에서 그것들은 참된 것입니다. 수학은 참된 것, 참된 사유 자체입니다. 베르그손은 이 지점에 대한 입장을 진전시키지요. 『사유와 운동』이라는 모음집의 순서가 이 진전을 보여줍니다.


반 레트 : 또 다른 오해가 존재합니다. 사실 당신이 베르그손 사유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을 했을 때, 그것은 베르그손이 상대주의자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지성이 본질을 포착할 수 없으니까요. 즉 사실 우리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으며, 관점의 수만큼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처럼요.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군요. 실제로는 베르그손은 지성의 자리를, 아니, 진리의 자리를 지성에서 특정한 형태의 직관 쪽으로 옮겨놓는 것이니까요. 그는 상대주의자는 절대 아니군요.


보름스 : 베르그손은 절대 상대주의자가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칸트처럼 인간 정신이 우리를 실재로부터 분리시키는 필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와는 달리 베르그손에게 이 필터는 감각이 아니라 행동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의 필터를 통해 실재를 왜곡합니다. 하지만 이 필터가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필터를 의식하고, 이 필터로부터 벗어난 직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즉 실재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상대주의자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아주 잘 말했듯이, 행동은 비실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 자체는 실재로부터 무언가를 포착합니다. 공간은 시간과 관련하여서는 우리를 기만하지만, 그럼에도 우주의 실재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물질의 실재성에 대해 말이지요. 따라서 베르그손은 두 배로 실재론자입니다. 지성은 수학과 과학을 통해서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합니다. 하지만 직관은 시간을 통해, 그리고 음.. 직관을 통해 실재의 다른 부분을 포착합니다.


반 레트 : 첫 번째 글의 첫 번째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철학의 체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에 알맞게 재단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에 비해 너무 크다. 그것들 중에 적절하게 선택된 이러저러한 것들을 검토해보자. 여러분은 그 체계가 다음과 같은 세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없는 세계,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인간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잠도 자지 않고, 꿈꾸지도 않으며, 횡설수설하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젖먹이로 죽는 세계, 에너지가 하락dégradation의 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세계,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되고 반대로 일어나는 세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참된 체계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따라서 너무나도 광범위한 설명conception들의 총체여서, 거기에는 실재적인 것 이외에도 가능한 모든 것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는 이 첫 번째 구절에서 베르그손이 자신의 체계 속에 그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시키려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베르그손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생이라고,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철학적 체계에 살chair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런 살이 없다면 체계는 너무 추상적인 것이 되겠죠.


보름스 : 맞습니다. 생을 포함시키기. 시간을 포함시키기.. 이 모든 사례들에서 우리가 언제나 시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 우리가 언제나 생명체들, 동물들, 인간들이 과거에 출현하여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를, 에너지가, 즉 열역학적 에너지의 하락이 언제나 우주적 에너지의 상실, 혹은 오늘날 기후 온난화라고 불리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세계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잘 파악하신 것 같습니다. 기술이 악화시키는 우주적 에너지는 실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흘러가는 시간, 즉 파괴건 창조건 간에 결과를 낳는 시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요점은 또한 지성을 자승자박에 빠뜨리는 것이고, 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실, 과학은 무엇을 원합니까? 논리적 사유는요? 그것은 실재를 인식하기를, 실재를 포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자신들의 도구에 이끌려--한 번 더 말하건대 이 도구는 필요한 것입니다. 수학적 개념, 언어와 같은 것 말이지요--실재의 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베르그손은 과학에게, 직관을 가지고 과학을 보완하겠다고, 직관이 과학이 놓쳐버린 측면, 놓쳐버린 실재의 측면을 붙잡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해진다는 것은 수학적 인식과 같은 영역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수학적인 질서 속에는 수학적 정확성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그 말은 곧 과학이 철학을 배제하지 않으리라는 말이군요.


보름스 : 그렇지요. 과학과 철학은 동일한 전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실재를, 총괄적 실재를 그것이 가진 두 측면에 따라 포착하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총괄적” 경험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과학은 철학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오류는 단지... 음 베르그손은 정신의 분할, 경험의 분할을 받아들입니다. 베르그손이 하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려 하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니까요. 베르그손 철학은 종합의 철학은 아닙니다.


반 레트 : 그렇군요.


보름스 : 헤겔적으로는, 사람들은 직관과 지성이 있으니 세 번째 항이 이 둘을 화해시킬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할 속에 존재하며, 사실 그것은 우리 인간적 존재자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르그손에게서 언제나 분할을 발견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의 마지막 주저는 『두 원천』이라고 불립니다. 궁극적인 분할은 닫힘과 열림...


반 레트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말이군요.


보름스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이원성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그러니까 분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끝까지 유지됩니다. 이 분할은 부분적으로[만]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역할은 두 측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는 직관과 지성의 측면에서 각기 두 끝지점을 붙잡아야 합니다. 두 전선에 위치해서 두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반 레트 : 제가 앞서 읽은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실재와의 첫 만남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추상적인 철학적 체계에 틀어박히지 않고서 말이죠. 이게 바로 베르그손이 그의 모든 텍스트들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사유와 운동』의 두 서론 격의 텍스트들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베르그손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 보이는 사례들을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이 사례들이 매번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본질적인 지점을 향해 아주 똑바로 나아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췌문을 함께 들어봅시다. 프레데릭 보름스. 베르그손이 “주황”이라고 부르는 사례입니다. 그러니까 주황색 말이지요. 주황을 대면할 때, 빨강과 노랑의 혼합을 생각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이것을 “참의 역행 운동의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우선 발췌문을 듣고, 그 다음에 이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죠.


클래스 : “주황과 같은 하나의 색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주황색 말고도 빨간색과 노란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황색을 어떤 관점에서는 노랗고 다른 관점에서는 빨간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노랑과 빨강의 혼합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황색이 그것이 지금 그러한 바대로 존재하는 반면, 노란색도 빨간색도 아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주황색은 이미 이 두 색들의 혼합물일 것인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신경적이고 대뇌적인 전체 메커니즘과 동시에 의식의 특정한 배치들을 함축하는 빨간색의 감각과 노란색의 감각은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생의 창조물들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행성에도 다른 어떤 행성에도 이 두 감각들을 경험하는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황의 감각은 단순한 감각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은 결코 구성요소나 측면들로서 형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안다. ...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회고rétrospection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행적 실재성을 가능성이나 잠재성의 상태로 과거 속으로 되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보기에 지금 혼합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 ...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포기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장하고,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을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진화가 창조적인 [형태를 띠는] 지속에 적용시켜야 한다.”[『사유와 운동』 1장]


(음악 : Keith Jarrett, Encore from Nagoya(1976))


반 레트 : 10시 26분,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프레데릭 보름스와 함께 베르그손의 출간된 마지막 저서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배우 조르주 클래스는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하자마자 우리는 이렇게 혼잣말한다. 이건 원래 존재하던 것인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것인가? 우리가 주황색을 볼 때 우리는 맞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주황이 오래 전에 빨강과 노랑의 혼합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안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이것은 보는 순간에 우리가 창조해낸 것이다. 매우 기묘한 일이다.”


보름스 : 그렇습니다. 사실, 이 아주 아름다운 사례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하던 내용을 아주 잘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와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실재와의 이 두 번째 관계,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이어야 할 관계가 첫 번째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지요. 우선성의 역전, 가치의 역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태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주황에 대한 경험, 음악에 대한 경험, 인간의 행동, 고통이나 쾌락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실재와 맺는 첫 번째 관계입니다. 베르그손의 말을 따르자면, 단순한 경험이죠. 모든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합니다. 즉, 질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순간에 대한, 이 대화에 대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실재와 두 번째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도 물론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첫 번째 관계의 지위를 찬탈하고, 첫 번째 관계를 지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로 대체해버립니다. 주황에 대한 경험은 여기서 훌륭한 사례입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주황은 다른 색과 마찬가지의 색깔, 단순한 색깔이지만, 지성과 인간의 분석은 정의상 외려 혼합물을 봅니다. 이 경우에는 빨강과 노랑의 혼합물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빨강과 노랑을 혼합함으로써 주황을 생산하고, 분석하고,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은 나름의 필요성과 진리의 몫을 가지고 있는 이 두 번째 관점이 첫 번째 관점과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 주황은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이 주황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면 실수하는 겁니다. 사실 그것은 주황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빨강과 노랑의 경험입니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물리학자를 상상해볼 수 있겠죠. “아니, 색깔에 대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아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색깔이 없는 원자들입니다. 우주의 순수 물질입니다. 데카르트에서처럼 질 없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색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행동까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은 당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걸 선택한 이유는 사실 당신이”


반 레트, 보름스(함께) :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보름스 : “사회적 원인에 의해, 심리적 원인에 의해, 이런 원인에 의해, 저런 원인에 의해...” 사실은 부차적인 이 분석적인 관점은 최초의 직관을 잠식하여 그것을 부인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베르그손은 이 두 번째 관점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심지어는..


반 레트 : 과학적 관점 말이지요? 결정론적인 관점.


보름스 : 과학적인 것이죠. 이 관점은 실재를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관점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이 관점이 지나치게 되면, 이 관점이 그에 선행하는 단순한 경험을 취소한다면, 취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 됩니다. 베르그손이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마지막 저서에서 자신의 내적 흐름을 설명하려 할 때 베르그손은 고의적으로 이러한 회고 속으로 진입하지만, 그것은 절대 그의 저작의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베르그손 자신도 이 점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그의 네 주저,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그리고 그가 출간하기 전에 쓰고 있던 원고였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회고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베르그손은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을 연역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각각의 저서는 불가분적인 새로운 놀라움이었다고, 새로움의 분출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회고적으로만 『물질과 기억』은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의 문제들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둥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두 관점이 필요합니다.


반 레트 : 네. 그리고 선형적인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뒤를 바라보고 회고적인 약동을 채택하는 운동이 환상이 되는 것이군요. 이게 베르그손이 “참의 역행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주황을 보고, 주황색의 무언가를 보면서, 그것이 전에는 빨강과 노랑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회고적인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고, 참의 역행운동인 것이군요. 그래서 그건, 환상까진 아니지만, 내가 보는 실재를 완전히 다 설명하는 건 아닌 것이구요.


보름스 : 정확합니다. 단지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한다고 믿을 때에만 그것은 환상이 됩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요? 베르그손이 여기서 색깔들이 감각이라고, 빨강의 감각과 노랑의 감각은 생의 창조물들이라고 말할 때 말입니다. 독단적 합리론까지는 가지 않는다 해도, 논리법칙에 따라 기능하는 다소간의 합리론적인 정신이 보기에는, 음.. 여기서 출발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색깔들이 단지 감각이기만 하다면, [이성이] 닦아서 윤을 낼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보름스 : “생의 감각들”은 극도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내용과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색깔이라는 것이 베르그손은 감성적 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실재의 한 부분과 뇌의 만남이라는 것이죠. 인간의 뇌는 실재를 절단하고, 거기서 실재의 파장이 나타내는 바를 지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빨강을, 노랑을 지각하지만, 적외선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특정 색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은 그것을 이성이 전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학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진화가 이러한 감각을 가능케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각은 절대적으로 질적인 무언가, 선험적으로 구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감각의 관념을, 이건 거대한 철학적 문제인데요.


반 레트 : 네.


보름스 : 당신은 맹인에게 색깔의 관념을, 귀머거리에게 소리의 관념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인 무언가, 환원불가능한 무언가,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이고, 우리의 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만큼의 빨강의 감각을 체험했다 해도, 새로운 빨강을 마주하게 되면... 베르그손은 위대한 화가가 창조해 낸 녹색에 대해 말하는데요. 그러한 녹색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실 녹색“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학생의 녹색과 컨스터블의 녹색이 있습니다. 컨스터블의 이 녹색은 컨스터블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녹색을 녹색 일반으로 환원합니다. 이와 동시에 인간 사유의 역할은 각각의 단독적인 녹색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어떻게 하나요? 특히 우리가 철학자라면 말예요. 어떻게, 어떻게요? 철학이 우리 실존의 이 부분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단독적이고 절대적으로 공유 불가능한 부분, 직관과 감각의 소관인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문학이나 시의 영역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철학이 이 부분을 다시 포착할 수 있을까요?


보름스 : 음. 우선은 비판적 작업을 통해서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베르그손은 직관의 철학자이지만 그의 저작에서는 많은 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문제는 음... 하나의 직관에서 출발하여 문제로서 포착됩니다. 예컨대 시간의 직관은 그게 아니라고, 그것만일 리 없다고, 그건 공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부입니다. 직관은 우선 하나의 거부입니다. 베르그손은 꼴레주 드 프랑스의 학생들, 그러니까 그의 말을 들으러 온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말한 단 하나의 내용은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거부입니다. 정확한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방식으로 시험된 이 거부 이후에야, 우리는 예컨대 생이 하나의 약동이라는 것을, 베르그손의 그 유명한 생의 약동말이지요, 그리고 순수한 도덕은 열린 도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건 베르그손의 아주 정확한 주장이지요. 이걸 은유로 환원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반 레트 : 그것 때문에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건데요. 베르그손의 비방자를 통해 베르그손을 옹호해야 하는 건가요?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하죠. “봐라. 베르그손은 정신주의적인, 시적인, 혹은 계시적인 약동 속에 있는 것 아니냐.”


보름스 :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정합적으로 이야기하고, 사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사유의 작업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거부를 통해 사유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의 표지를 지니게 되는 직관은, 사유의 “증가surcroît”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저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베르그손에서는 경험을 경험하기 위해 사유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를 사유로부터 떨어뜨리는 사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비판이 필요합니다. 비판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예컨대, 왜 생을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들의 체계로는 충분치 않을까요? 이 체계를 벗어나는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비판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단순히 직관주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지성주의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점을 모든 형태의 철학적 몸짓을 벗어나는 차원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이군요. 그런데 베르그손은 이 철학적 몸짓을 극도로 엄밀한 방식으로 재정의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거구요. 제가 첫 번째 글을 읽었었죠.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베르그손에게는 철학의 몸짓 자체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그의 사유 속에서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름스 :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이 남긴 예기치 못한 유산들 가운데, 『사유와 운동』이라는 책은 그의 철학적 유작인 동시에 예기치 못한 모음집입니다. 이 모음집은 일곱 편의 철학 논문들을 시간적이지 않은 순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책, 시간에 대한 사유인 것 치고는 기묘한 일이죠. 베르그손은 자신의 논문들을 저자의 입장에서 회고적인 방식으로 배치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또한 세 편의 철학적 오마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클로드 베르나르, 윌리엄 제임스, 펠릭스 라베송에 대한 오마주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읽어야 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이 책은 또한 철학사, 특히 프랑스 철학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레비나스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장켈레비치를 언급할 수도 있겠지요. 그의 이름은 예상가능하지요. 그는 베르그손주의의 투사였으니까요. 베르그손주의는...


반 레트 :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손주의에 대해 뛰어난 책을 한 권 썼지요. 베르그손의 사유에 대해서요.


보름스 : 맞아요. 아 동시에 그는 비판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죠. 베르그손이 말하듯, 모든 독창적인 계승자가 그런 것처럼 말예요. 이런 사람들은 계승하면서 창조를 행하고, 또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죠. 이러한 계보 속에 아주 뜻밖의 이름이 존재합니다. 그건 조르주 깡길렘입니다. 그는 베르그손 이래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생철학자이자 의철학자이고, 1952년에 『생의 인식』이라는 모음집을 출간합니다. 이 모음집의 서문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반 레트 : 모르겠습니다.


보름스 : 베르그손에게 응답하는 서문이죠. 깡길렘은 이 모음집의 서문의 제목을 “사유와 생명체la Pensée et le vivant”라고 달았습니다. 이건 분명히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에 대한 오마주죠. 하지만 다소 비판적인 오마주요. 깡길렘의 말을 한 구절 인용해보죠. “사람들은 인식과 생 사이에서 근본적인 갈등 중에 있는 실존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 우리는 수정과도 같은 지성주의, 즉 투명하고 타성적인 지성주의와 선명하지 못한 신비주의, 즉 능동적인 동시에 혼란스러운 신비주의만을 선택지로 갖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깡길렘이 베르그손을 이 선명하지 못한 신비주의 쪽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깡길렘은 베르그손이 추상적 지성주의의 비판자이기만 한 것도, 선명하지 못한 직관의 옹호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지요. 사실 이들은 생명체를 생명체의 실재적인 사유 속에서 이해하는 동시에, 생명체의 자유로운 직관 속에서, 주관적인 단독성 속에서, 생명체의 역사적 창조 속에서 이해하려 했던 두 사상가들입니다.


반 레트 : 이제 두 번째 서론의 결론 부분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가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서론 격의 논문들이니까요. 이 모음집의 이후 상황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음... 우리가 들을 것은 마지막 문단입니다. 이건... 조금 더 자전적이고, 마지막 문장은... 아, 미리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르주 클래스가 읽어주는 것을 들어보시죠. 마지막 문장은... 꽤나 장엄하고, 어쩌면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이러니하달까, 어쨌든 조금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내용을 베르그손 자신이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럼 이 마지막 구절을 들어보시죠. 제 생각으로는, 프레데릭 보름스, 당신이 방송 시작부터 말했던 것들이 우리가 이 텍스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 같습니다.


(음악 : Keith Jarrett, It’s all in the game)


클래스 : “내적 생 속에서 일차적인 경험의 장을 발견하고 말뿐인verbales 해결책들을 거부했던 날, 우리는 진정한 철학적인 방법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후의 모든 진전은 이 장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어떤 결론을 논리적으로 확장하여 실제로는 탐구 영역을 확장시키지 않고 이 결론을 다른 대상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인간 정신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철학이 순수 변증론일 때, 즉 철학이 언어 속에 저장된 기초적인 인식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행할 때, 철학은 소박하게 이러한 경향에 빠져든다. 철학이 몇몇 사실들에서 도출해 낸 몇몇 결론들을 다른 사물들에도 적용가능한 ‘일반 원리’로 여길 때, 철학은 이러한 시도를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철학하는 방식에 대한 대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몇몇 중요한 문제들을 한켠에 치워두어야만 했다. 우리의 이전 저작들의 결과들을 이 문제들로 연장시킴으로써 쉽게 응답이 이루어졌다는 환상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그 자체로, 그것에 대해서만 해결할 시간과 힘이 허락될 때에만 이 문제에 응답할 것이다. 그러한 시간과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방법이 우리가 보기에는 몇몇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해답으로 여겨지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 이상을 끌어낼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922년 1월.”


반 레트 :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0시 39분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를 빌린 베르그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프레데릭 보름스, 베르그손이 이 문장을 쓸 때에는, 그는 그의 새 책에 실을 서론을 끝마친 상태란 말이죠.


보름스 : 그는 여기서 그의 새 책, 우리가 이 문장을 읽는 책의 서론을 끝마쳤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출간된 책, 도덕과 종교에 대한 그의 책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첫 번째 책, 1889년의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 이후 거의 50년간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나왔습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1932년이구요. 베르그손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이게 바로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이 두 서론 격의 텍스트의 탐구대상입니다. 1889년에, 그러니까 그가 30세일 때, 베르그손은 가장 위대한 철학책 중 하나를 쓴 가장 젊은 저자였습니다. 그건... 눈부신 공적이지요. 이 책은 자유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지속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으로 긍정되고 경험적으로 증명된 이 자유로부터, 베르그손은 윤리학을 도출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윤리학을 요청했지요. 심지어 사람들은 베르그손을 대신해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냈습니다. 베르그손의 제자들이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냈습니다. 40년동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실로... 온갖 종류의 윤리학이 다 있었습니다. 비합리주의적인 윤리학, 이탈리아의 미래파 윤리학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의 약동이 전쟁이고 전투라고 말했지요. 조르주 소렐은 총파업을 베르그손적 윤리로 세웁니다. 반대로 전통적인 윤리학도 있습니다. 자크 슈발리에는 베르그손의 윤리학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직관이라고 말합니다. 칸트의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영원한 윤리가 있다고 말이지요. 모리스 바레스도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비합리주의들. 극우, 극좌의 비합리주의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반 레트 : 네.


보름스 : 이들에게 베르그손은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 자체였지요. 그렇기에 프랑수아 아주이는 『베르그손의 영광』에서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그에 대한 외적인 독해들로 환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해석은 큰 오류이지만요. 그러니까 베르그손을 대신하여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낸 베르그손주의자들이 존재했습니다. 1922년에 베르그손이 위의 구절을 썼을 때, 그는 도덕에 대한 책을 쓰는 중이었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죠. 당신도 이 멋진 구절에 주목했듯이, 생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면 그 책을 완성할 수도 있겠죠. 즉, 그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는 류머티즘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그는 당대의 유네스코가 세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반 레트 : 국제 연맹 말이군요.


보름스 : 네. 국제 연맹의 국제 지식인 협력 위원회죠. 그는 업무가 과중하여 도덕에 대한 그의 책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45년 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이 책을 요구하고, 그를 대신해 이 책을 써냈습니다. 베르그손은 “할 수 있으면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922년 1월.”


반 레트 : 네.


보름스 : 조르주 클래스가 멋지게 읽어주었지요.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출간되었지만, 그는 1922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 그가 그의 윤리학을 쓰기 위해 말하자면 “절어 있었기ramer” 때문이지요. 점잖지 못한 표현 죄송합니다. 결국 그는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 책은 193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이 예상하던 윤리학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합리주의적 윤리학을 기대했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의 윤리학을 기대했고요. 베르그손의 윤리학은 열림과 닫힘의 구분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단순히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합니다. 이 유한성이 전쟁을 낳습니다. 생의 한계는 우리 안에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창조의 잔여물이 있습니다. 인간에서 이것은 열린 도덕을 통해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우리를 위하는 도덕이 아니라, 음... 논리적으로 모두를 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도덕은 보편적 논리가 아닙니다. 그건 이 닫힘에 저항하는 것, 평화를 위해 전쟁과 싸우는 것, 이것이 언제나 베르그손의 “신비주의”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위대한 신비주의자만이 이 열린 도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니까요. 중요한 점은...


반 레트 : 그러니까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신비주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군요.


보름스 : 신비주의는 도덕의 기준에 정초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전쟁의 숙명에서 해방시키는 개인들이, 위대한 선인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전쟁의 숙명은 언제나 되돌아올겁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종자가 심어지고,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전쟁에 언제나 다시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열림과 닫힘의 이 싸움 속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열린 사회 개념은, 당신도 알다시피 오늘날 프랑스에서 상당히 많이 통용되는 개념이지요. 이 개념은 베르그손이 발명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손은 많은 주화들을 찍어냈고, 이 주화들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합니다. 호모 파베르, 생의 약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사회와 같은 개념들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사실 이 윤리가 이전의 저서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회고적인 환상이 존재합니다. 열린 사회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이죠. 그건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의 자유 개념 속에 존재하던 거였어요. 그건 거기 있던 것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연역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베르그손주의자들은 다른 윤리학을 연역해냈던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윤리학이요. 이 점이 이 모음집의 탐구대상을 이루는 베르그손의 방법론적인 주장을 잘 증명해줍니다. “참의 역행 운동”말입니다. 진리가 생겨나고 나면, 그것은 소급하여 과거로 던져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부분의 환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환상이 연역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류로, 즉 제자들의 오류로 이어졌습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보름스 : 닫힌 베르그손주의의 오류죠.


반 레트 : 맞아요, 하지만 ...


보름스 : 열린 베르그손주의가 필요합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보름스 : 그건 장켈레비치가 연역해낸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저희가 이번 주 화, 수, 목요일에 당신의 동료들과 읽게 될 이 모음집의 다른 논문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지 않은 것인가요?


보름스 : 맞습니다. 그 배열은 시간순으로 되어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시간적인 배열이 그 자체만으로 연역적인 작업을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역설적으로 실재적인 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새로움 속에 있음을, 그리고 이 새로움이 회고적으로 과거를 밝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죠. 그건 베르그손 자신의 입장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죠. 예컨대... 아마 당신은 다음 번 대화들 중에 이 내용을 다루게 될 텐데요, 실재 속에서 지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요. 1903년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을 출간합니다. 이 논문은 이 책의 다섯 번째 논문인데, 베르그손은 거기서...


반 레트 : 여섯 번째 논문이요.


보름스 : 여섯 번째 논문이군요. 서론이 두 개의 장이니까요.


반 레트 : 맞아요.


보름스 : 베르그손은 거기서 직관은 실재를 포착하지만, 지성은 단지 허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밖에 붙잡지 못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1907년 『창조적 진화』 이후 상황은 변합니다. 공간도 실재의 일부분, 즉 물질이고, 지성은 우리가 앞서 말한대로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합니다. 그러니까 한편에는 시간적 실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공간적 허구가 있지만, 실재와 공간, 아니, 시간과 공간은 실재성 자체의 두 측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은 변해서, 이중적인 실재론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자신이 변화했다는 점을 알려주려 하는데요.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텍스트에서 몇몇 주석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주석들은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더 이상 1903년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 말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1922년의 주장들을 1903년의 주장들에서 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903년의 주장들을 수록한 이유는, 직관의 핵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근본적인 관념은, 당신은 시간에 대한 이 구절을 좋아했지요, 나는 하나의 관념만을 갖고 있다. 그 관념은 문제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낳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하나의 관념이다. 그리고 직관은 하나의 추동력이다.


반 레트 : “그것은 단순한 것, 너무 단순하고 극도로 단순하여 철학자들이 결코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철학자는 평생 동안 그것을 말해왔던 것이다.” 형이상학적 번역이 없는 중심점. 베르그손은 모든 것을 이 단순한 지점에 결부시키지요. 그것은 완전히 불가피한 것입니다.


보름스 : 맞습니다. 아니면 다른... 다른 멋진 구절이 둘 있지요. “형이상학적 직관은 우리 인식의 요약 혹은 종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운동적 추동력이 운동체가 주파한 길과 구분되듯, 혹은 태엽의 수축이 시계추의 가시적 운동과는 구분되듯, 요약 혹은 종합과 구분된다.” 다른 구절은, “접근 불가능한 이 힘의 중심이 우리에게 약동을 주는 추동력을 전해준다.” 약동, 그러니까 직관 자체죠. 이건 은유가 아닙니다. 직관이 바로 추동력입니다. 직관이 바로 힘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생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창조적 힘이요.


반 레트 : 시간이 흘러흘러갑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속하기 때문이지요.


(음악 : Les soeurs Etiennes, Que le temps me dure)


반 레트 : “나에게 시간이 지속하다니.” 베르그손적인 이 마지막 노래는 에티엔 자매의 노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데릭 보름스.


보름스 : 감사합니다, 아델. 


반 레트 : 오늘 방문해서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데 대해, 그리고 베르그손의 저작을 위해 수고스러운 시간을 가져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프레데릭 보름스는 출간 당시 “베르그손 쇼크”라는 제목이 붙은 베르그손의 첫 번째 비평판의 엮은이입니다. 이 저작들은 그 후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 저작들은 절찬 판매중이며, 이번 주에 함께 읽을 『사유와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우리는 아르노 프랑수아와 함께 「가능과 실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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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장croissance : 참의 역행 운동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철학의 체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에 알맞게 재단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에 비해 너무 크다. 그것들 중에 적절하게 선택된 이러저러한 것들을 검토해보자. 여러분은 그 체계가 다음과 같은 세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없는 세계,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인간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잠도 자지 않고, 꿈꾸지도 않으며, 횡설수설하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젖먹이로 죽는 세계, 에너지가 하락dégradation의 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세계,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되고 반대로 일어나는 세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참된 체계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따라서 너무나도 광범위한 설명conception들의 총체여서, 거기에는 실재적인 것 이외에도 가능한 모든 것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충분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설명은 그 대상에 밀착되어 있는 설명이다. 그것들[설명과 대상] 사이에는 어떤 공백도 없고, 다른 설명이 머물 수 있을법한 틈도 없다. 그 설명은 그 대상에만 적합하고, 그 대상은 그 설명에만 알맞은 것이다. 과학적 설명은 이런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절대적 정확성과 완전한 혹은 점증하는 명증성을 포함한다. 철학적 이론들에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전에는 하나의 학설이 우리에게 예외인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젊었을 때 그 학설에 이끌렸던 것 같다. 스펜서의 철학은 사물들의 본을 뜨고 세부적인 사실들을 모델로 삼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모호한 일반성들 속에서 그 받침점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제 1원리』의 결함을 직감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결함은 저자가 불충분한 준비로 인해 역학의 “최신 관념들”을 깊이 탐구할 수 없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그의 저작의 이 부분을 손질해서 그것을 완성시키고 공고히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힘이 닿는 한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의 관념 앞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실로 우리는 진화에 대한 모든 철학 속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실재적 시간이 어떻게 수학에서 빠져나가는지를 알아채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시간의 본질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이 현전할 때는 아직 거기에 있지 않다. 따라서 측정을 목적으로 한 부분과 부분의 중첩은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물론 모든 측정 속에는 협약적인 요소가 개입하며, 동등하다고 말해진 두 크기가 직접적으로 포개지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그 크기들로부터 무언가를 보존하는 그것들의 측면들 혹은 효과들 중 하나에 대한 중첩은 가능해야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측정하는 것은 이 효과, 이 측면이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 중첩의 관념은 부조리를 함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에 대해 중첩 가능하고, 따라서 측정 가능할 지속의 모든 효과는 지속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이래로 우리는 지속이 운동체의 궤적trajectoire을 통해 측정되며, 수학적 시간은 하나의 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작업이 우리가 재고자 하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의 측면이나 효과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재고자 하는 것을 배제하는 무언가 위에서 수행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측정 작업들과 근본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다. 우리가 재는 선은 부동의 것이고, 시간은 운동성이다. 선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심지어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의 측정은 결코 지속인 한에서의 지속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는 것은 단지 간격의 극단들의 수, 즉 순간들의 수, 요컨대 시간의 잠재적 정지점들의 수일뿐이다. 한 사건이 시간 t가 지난 후에 발생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지금부터 그때까지 특정한 유의 동시성들을 t번 셀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동시성들 사이에서는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이다. 시간은 극도로, 심지어 무한하게 가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에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뇌 내부의 운동들과는 연대적이지 않은 의식이다)의 견지에서는 차이가 심할 것이다. 어느 하루에서 다음 날로의 기다림, 어느 한 시간에서 다음 시간으로의 기다림은 의식에 대해 더 이상 동일한 피로를 주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특정한 기다림과 그것의 외적 원인을 고려할 수 없다. 과학이 지나가는 시간 혹은 지나갈 시간을 대상으로 할 때, 과학은 그것을 마치 이미 지나간 것인 양 다룬다. 게다가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학의 역할은 예측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세계로부터 반복될 수 있고 계산될 수 있는 것, 따라서 지속하지 않는 것만을 추출해서 붙잡아둔다. 이렇게 해서 과학이 하는 일이라곤 단지 상식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불과하며, 상식은 과학의 출발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지속의 측정치를 사유하는 것이지, 지속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제거해버렸으며, 개념화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이 지속이야말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속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속을 보려하되 측정하지 않으며, 그렇게 시간을 포착하지만 정지시키지는 않고, 결국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관객과 배우, 자발적인 것과 반성된 것을 일치시킬 때까지 고정되어 있는 주의attention와 흘러가는 시간을 서로 접근시킬 의식에게 지속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이러한 것이 [우리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우리가 그때까지는 관심이 없었던 내적 삶의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정신에 대한 연합주의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알아차렸다. 그 당시 대다수의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공유하던 이러한 설명은 의식적 삶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였다. 선입견이 끼어들지 않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시각은 무엇을 제공해줄 것인가? 기나긴 일련의 반성과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이 편견들을 하나씩 배제하고, 우리가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많은 관념들을 폐기하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내적 지속, 단일성도 아니고 다수성도 아니며 우리가 가진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연속성을 발견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실증 과학이 이러한 지속에 무관심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것은 없다. 아마도 실증 과학의 기능은 정확히 행동의 편의를 위해 시간의 효과들을 감추어 둘 수 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구성해주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를 그 운동성, 진전, 내적 성숙 속에서 쫓도록 만들어진 스펜서의 철학, 진화의 학설이 어떻게 변화 자체에 대해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인가?

후에 이 질문은 우리를 실재적 시간을 고려함으로써 생명의 진화의 문제를 손질하는 작업으로 이끌었다. 그 때 우리는 스펜서적인 “진화론”이 거의 완전히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지속의 시각이었다. 여러 체계들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철학자들이 지속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철학사 전반에 걸쳐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지위에 놓였고, 동일한 유의 사물들로서 다루어졌다. 그 때 사람들은 공간을 연구하고, 공간의 본성과 기능을 규정한 뒤에, 획득된 결론들을 시간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간에 대한 이론과 시간에 대한 이론은 서로 짝을 이루게 되었다. 어느 한 이론에서 다른 이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지 한 단어만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병렬”이라는 말을 “잇따름”이라는 말로 대체시켰다. 사람들은 실재적 지속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멀어졌다. 왜 그런 것인가? 과학은 그렇게 할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에 선행하는 형이상학은 동일한 이유들을 갖지도 않은 채로 이미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여러 학설들을 검토하면서, 우리에게는 언어가 여기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지속은 언제나 연장으로 표현된다. 시간을 지시하는 항들은 공간의 언어에서 빌려온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떠올릴 때,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공간이다. 형이상학은 언어의 습관들에 순응해야 했으며, 또 언어는 그 스스로 상식의 습관들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과학과 상식이 여기서 의견을 같이 한다면, 만일 지성이 자발적이건 반성된 것이건 실재적 시간을 배제한다면, 이것은 우리 오성의 목적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인간 오성의 구조를 연구하면서 포착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오성의 기능들 중 하나는 정확히 운동 속에서이건 변화 속에서이건 지속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운동인가? 지성은 운동으로부터 단지 일련의 위치들만을 붙잡는다. 먼저 한 점을 붙잡고, 그러고 나서 다른 점,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점. 이 점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오성에 반박할 것인가? 재빨리 오성은 새로운 위치들을 삽입할 것이고, 이 작업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오성은 변이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운동을 볼 것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고려되는 위치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좁아지는 간격들 속으로 운동성을 떠밀어 운동성이 무한히 작은 것으로 줄어들고, 약해지고, 사라지게 만들 준비를 한다. 만일 우리의 지성이 무엇보다도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하고 조명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면, 이보다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우리의 행동은 고정된 점들에 대해서만 편안하게 행사된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고정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운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운동체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운동체가 어디를 지나갔는지를 묻는다. 설령 그것이 이행의 순간에 주목한다 해도, 그래서 그것이 지속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때 그것은 지성이 고려하는 운동체의 정지와 그 [움직임의] 경로course가 시간의 경로라고 부당하게 간주된 다른 운동체의 정지라는 두 잠재적 정지들의 동시성을 확인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지성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건 가능적인 것이건 간에 언제나 부동성들이다. 운동을 일련의 위치들로서 묘사하는 운동에 대한 이러한 지성적 표상을 뛰어넘어보자. 운동을 향해 곧장 나아가 개념을 개입시키지 말고 운동을 직시해보자. 우리는 운동이 단순하며 한 덩어리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보자. 그 운동이 이론의 여지없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이 운동들 가운데 하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운동과 일치하도록 해 보자. 이 경우 우리는 운동성을 그 본질에 있어서 포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불가분적 연속성으로서의 지속을 갖는 어떤 노력과 뒤섞인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공간이 주파될 것이기 때문에, 도처에서 고정성을 찾는 우리의 지성은 사후에 (마치 운동을 부동성과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양) 운동이 이 공간 위에 덧붙여지며, 운동체는 그것이 주파하는 선 위의 각각의 점에 차례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기껏해야 우리는 만일 운동체가 더 일찍 멈추었더라면, 만일 우리가 더 짧은 운동을 목적으로 완전히 다른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운동체가 거기에 존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운동 속에서 일련의 위치들만을 보게 되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 그 때 그 운동의 지속은 각각의 위치들에 상응하는 “순간들”로 분해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간들과 운동체의 위치들은 운동과 지속의 연속성 위에서 우리의 오성이 취한 순간성들에 불과하다. 이 병렬된 상vue들을 통해 사람들은 언어의 요구들에 복종하고, 결국에는 계산의 요구들에 복종하는 시간과 운동의 실천적인 대용품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위적인 재구성일 뿐이다. 시간과 운동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변화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 오성은 변화를 불변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간주된 잇따르고 구분된 사태들로 분해한다. 이 각각의 상태들을 더 가까이서 고려하고, 그것들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그것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물을 것인가? 재빨리 오성은 그 상태를 더 짧은 일련의 상태들로 대체한다. 이 더 짧은 상태들은 필요한 경우 또다시 분해될 것이고, 이 작업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지속의 본질은 흐르는 것이고, 안정적인 것과 안정적인 것을 연결하는 것으로는 결코 지속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왜 보지 못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실재적인 것은 변화를 따라 우리가 취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상태들”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흐름이며, 변이의 연속성이고, 변화 자체이다. 이 변화는 불가분적이고, 그것은 심지어 실체적이기까지하다. 만일 우리의 지성이 고집스럽게 그것을 근거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지지물을 덧붙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성이 그것을 일련의 병렬된 상태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수성은 인위적인 것이며, 거기에 다시 세워진 통일성도 역시 인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단지 변화, 끝없이 뻗어나가는 지속 속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에 밀착해 있는 변화의 끊임없는 충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찰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수많은 의심과 동시에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형이상학의 문제들이 아마도 잘못 제기되어 왔다고, 그러나 정확히 이런 이유로 그것들이 “영원하다”고, 즉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형이상학은 엘레아의 제논이 우리의 지성이 생각하는 대로의 운동과 변화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지적했던 날 시작되었다. 고대와 근대 철학자들의 주요한 노력은 운동과 변화에 대한 지성적 표상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난점들을 점점 더 치밀한 지성적 작업을 통해 극복하고 회피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형이상학은 사물들의 실재성을 시간 너머에서, 움직이고 변하는 것 너머에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감관과 의식이 지각하는 것 밖에서 찾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형이상학은 단지 개념들에 대한 다소간 인위적인 배열, 가설적 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선다고 자처했다. 실제로 그것이 하는 일은 움직이고 충만한 경험, 점점 더 깊이 연구할 수 있고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 찬 경험을, 이 동일한 경험으로부터 끌어낸,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경험의 가장 피상적인 층들로부터 끌어낸 고정되고, 메마르고, 공허한 추출물, 즉 추상적인 일반 관념들의 체계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나비가 나오게 될 고치에 대해 말하면서 날아다니고, 변화하고, 살아 있는 나비가 그것의 존재이유와 그 완성을 그 껍데기의 불변성에서 찾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고치를 풀어 번데기의 잠을 깨워보자. 운동에 그 운동성을, 변화에 그 유동성을, 시간에 그 지속을 되돌려주자. 해결 불가능한 “위대한 문제들”이 껍데기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 문제들은 운동에도, 변화에도, 시간에도 관계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그것들이라고, 혹은 그것들의 등가물이라고 잘못 여기던 개념적 고치에만 관계할지도 모른다. 그때 형이상학은 경험 자체가 될 것이다. 지속은 그것인 바대로, 연속적 창조로, 새로움의 끊임없는 분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운동과 변화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표상이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만일 운동이 일련의 위치들이고 변화가 일련의 상태들이라면, 시간은 구분되고 병렬된 부분들로 구성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 부분들이 잇따른다고 말하지만, 그 때 이 잇따름은 영화 필름의 이미지들의 잇따름과 유사하다. 필름은 전개되는 것에서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로도 열 배, 백 배, 천 배 빠르게 전개될 수 있다. 그것이 무한히 빠르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영사기 밖에서의) 그 전개가 순간적인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동일한 이미지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된 잇따름은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기서 무언가를 생략한다. 그것은 결핍을 나타낸다. 그것은 필름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대신 그것을 이미지들로 끊어낼 수밖에 없는 우리 지각의 나약함을 표현한다. 요컨대 이렇게 이해된 시간은 단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줄지어 있으며, 더욱이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다고 가정된 관념적 공간에 불과하다. 지속의 전개는 이러한 불완전성 자체, 부정적인négative 양의 덧붙여짐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오성의 요구들, 언어의 필요들, 과학의 상징주의에 따르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들 중 누구도 시간의 적극적인positif 속성들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잇따름을 이루어지지 않는 공존인 것처럼, 지속을 영원성의 상실인 것처럼 다루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근본적 새로움과 예측 불가능성을 표현하는데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기에 기인한다. 나는 단지 현상들과 사건들 간의 연쇄가 매우 엄격하여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고 믿는 철학자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철학자들은 미래가 현재 속에 주어져 있으며, 이론상 미래는 현재 속에서 가시적이며, 결과적으로 미래는 현재에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믿었던 소수의 철학자들조차 그것을 둘 혹은 그 이상의 선택지들 사이에서의 단순한 “선택”으로 환원시켰다. 마치 이 선택지들이 사전에 그려진 “가능적인 것들”인 양, 그리고 의지가 그것들 중 하나를 “실현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인 양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깨닫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새롭고 어떠한 방식으로도, 심지어 순수한 가능성의 형태로도 그 실현에 앞서 선재할 수는 없을 행동을 그들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유로운 행위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창조, 새로움, 혹은 예측불가능성을 상상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지속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경우에서도 내일 수행할 행위를 오늘 떠올리도록 해 보자. 당신의 상상은 아마도 수행할 운동을 환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을 수행하면서 생각하고 경험할 것 중에서 오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내일 그때까지 당신이 체험했을 모든 삶뿐만 아니라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거기에 덧붙이게 될 것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그것이 가져야 하는 내용으로 미리 채우기 위해서는, 오늘과 내일을 분리시키는 바로 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심리학적 삶의 내용을 바꾸지 않은 채로는 그로부터 한 순간도 감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멜로디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로 멜로지의 지속을 줄일 수 있는가? 내적 삶은 이 멜로디 자체이다. 따라서 당신이 내일 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할 때, 당신이 예견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행할 행동의 외형에 불과하다. 그것의 내부를 사전에 상상해보려는 모든 노력은 자꾸만 뻗어나가 결국에는 그 행위가 수행되고 더 이상 예측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게 될 지속을 요구한다. 만일 행동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즉 행동이 수행되는 순간에 그것이 외적인 묘사는 물론 내적인 채색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면, 이것은 어떠할 것인가?

따라서 그 연속적 국면들이 일종의 내적 성장을 통해 상호 침투하는 진화와 그 구분되는 부분들이 서로 병렬되는 전개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부채는 점점 더 빨리, 심지어는 순간적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펼쳐놓는 것은 언제나 비단 위에 미리 수놓아져 있는 동일한 자수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인 진화는 조금이라도 가속되거나 감속된다면 내적으로 완전히 변형된다. 그것의 가속 혹은 감속이 정확이 이러한 내적 변형이다. 그것의 내용은 그것의 지속과 동일한 것이다.

수축할 수도 없고, 연장할 수도 없는 이러한 지속을 살아가는 의식들의 옆에 시간이 단지 스쳐지나갈 뿐인 물질적 체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거기서 잇따르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부채의 전개라거나 혹은 더 정확히는 영화 필름의 전개라고 실제로 말할 수 있다. 미리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능성의 형태로 그 실현에 앞서 미리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것이 천문학, 물리학, 그리고 화학이 연구하는 체계들이다. 물질적 우주는 그 총체에 있어서 이러한 종류의 체계를 형성하는가? 우리의 과학이 그것을 가정할 때, 그것은 단지 우주 속에서 계산 불가능한 모든 것을 등한시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등한시하지 않으려는 철학자는 우리의 물질적 세계의 상태들이 우리 의식의 역사와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우리의 의식이 지속하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의 상태들은 실재적 지속과 어떤 방식으로건 결부되어야 한다. 이론상, 완전히 계산 가능한 한 체계의 잇따르는 상태들이 그려진 필름은 거기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어떤 속도로건 전개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속도는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필름의 전개는 우리의 내적 삶의 특정한 지속에 상응하며, 다른 지속에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개되는 필름은 필름의 운동을 규제하는 지속하는 의식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한 잔의 설탕물을 준비하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기다림의 필연성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시간이 단지 추상, 관계, 수일 뿐인 체계들을 잘라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우주 자체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우주를 그 자신은 비유기적이지만 유기적 존재자들과 뒤섞여 있는 그 총체로서 포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의식의 상태들만큼이나 새롭고, 독창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형태들을 끊임없이 띠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지속 속의 잇따름과 공간적 시간 속의 병렬, 진화와 전개, 근본적 새로움과 선재하는 것들의 재배열, 결국 창조와 단순한 선택을 구분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이 구분을 한 번에 너무 많은 측면에서 조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로 이해된 지속 속에는 단순히 실재성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다고 말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만일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적이기 이전에 그것은 가능적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당신은 “가능성”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말장난하면서 두 의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음악가가 교향곡을 작곡할 때, 그의 작품은 실재적이기 이전에 가능적이었는가? 그렇다. 만일 그 말이 교향곡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 말의 이러한 완전히 소극적인 의미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행한다. 사람들은 생겨나는 모든 사물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어떤 정신에 의해 사전에 인지될 수 있었으리라고, 그리고 그 사물은 이런 식으로 그 실현에 앞서 관념의 형태로 선재했으리라고 상상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의 경우 부조리한 생각인데, 왜냐하면 음악가가 자신이 만들어낼 교향곡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관념을 갖게 되자마자, 그의 교향곡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유 속에서도, 하물며 비인격적이건 단순히 잠재적이건 간에 우리의 사유에 비교될 수 있는 어떤 사유 속에서도, 교향곡은 실재적이기 이전의 가능적인 성질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식적이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자들과 함께 취해진 우주의 임의적 상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가장 위대한 거장의 교향곡보다도 더 새로움과 근본적인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는 개념화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념화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능성의 상태로 실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어떤 지성 속에 형상화되어 있다는 확신은 언제나 존속하고 있다. 이 환상을 깊이 검토하면, 우리는 이 환상이 우리 오성의 본질에 기인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정해진 순간들에 발생한다. 사물이나 사건의 현현을 확인하는 판단은 그것들 이후에만 올 수 있다. 따라서 그 판단은 자신의 날짜를 갖는다. 그러나 이 날짜는 모든 진리는 영원하다는, 우리 지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리로 인해 곧장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판단이 지금 참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사실상 제기되기 이전에, 권리상 그 스스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참된 단언에 회고적인 소급 효과를 부여하게 된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것에 역행 운동을 새겨 넣는다. 마치 어떤 판단이 그것을 구성하는 항들에 선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항들이 그것들이 표현하는 대상들의 출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예술이나 자연이 발명한 진정으로 새로운 형상에 대해 말할 때,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 그것의 실재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창조되지 않았다는 듯이!

이러한 환상의 결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간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참된 판단의 회고적 효과에 대한 믿음에, 즉 일단 제시된 진리가 시간 속에서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역행 운동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완수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실재는 무한히 먼 과거 속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렇게 그것은 그것의 실현 이전에도 가능성의 형태로 선재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 거기서부터 과거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오염시키는 오류가 나온다. 거기서부터 모든 경우에서 미래를 예측할 것이라는 우리의 포부가 나온다. 예컨대 우리는 내일의 예술, 내일의 문학, 내일의 문명이 무엇일까를 자문한다. 우리는 사회 진화의 굴곡을 개략적으로 형상화한다. 우리는 사건들의 세부사항을 예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물론, 우리는 실재가 일단 완수되기만 하면, 언제나 그것을 그에 선행하는 사건들과 그것이 발생했던 상황들에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실재(물론 임의의 실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가 다른 측면에서 취해진 동일한 상황들과 동일한 사건들에 동일하게 결부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현재의 모든 측면들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모든 방향으로 연장시킴으로써 지금 모든 가능성들을 획득한다면 선택된 것으로 가정된 미래가 그것들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먼저 이러한 연장 자체는 순전히 창조되었으며 절대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질의 추가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현재의 “측면”은 우리의 주의가 그것을 고립시켜 현행적인 상황들의 총체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절단을 수행했을 때에만 “측면”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모든 측면들”이, 이후의 사건들에 의해 우리의 주의가 거기에 행할 수 있는 절단들의 본원적인 형태들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한단 말인가? 따라서 이 측면들은 단지 회고적으로만 이전의 현재, 즉 과거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현재 속에서, 즉 그것이 아직 현재적이었을 때에는, 기껏해야 미래의 음악가들의 교향곡이 우리의 현행적 현재 속에서 갖는 실재성 이상을 갖지 못한다.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19세기 낭만주의를 고전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낭만주의적 요소들에 결부시키는 것은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낭만주의적 측면은 낭만주의가 일단 나타난 후에 그 낭만주의의 회고적 효과를 통해 밝혀진 것에 불과하다. 만일 루소Rousseau,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비니Vigny,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없었다면, 이전의 고전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낭만주의적 요소들은 결코 포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고전주의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요소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특정한 측면의 절단을 통해서만 실현되며, 어떤 예술가가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그의 상상력에 따라 무형의 덩어리를 조직화해서 지각할 재미난 도안dessin이 구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절단은 낭만주의의 출현 이전에는 그 구체적 형태를 가진 채로 고전주의 문학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도안이 이 구름에 작용하는 것처럼, 낭만주의는 회고적으로 고전주의에 작용한다. 그것은 회고적으로 과거 속에 자신의 고유한 전조와 자신의 선조가 자기 자신에 대해 행하는 설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현재의 실재 속에서 미래의 역사가가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을 정확하게 주목하려면 운 좋은 우연, 예외적인 행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역사가가 우리에 대한 우리의 현재를 검토할 때, 그는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설명,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 새로움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창조임에 틀림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본받아 사태들 중에 기록해야 할 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지표에 따라 현재적 실재를 절단함으로써 사태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근대 시기의 주요한 사태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당대 사람들이 기술했던 대로의 과거 속에서 우리가 그것의 전조적 징후들signes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에게는] 가장 흥미로울 지표들은 당대인들이 인류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조건에서만 그들에게 주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이러한 궤도trajet의 방향은 다른 방향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방향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궤도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개념화하고 실현시켰던 사람들의 전진 운동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조적 징후들은 우리가 지금 그 경로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경로가 완수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징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사태들이 발생했을 때에는 경로도, 그 방향도, 결과적으로 그 종착점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태들은 아직 징후들이 아니었다. 더 멀리 나아가 보자.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들이 당대 사람들에 의해서는 무시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 사태들 중 대다수는 이 시기에는 아직 사태들로서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사태들은 우리가 지금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intégralement 재생시키고, 그 당시의 실재의 불가분적 덩어리 위로 우리가 민주주의적 관념이라고 부르는 매우 구체적인 형태의 조명등을 이리저리 비추는 경우에, 우리에 대해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거장의 소묘만큼이나 독창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윤곽들에 따라 전체 속에서 이렇게 조명되고 이렇게 절단된 부분들은 민주주의의 예비적 사태들일 것이다. 요컨대 선조들이 그들의 시기에 행한 본질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이미 눈앞에 형상화되었어야 할 것이며, 실재적 지속이 존재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가 지나간 우리의 진화에 비추어 고려하는 것들, 심지어 지나간 우리의 진화에 비추어 그 윤곽을 그리는 것들이지, 미래가 새로운 관심의 창조에 의해, 그들의 주의에 새겨진 새로운 방향에 의해 그들을 흥미롭게 할 것들이 아니다. 결국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역사적 기원들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대인들이 과거를 비결정적인, 따라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관련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경우에만, 총체적으로 재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황색과 같은 하나의 색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주황색 말고도 빨간색과 노란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황색을 어떤 관점에서는 노랗고 다른 관점에서는 빨간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노랑과 빨강의 혼합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황색이 그것이 지금 그러한 바대로 존재하는 반면, 노란색도 빨간색도 아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주황색은 이미 이 두 색들의 혼합물일 것인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신경적이고 대뇌적인 전체 메커니즘과 동시에 의식의 특정한 배치들을 함축하는 빨간색의 감각과 노란색의 감각은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삶의 창조물들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행성에도 다른 어떤 행성에도 이 두 감각들을 경험하는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황색의 감각은 단순한 감각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은 결코 구성요소나 측면들로서 형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이 오늘날 주황색의 감각을 구성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만큼,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에 참여할 것이다. 심지어 그 둘 중 어떤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더라도, 그것들은 거기에 잠재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회고rétrospection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행적 실재성을 가능성이나 잠재성의 상태로 과거 속으로 되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보기에 지금 혼합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 우리의 습관적 논리는, 하나의 단순한 상태가 단지 진화가 그것을 고찰하는 새로운 관점들을 창조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그것을 관념적으로 분석하여 나온 다양한 원소들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인바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복합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논리는, 만일 이 원소들이 실재들로서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이전에 가능성으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어떤 사물의 가능성은 (이 사물이 선재하는 원소들의 완전히 기계적인 배열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단 나타난 실재가 무한한 과거 속으로 드리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논리가 현재 속의 실재성으로 생겨난 것을 가능성의 형태로 과거 속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논리가 무언가가 불쑥 생겨난다거나 어떤 것이 창조된다는 것, 시간이 어떤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형태나 새로운 질 속에서 그것은 예전 것의 재배열만을 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 논리에게 모든 다양성은 유한한 수의 단일성[단위]들로 분해된다. 그것은 구분되지 않고 심지어 나누어지지 않는 다양성, 순수하게 강도적이거나 질적인 다양성, 완전히 그것인바대로 남아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찰하는 새로운 관점들이 세계 속에 나타남에 따라 무수히 증가하는 수의 원소들을 포함하게 되는 다양성의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포기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장하고,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을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진화가 창조적인 [형태를 띠는] 지속에 적용시켜야 한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나아감에 있어 선택한 방향이다. 우리가 순수 지속을 되찾기 위해 위치했던 중심으로부터 다른 많은 방향들이 우리 앞에, 우리 주위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방향에 전념했다. 우리의 방법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유의 문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철학이 너무나도 자주 그 응고된 표면만을 붙잡는 것처럼 보였던 내적 삶의 흐름에 다시 위치했다. 이 방향에서는 소설가나 도덕가가 철학자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았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의 강요에 의해 단지 간간이 장애물을 돌파했을 뿐이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방법론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책[『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에서 이 주제에 대한 몇몇 지침들만을 제시했고, 우리가 - 과거가 현재 속으로 수축되는 – 행동의 평면과 과거의 총체totalité가 불가분적이고 파괴불가능한 채로 펼쳐지는 꿈의 평면을 비교했던 두 번째 책[『물질과 기억』]에서도 여전히 암시들에 그쳤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인 것 속에서,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해 영혼에 대한 탐구를 감행하는 일이 문학에 속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보기에 철학의 과업은 여기서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자신에 의한 자기관찰의 일반적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내적 관찰은 우리가 들인contractées[수축시킨] 습관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물론 주요한 변질은 자유의 문제를 만들어낸 변질 – 지속과 연장의 혼동으로부터 기인한 거짓-문제 - 이다. 그러나 동일한 근원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문제들이 있다. 우리 영혼의 상태들은 우리에게 셀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리된 상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측정 가능한 강도를 가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들 각각을, 그리고 그 전체를 그것들을 지칭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것들을 완전히 은폐하는 단어들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것들에게 단어 자체의 고정성, 불연속성, 일반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붙잡아 찢어버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덮개이다. 그러나 먼저 그것의 형태와 구조를 검토하고, 또한 그것의 목적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본질상 공간적이며, 사회적 효용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간성과 이렇게 완전히 특별한 의미의 사회성이 여기서 우리 인식의 상대성의 진정한 원인들이다.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장막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직접적인 것으로 돌아가 절대를 접촉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찰들로부터 지금은 다행히도 거의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에는 무모한 것으로 보였던 결론들이 도출되었다. 이 결론들은 심리학으로 하여금, 학설로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방법으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연합론과 결별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론들은 우리가 단지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또 다른 단절을 요구했다. 연합론의 옆에는 칸트주의가 있었고, 그것은 때로 연합론과 결합되어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고 일반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콩트의 실증주의나 스펜서의 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칸트적인 개념에 반대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칸트는 우리의 사유가 작용하는 질료가 공간과 시간 속에 미리 흩어져 이런 식으로 인간을 위해 특별히 준비되어 있음을 밝혀냈다고 여겨진다. “물 자체”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며, 거기에 다다르려면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직관적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분석은 적어도 실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인격이 그 자연적인 순수성 속에서 획득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이끌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 인식의 질료들은, 후에 심리학의 잔해를 우리의 의식이라는 인공적인 그릇 속에 던져 넣게 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전능한 기만자malin génie에 의해 창조되거나, 분쇄되고 왜곡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커다란 편의를 위해 들였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즉시 “즉자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다른 실재들에 대해서도, 어쩌면 심지어 모든 실재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 형이상학의 비상을 저지했던 “인식의 상대성”이 본원적이고 본질적이었는가? 오히려 그것은 우연적이고 습득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순전히 지성이 실천적 삶에 필요한 습관들을 들였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이 습관들이 사변의 영역으로 옮겨지면, 우리는 왜곡되거나 재편된, 요컨대 정돈된arrangé 실재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정돈은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만들어낸fait 것들을 우리는 풀어낼défaire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으로 돌입한다. 따라서 우리가 제거했던 것은 단지 하나의 심리학 이론, 연합론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 칸트주의와 같은 일반적 철학과 거기에 덧붙여진 모든 것이었다. 양자 모두는 그 당시에 개략적으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우리에게는 철학과 심리학이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impedimenta처럼 보였다.

그러면 전진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심리학적 기능들에 대한 연구에, 그러고 나서는 심리-생리학적 관계에 대한 연구에, 그러고 나서는 생명 일반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면서 언제나 직접적인 시각을 추구하였고, 이렇게 사태 자체와는 관련이 없고 단지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번역하는 것에만 관련하는 문제들을 제거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외관상 너무나도 단순한 방법이 극도로 복잡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첫 번째 귀결로 갖는 그 역사를 다시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다음 장에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그것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정확성을 유념한다고 말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정확성이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획득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막을 내려보자. 그 이유는 부정확성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을 너무 넓은 유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게다가 사물들과 유는 선재하는 단어들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미 만들어진 개념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만일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시각이 제공된다면, 그래서 만일 실재의 분절들을 고려함으로써 이 실재를 분할한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형성해야 할 새로운 개념들은 이번에는 대상의 정확한 치수에 맞게 재단될 것이다. 부정확성은 이 개념들이 다른 대상들로 확장되는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른 대상들은 그 일반성에 있어서는 이 개념들에 동등하게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들을 인식하고자 할 때에는 이 개념들 밖에서, 그 자체로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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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2월 26일 레옹 브룅슈빅에게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