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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7.17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4/4)
  2. 2018.07.03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3/4)

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4/4)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철학의 길 (2017년 6월 22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예술의 대상을 찾아서 떠나볼까요. 예술의 대상“들”이 아니라 예술의 대상 “자체”, 예술의 기능, 예술의 존재이유, 예술의 목적 말이죠.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실재가 우리의 감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면, 우리가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술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베르그손 교수님,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녹음된 목소리 : 베르그손 아카이브, 베르그손이 읽는 『웃음』의 발췌문)


앙리 베르그손 : 예술의 대상은 무엇인가? 실재가 우리의 감관과 의식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면, 우리가 사물들이나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예술은 무용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예술가일 것이다. 그 경우 우리의 영혼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어 계속해서 전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 레트 : 안녕하세요 폴-앙투안 미켈.


폴-앙투안 미켈 : 안녕하세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미켈 : 네, 베르그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인데요.


반 레트 : 정말인가요?


미켈 : 이건... 이건 정말이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는 이 철학자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이 드네요. 


반 레트 : 제가 알기로는 베르그손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데요. 1936년 6월 3일 예술의 대상을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미켈 : 이걸 듣고 나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점을 고백해야겠군요(웃음). 


반 레트 : 사람들이 이걸 들을 때마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침 잘 됐네요. 우리는 내일 바로 이런 효과를 다룰거니까요. 여하간, 당신은 뚤루즈 2, 르 미라일 대학의 현대철학 교수입니다.


미켈 : 바로 그렇습니다.


반 레트 : 당신은 가르니에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사유와 운동』을 내셨죠. 이번주에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프랑스 대학출판의 까드리주 총서 판, 그러니까 다른 출판사의 판본이지만요. 당신은 다른 출판사에서 피에르 몽테벨로와 세바스티앙 미라베트의 주석을 포함하여 이 책을 기획하신 거지요.


미켈 : 맞습니다. 『사유와 운동』의 다른 판본이요.


반 레트 : 예. 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다섯 번째 강연인 「변화의 지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것입니다. 1911년 5월 26-27일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행해진 강연이죠.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 텍스트는 아주 어려운 텍스트라고요.


미켈 :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 텍스트는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이 방송 덕에 이 점이 훨씬 더 잘 드러나겠지만, 베르그손이 고등학교 졸업반terminale의 철학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철학자라는 이미지 말입니다. 사실 이 글이 쉽게 쓰여있긴 하지만, 이 글을 조금 건드려보기만 하면, 이 텍스트 이면에 자리한 문제들을 이해하려고 해보면, 이 텍스트는 엄청나게 미묘하여 여러 방식의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가 거대한 난점들에 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죠.


반 레트 : 그럼 출발해보죠!


미켈 : 네. 뭐 출발하죠. 문제 없습니다(웃음).


(음악 : Coltrane, My favorite things)


반 레트 :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만한 지점이 하나 있다. 만일 감관과 의식이 무제한적인 범위를 가졌다면, 만일 지각능력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방향으로 무한정 뻗어간다면, 우리는 개념화할 필요도 추론할 필요도 없으리라는 점이다. 개념화는 지각할 수 없을 때 쓰이는 부득이한 수단이고, 추론은 지각의 빈칸을 메우거나 지각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추상적인 일반 관념들의 효용을 부인하지 않는다—은행권의 가치에 반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폐가 단지 금에 대한 하나의 약속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화 또한 그것이 표상하는 가능적 지각을 통해서만 가치를 갖는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1911년 베르그손을 초청한 옥스포드 대학의 위원회에게 보내는 감사의 말이 끝난 뒤, 이 강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첫번째 요점은 지각과 개념화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개념화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개념화는 지각할 수 없을 때 쓰이는 부득이한 수단이다.”


미켈 : 그렇습니다.


반 레트 :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폴-앙투안 미켈.


미켈 : 음 그건...(웃음) 제 생각으로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첫번째 지점이 있다면, 이 내용은 『사유와 운동』의 첫번째 강연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아니 사실 첫 페이지부터 나오는 내용이죠. 


반 레트 : 네. 


미켈 : 첫번째 강연의 첫 페이지요.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에서 가장 결여되어 왔던 것은 정확성이다.” 그래요. 왜 철학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되었을까요? 철학은 추상적인 경우에 정확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철학이 “체계”에 대한 사유가 될 때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철학은 그때 너무 큰 옷을 입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체계들에 대한 사유는 너무 큰 사유입니다. 그래서 이 사유는 더 이상 실재를 접촉하지도, 실재에 다다르지도 못합니다. 실재를 접촉하고 실재에 다다르기 위해, 베르그손은 여기서 철학을 과학에 비교하는데요. 그가 정확하게...(웃음) 정당하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대되는, 직접적인 정확성이 존재합니다. 과학은 실험적이라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죠. 그렇죠? 베르그손이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실재에 다다르게 해 주는 것은 바로 경험입니다. 베르그손은 경험의 철학자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 텍스트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그손이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손의 입장은 항상 다의적이지요.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개념을 평가절하합니다. 반대로 그는 지각에 가치를 부여하지요. 아무렇게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지각에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이유는... 제 생각으로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베르그손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각의 확장입니다. 어떻게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그리고 누가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분명히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지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각의 확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질문 뒤에는 인물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누가 지각을 확장시키는가?” “누가 지각의 확장을 실천하는가?”


반 레트 :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베르그손의 목소리가 읽어 준 발췌문에서 출발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베르그손은 “예술의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 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결국에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미켈 : 벌써 세번째 질문에 답하시는군요.


반 레트 : 예술은...


미켈 : 그 인물은 예술가입니다(웃음).


반 레트 : 음... 맞아요. 하지만 「변화의 지각」이라는 강연에서 예술가는 아주 일찍 등장하지요. 결국 베르그손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우리가 실재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다면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암시된 바는 예술의 기능은 실재와의 이러한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점이겠지요.


미켈 : 정확합니다. 하지만 보세요. 당신은 곧바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개념적인 사유, 체계의 사유가 추상적인 것이 된다면 경험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당신이 동시에 말한 바에 따르면, 예술에서 우리는 실재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술에 있는 이 실재와의 접촉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요?


반 레트 : 아니, 그 반대가 아닌가요? 베르그손은 그 반대의 말을 합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실재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면 예술이 무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에 함의는, 예술이 우리에게 이 직접적 접촉을 준다는 것이죠.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나타나는 경험의 차원, 하지만 확장된 경험의 차원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러한 경험이 확장되는지. 예술가는 이 확장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가가 기대하는 것과, 옥스포드 강연의 주제인 변화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이러한 질문 말입니다.


반 레트 : 곧장 이 강연의 첫번째 발췌문을 들어보도록 하죠. 


미켈 : 네. 그러시죠.


반 레트 : 「변화의 지각」의 첫번째 날 강연에서 발췌한 발췌문입니다. 우리는 예술가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소개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요. 폴-앙투안 미켈. 조르주 클래스가 읽는 다음의 발췌문을 들어보시죠.


(음악 : Ravel, Miroirs M 43 : Une barque sur l’océan)


조르주 클래스 : 수 세기 전부터 우리가 자연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우리에게 보게 만드는 것을 그 역할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예술가들이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정신 속에서, 즉 우리 안팎에서 우리의 감관과 우리의 지각을 명시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 위대한 화가란 그로부터 나온 사물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 만인의 시각이 되었거나, 만인의 시각이 될 그런 사람들이다. 코로나 터너와 같은 사람들만 생각해보아도, 그들은 자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수많은 측면들을 포착하였다. 그들은 보았던 게 아니라 창조했던 것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상상력의 산물을 우리에게 전달했던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의 발명들을 채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며 우리는 단지 위대한 화가들이 우리에게 묘사해준 이미지를 통해 자연을 보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왜 우리는 어떤 작품들—거장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되다고 말하는가? ... 우리가 터너의 작품이나 코로의 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경탄하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의 일부분을 우리가 이미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각했지만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반짝이고 사라져가는 시각이었으나, 마찬가지로 반짝이고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일군의 시각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 이 일군의 시각들은 상호 간섭을 통해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일상적으로 갖는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시각을 구성한다. 화가는 이 시각을 분리시켜낸 것이다. 그가 이 시각을 화폭 위에 잘 고정시켜 두었기에, 이제 우리는 실재 속에서 화가가 본 것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변화의 지각」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강연, 이 텍스트 속에서 아직 “변화” 개념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지각”이라는 관념이 어떤 관심사를 겨냥하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부분에서, 그러니까 이 강연을 개시하며 베르그손은 개념화가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며, 지각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침내 예술가라는 인물의 이미지, 예술가라는 인물이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를 철학에 결여되어 있는 이 지각을 대면하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폴-앙투안 미켈.


미켈 : 예. 어떤 의미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 지각을 확장시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제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 확장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반 레트 : 지각의 확장 말이지요.


미켈 : 네. 아주 단순한 첫번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해석은 제가 가지고 있던 해석임을 말해두어야겠군요. 제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저는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확장은 화가가 그의 시각을 덧붙인다는 사실이라는 해석이지요. 화가는 그의 시각을 덧붙이고, 그의 시각을 우리에게 제안하고, 그의 시각을 우리와 소통합니다. 우리는 사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화가가 사과에 대해 갖는 시각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건 사과가 아니라, 화가가 사과에 대해 제안한 시각입니다. 그런데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우리가 사태를 단지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이건 주관주의적 전회를 일으킬 것입니다. 사실 베르그손이 바로 이 점을 겨냥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이 인용하는 두 작가, 두 화가는...


반 레트 : 터너와 코로 말이군요.


미켈 : 터너와 코로는 종종 “전-인상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인즉슨, 여기서 이 화가들, 위에서 언급한 터너와 코로가 행한 일이 대상을, 풍경을 그리는 대신, 인상을 그리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요. 이것이 첫번째 해석입니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 텍스트를 단지 이런 식으로만 읽는다면, 확장이 이런 것이라면, 화가가 우리에게 자신의 시각을 전달해주는 것이라면, 제 생각으로는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텍스트의 의미를 완전히 놓쳐버리게 됩니다. 네. 베르그손은 아주 미묘합니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만 읽는다면 베르그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텍스트의 의미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자 베르그손이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바를 잘 보세요.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베르그손은 여러 표지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표지는 이것입니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정신 속에서, 즉 우리 안팎에서 우리의 감관과 우리의 지각을 명시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예술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 안에서, 내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 안에 있는 것과 우리 밖에 있는 것 간의 소통입니다.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아닌 무언가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 단순히 우리의 세계, 자연적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체험된 영역, 의식의 영역에 머무는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미켈 : 베르그손을 의식의 철학자로만 여기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주론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예술가의 몸짓이 지각을 탈주관화 한다는 것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반 레트 : 예술은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구요.


미켈 : 탈주관화랄까... 어쨌든 예술을 통해 안과 밖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반 레트 : 예술가의 안팎이요?


미켈 : 네. 그럼요.


반 레트 : 회화를 보는 사람의 안팎이기도 한가요?


미켈 : 회화를 보는 사람의 안팎이기도 하죠. 정확합니다. 자 보세요. 다른 구절을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제시하는 위대한 화가는 ““자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수많은 측면들을 포착한다.” 그러니까 사실 베르그손은 여기서 논문 전체의 주제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베르그손은 여기서 우리가 변화에 대해,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죠. 우리는 지속이 아니라 변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가 뒤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코로와 터너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변화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반 레트 : 무슨 변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켈 : 명시적인 차원에 말이죠. 용해되는 장면dissolving view, 여기에 사물의 운동성이 있습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터너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거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녹아내림입니다. 용해되는 장면은 녹아내림이지요. 사물의 운동성을 보십시오. 사물 속의 운동성을요. 그건 단지 내 안에, 내 시각 안에, 내 체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행입니다. 예술가는 바로 여기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확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옮겨가도록 만드는 일종의 연결부호, 일종의 바톤터치입니다. 그것은 안에서, 그러니까 의식의 체험에 내재적인 지속에서, 우주 전체에 내재적인 지속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다른 말도 합니다. “왜 우리는 어떤 작품들—거장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되다고 말하는가?” 예술이 우리는 진리와 접촉시킨다는 말이지요.


미켈 : 물론입니다. 그건 다른 말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죠. 코로나 쿠르베를 고려해보면, 그들은 또한...


반 레트 : 쿠르베요? 터너가 아니라?


미켈 : 네. 쿠르베. 아니, 아니. 이들 역시 사실주의로의 경향에 놓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르그손은 인상파를 언급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1911년에 인상파는 이미 유명했죠. 왜 베르그손은 인상파를 언급하지 않는 걸까요. 베르그손은 여기서 코로와 터너를 언급합니다. 모네가 아니라요. 인상파는 1890년대부터 이미 유명했지요. 왜 베르그손은 그들을 언급하지 않는 걸까요? 예술에서 진리는 몽상fantaisie이 아닙니다. 예술은 무언가 참된 것을 말해줍니다. 단지 예술가의 상상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이라는 이러한 기능이 있습니다. 소통이라는 기능 배후에는 예술작품이 갖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가 철학자와 동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 베르그손은 예술가에 대한 경시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강연의 다음 부분을 따라가다보면,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 철학자가 바통을 이어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술가는 한편에 치워두게 되죠.


반 레트 : 예술가를 치워두기 전에, 베르그손과 함께 예술가라는 이 인물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철학자에, 그러니까 이 강연의 주제인 “변화의 지각”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는지는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니까요. 


미켈 : 네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렇게 씁니다. “따라서 예술은 지각 능력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조금 전에 설명하셨으니 이 구절은 이해가 가네요.


미켈 : 네네.


반 레트 : “하지만 예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예술가가 언제나 “관념론자”로 여겨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가가 삶의 실증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우리보다 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정신나간 사람distrait”이다. 그렇다면 왜 예술가는 실재로부터 더 떨어져 있음에도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죠. 어떻게 “거리”가...


미켈 : 아주 훌륭한 질문이네요.


반 레트 : 어떻게 “거리”가 우리를 참된 것을 보는 데 더 접근시켜주는 것인가요?


미켈 : 좋은 구절을 참조하셨네요.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예술가가 관념론자라는 말은... 이 말이 구분하는 바는... 음 다른 저작으로 옮겨가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여기서 “지각의 확장”이 “지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1896년의 저작인 『물질과 기억』이 보여주는 바대로의 지각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술가가 관념론자라는 말은 예술가의 역할이 우리를 우리의 필요로부터 떼어내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적 필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적응할 필요 말입니다. 반대로 지각의 기능은 우리를 필요에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지각의 기능 중 하나라고 말해야겠군요. 우리가 지각을 정교히 분석한다면,


반 레트 : 네.


미켈 : 지각은 복합적입니다. 지각은 두 요소를 갖습니다. 하지만 두 요소 중 하나는, 지각이 삶에 대한 주의의 기관으로서의 뇌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각은 필요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죠.  지각은 확장시키는 대신 생략합니다. 지각은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확장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 레트 : 그러면 예술가에게 고유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군요? 지각이 제한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지각을 확장하는 것인가요?


미켈 : 역설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지각 속에서 지각이 수행하는 기능은 단지 생물학적인 기능일 뿐이기 때문이죠. 단지 생물학적인 기능이요. 지각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가 지각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그렇죠?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심지어 짚신벌레조차 필요를 갖습니다. 짚신벌레는 이 필요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지각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갖습니다. 모든 생명체가요! 이걸 위해 뇌를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에서 이 일은 뇌를 통해 일어납니다. 뇌는 긴장의 기관, 행동의 기관 등으로 불릴 수 있죠. 하지만 이 일은 모든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면 예술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예술은 비유적인figurée 방식, 조형적인figurative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어 우리를 실재의 방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방향, 즉 이 생물학적인... 적응의 방향에서 떼어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확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각의 확장을요. 그건 단지 지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 “반 고흐”(1991))


반 고흐 : 머리가 아프네요.


클레망틴 가셰 : 키니네 좀 드릴까요? 슈발리에 부인!


슈발리에 부인 : 네 아가씨.


클레망틴 가셰 : 반 고흐 씨에게 키니네 좀 갖다 주세요.


 


가셰 박사 : 단순한 일을 하는게 어찌나 어려운지요.


슈발리에 부인 : 밖에서 점심을 먹읍시다. 15분쯤 후에 준비될거에요.


반 고흐 : 이것 봐요. 언제나 똑같네요. 뉘넌에서는 어머니와 누이가 내가 일하는 동안 계속해서 나를 방해해서 화가 났었죠. 단지 그 형편없는 네덜란드 식사를 먹으라고 말입니다. 내 누이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땐 내 작업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여자들은 물질적인 것밖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가셰 박사 :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클레망틴 가셰 : 드세요.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그림은 안 그리고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으면 당신 말처럼 죽어버릴 거에요. 


반 고흐 : 포즈를 잡아보세요.


클레망틴 가셰 : 제 생각이 궁금하세요?


반 고흐 : 관심없습니다.


클레망틴 가셰 : 저는 그대로 그린 그림들을 좋아해요. 내 드레스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이 드레스는 너무 무거워요. 마치 납으로 만든 것 같군요. 옷자락이 거의 끌려다니겠어요. 손도요. 제 손을 갈고리 손을 만들어 놓으셨네요. 정말 쓸모없는 일을 하셨어요. 이 색깔은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한 건가요? 당신의 풍경화는 이렇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런거에요 뭐에요?


가셰 박사 : 그림적 변형이야. 클레망틴, 진정하고 입 다물어. 모델은 그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 없어.


클레망틴 가셰 : 명언 나오셨네요!


가셰 박사 : 놀라워. 놀랍다고 말해야겠네요. 이 끊긴 연보라색 하며, 이 리듬, 이 바탕, 이 손들, 드레스의 이 소용돌이들...


클레망틴 가셰 : 그거 1톤은 돼 보이는데!


가셰 박사 : 파도와도 같은...



클레망틴 가셰 : 저는 이 연보라색이 싫어요. 저는 연보라색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걸요. 벽도 하나도 안 닮았어요. 물론 제가 여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보라색 배경 위에 있는 보라색 뚱보가 나란 말이에요?


(음악 : Gabriel Fauré, Ballade en Fa dièse maj op 19)


반 레트 :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생은 우리가 눈가리개를 쓰기를, 우리가 오른쪽도, 왼쪽도, 뒤쪽도 아니라 우리가 걸어갈 방향인 앞쪽만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요소들의 점진적인 연합을 통해 구성되기는 커녕 갑작스러운 분리의 결과이다. 우리는 광대한 잠재적 인식의 장 속에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들여 현실적 인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머지 것들을 무시해버렸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을 듣고 계십니다. 10시 22분입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텍스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가르니에 플라마리옹 판 『사유와 운동』을 펴낸 철학자 폴-앙투안 미켈과 함께 「변화의 지각」이라는 제목을 가진 강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폴-앙투안 미켈. 우리는 조금 전에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 “반 고흐”에서 뽑아낸 장면을 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먼저 예술가의 삶과 일반적인 삶, 매일매일의 삶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상적인 삶은 예술가의 삶에 끼어들지만, 말하자면 예술가가 창조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성과는 다른 시간성을 갖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이 장면은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그림적 변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줍니다. 포즈를 잡은 모델은 반 고흐에게 “당신이 그린 것은 지각된 것과 완전히 다르고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후에 제가 읽은 이 강연의 몇몇 구절들은 이 지각상의 차이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그리고 이 구절이 아주 뛰어납니다. “생은 우리가 눈가리개를 쓰기를, 우리가 오른쪽도, 왼쪽도, 뒤쪽도 아니라 우리가 걸어갈 방향인 앞쪽만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이게 바로 예술가의 지각과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로군요.


미켈 :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읽었던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주셨으면 하네요. 왜냐하면 곧 보게 되시겠지만...


반 레트 : 알겠습니다. “교수님”.


미켈 : 다음 문장에서 베르그손은 인식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으니까요.


반 레트 : 아, 뒷부분을 더 읽으라고요?


미켈 : 네.


반 레트 :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요소들의 점진적인 연합을 통해 구성되기는 커녕 갑작스러운 분리의 결과이다. 우리는 광대한 잠재적 인식의 장 속에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들여 현실적 인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머지 것들을 무시해버렸다.” 더 읽을까요? 이 다음 부분을 말씀하셨던 건가요?


미켈 : 아니오, 아니오.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손에 대한 또 하나의 상투적 표현tarte à la crème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봐라. 인식은, 따라서 과학은 대상에 대해 상대적인 시각밖에 가질 수 없다. 절대에 접근하는 것은 예술가와 철학자다.” 이 입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 또한 상투적 표현들 중 하나고, 베르그손의 사유에 대한 가장 진부한 클리셰입니다.


반 레트 : “또한”이요? 상투적 표현들이 많이 있나요?


미켈 : 조금 전에 보셨다시피, 예술이 주관적 인상이라는 것이 있지요. 이번 것은 인식이 상징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똑같습니다. 베르그손이 이런 말을 하는 텍스트들이 있지요. 물론입니다. 예컨대 마찬가지로 『사유와 운동』에 실려있는 1903년의 강연[역주 : 「형이상학 입문」]의 경우, 아마도 이 방송에서 누군가를 초청해서 이 강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이 강연에서 베르그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실 수 있겠죠. 1903년에 베르그손은 “과학은 대상 주변을 돌 뿐이고, 결코 대상 속으로는 진입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베르그손이 그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해도, 『사유와 운동』에 실린 첫번째 강연의 앞부분에서는 반대로 과학이 정확하다고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과학이 정확한 것이라면, 과학이 대상 주위를 돌 뿐이고 대상 속으로는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혀 설명할 수 없어요. 사실, 본질적인 방향은 이와는 반대로, 인식에, 과학에 실재에 “접촉하는” 차원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심지어 지각에도 이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지각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각에 이미 실재의 차원에 접촉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실 과학에는 이미 “확장”의 한 형태의 존재합니다. 단지 과학에 존재하는 확장의 형태는 예술의 확장과 동일한 본성을 갖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지금 설명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반 레트 :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왜냐하면 이번에는 제가 몇줄 뒤를 읽어본다면, 베르그손이 실제로 과학적 기획에 속하는 것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뇌는 이러한 선별의 작업을 목적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기억의 작업을 가지고 이 점을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음 강연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과거는 필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보존된다. 과거는 전적으로 존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적 관심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그 말인 즉슨, 뇌 자체가 그 구성 방식으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떨어짐, 이러한 선별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말이고, 뇌가 행동을 위해 본질적인 것만을 보존한다는 말이죠.


미켈 :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지각에 대해서도 그 말은 참이면서 거짓입니다. 베르그손이 쓴 구절을 하나 읽고 싶군요. 허락하신다면요. 이 구절은 『물질과 기억』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뽑아낸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 레트 : 그 책은 1896년에 쓰인 것이죠.


미켈 : 1896년 맞습니다.


반 레트 : 훨씬 전에요.


미켈 : 맞습니다. 하지만 『사유와 운동』에서도 재발견되는 내용입니다. 두번째 강연을 읽으시면 정확히 같은 내용을 보게 되실 겁니다. 『창조적 진화』에도 나오는 내용이고요. “따라서 오히려 형이상학적 질서에 속하는 이 두번째 결론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순수 지각 속에서 진실로 우리 밖에 위치하며, 직접적 직관 속에서 대상의 실재성을 접촉한다.” 우리는 우리 밖에 위치하고, 직접적 직관 속에서 대상의 실재성을 접촉합니다. 순수 지각 속에도 직관이 있습니다.


반 레트 : 누구의 지각인가요? 지각 일반인가요?


미켈 : 베르그손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만을 참조한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통상적으로는 내가 내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의식의 체험들을 다시 발견할 때에 철학에서 직관의 차원에 가닿게 되지요. 여기서는 내가 나 자신의 밖에 위치함으로써 직관의 차원에 가닿게 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요. 지각 속에는 단지 유기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지각 속에 이미 형이상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속에도 단순히 상징적이고 상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차원, 형이상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이 형이상학적 차원이란 무엇인가요?


미켈 : 곧장 설명해드리죠.


반 레트 : 설명해주세요.


미켈 : 그 말은 우리가 실재를 접촉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지각은 두 측면을 갖습니다. 첫번째 측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아주 어려움을 겪는 측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측면이 없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요. [베르그손에게는] 반사réflexion 이론이 존재합니다. 지각은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킵니다. 지각은 사물이 우리 위에서 반사된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지각에서 우리는 완전히 탈인격화됩니다. 지각은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킵니다. 그것은 사물이 우리 안에서 반사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지각에는 두번째 차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차원은 처음부터 서로 교차되는 것인데요. 이 두번째 차원은... 이 사물이 우리 안에 반사될 때, 우리 안에는 무언가가, 유기적인, 생물학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건 뇌입니다. 뇌는 긴장의 기관이죠. 뇌는 추려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반사되는 이 사물들을 추려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이 생물학적 기능입니다. 당신의 말은 이 점에서 옳습니다. 생물학적 기능이 있습니다.


반 레트 : 아니요. 제가 해석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미켈 : 하지만 거기에 더해, 지각 속에는 우리를 우리 밖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차원도 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보는 상황을 보시면 베르그손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곧장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저는 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압니다. 이 정도로 식은 죽 먹기입니다.


반 레트 : 음. 많은 철학자들이 그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텐데요.


미켈 : 잠시만요. 우선 설명을 끝낼 수 있게 해주세요. 그 후엔 하고싶은 말씀을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저는 제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물론 당신이죠. 제가 당신이 거기에 있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을 알게 된다면, 저는 제 감각으로 향하게 됩니다. 저는 제 자신으로 되돌아갑니다. 제가 가진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으로요.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을 참조한다면, 저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다시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는 거지요. 결국 저는 당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실재적인, 구체적인 증거도 갖지 못합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하지만, 지각 속에서는 저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압니다. 이 직관은 무엇일까요? 이건 특별한 직관입니다. 이 직관은 나로 하여금... 이건 차후에 메를로-퐁티가 이어받을 지각의 역설인데요, 저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저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을 제 자신으로부터 나옵니다. 당신이 아니라요. 이 직관은 대체... 사실을 말하자면, 지각 속에는 나로부터 온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온 것들도 있습니다. 나와 자연의 관계로부터요. 지각이 전해주는 형이상학적 메시지는... 음 이건 처음부터 지각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인데, 그 메시지는 이러한 것입니다. “나는 단지 내 세계, 사유의 체험된 세계, 의식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세계가 아닌 세계 속에도 존재한다.”


반 레트 : 두 세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군요.


미켈 :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재성의 이중화입니다.


반 레트 : 뭐라구요?


미켈 : 내재성의 이중화요. 나는 내 안에 있는 동시에,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부로부터 나 자신이 체험한 지속을 느끼기에 내 안에 있는 동시에 지각을 통해 내 밖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인 즉슨,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전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여하는 전체는 내가 아닙니다. 과학의 메시지는 내가 참여하되 나 자신은 아닌 이 전체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화의 메시지입니다. 그건 단지 상징적이고 인위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건 형이상학적 메시지입니다. 그건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은 당신이 아닌 우주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죠. 이게 그 메시지입니다. 이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점은, 왜 과학은 예술이 아닌지, 그리고 왜 예술은 과학이 아닌지입니다.


반 레트 : 조금 뒤에 이야기해주시죠. 먼저 베르그손에게 발언권을 넘겨보도록 할까요. 배우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를 통해서요. 베르그손의 이 구절은 청취자 여러분들 가운데 가장 회의적인 분들도 전향convertir시켜 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를 구성하는 내적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외적인 세계에도 참여하는 이중적 내재성이 존재하는가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이 이중적 내재성을 향하도록 우리를 동요시키는 경험이 존재합니다. 베르그손은 이 경험을 “급작스런 주의의 전향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들어보시죠.


클래스 : 충분히 강하고 실천적 관심에서 충분히 떨어져 나온 생에 대한 주의는 불가분적 현재 속에 의식적 인격의 지나간 역사 전체를—순간적인 것이나 동시적 부분들의 총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연속적인 현재로—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분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멜로디, 단어의 의미를 확장해 말한다면 끝에서 끝까지 하나의 영속적인 현재를 구성하는 멜로디이다. … 예외적인 경우에 주의가 갑작스럽게 생에 대해 기울이던 관심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러면 그 즉시 마법처럼 과거는 현재가 된다. 예기치 못하게 목전에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등산가, 물에 빠진 사람, 목 매달린 사람에게는 일종의 급작스런 주의의 전향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의식의 방향전환 같은 것이 생겨나, 그때까지는 미래를 향해 돌아서서 행동의 필요성에 빠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그것들에 무관심해진다. “망각되어 있던” 수천의 세부사항들이 다시 상기되어 그 사람의 역사 전체가 움직이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음악 : Debussy, Rêverie L68)


반 레트 : 10시 30분 프랑스 문화방송입니다. 드뷔시의 “꿈”을 듣고 계십니다. 이 곡은 베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습니다. “불가분한 것으로 지각되어, 한편에서 다른 편 끝까지, 이 말의 의미를 확장시킨다면, 영속적 현재를 구성하는 멜로디.” 이 구절은 「변화의 지각」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번주 내내 다루는 『사유와 운동』에 실린 강연 말이죠. 우리가 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폴-앙투안 미켈이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결국 우리를 영속적 현재에 대면케 하는 이 “멜로디”라는 관념을 통해 변화라는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반 레트 : 변화의 관념은 이 강연에 등장하는... 이 강연의 목표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시죠.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 다른 것, 즉 멜로디 자체에 결부된 영속적인 현재에 접근케 만드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등산가나 물에 빠진 사람, 목 매달린 사람의 이러한 “관심의 전향.” 이것이 어떻게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가요?


미켈 : 음.. 직접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건 아닙니다. 우선 저는 이 문제에 돌입하기에 앞서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로 되돌아가고 싶네요. 과학자와 예술가의 차이가 무엇인지의 문제 말입니다. 우리는 두 인물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반 레트 : 네. 


미켈 : 과학자가 있고, 예술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과학자를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과학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프랑스 철학 문화의 한 부분은 이 점에서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이 부분은 과학에 문의하지 않고서 철학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크나큰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죠. 그럼 결여된 것은... 음 여기에 응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간략히 말하면, 그렇다면 과학적 관점에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요? 과학의 “설명적” 관점에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요? 이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예술의 “표현적” 차원을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대한 사유, 변화에 대한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음 베르그손은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당신이 과학자의 작업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본다면, 과학자는 우주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이건 이미 엄청난 일입니다. 과학자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우리의 껍질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점이 과학자의 위대한 성공입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와 관련된 것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와 관련된 것 이상을 이야기하죠. 과학자는 우리가 우리보다 큰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 우리에 관련된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우리보다 더 중요한 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요. 그건 바로 우주입니다. 결국 우리는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이 우주 속에서 더이상 대수로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우주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는 변화를 “분석”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서요. 과학자는 움직이는 것을 분석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서요. 즉, 등식에 도달하기 위해, 구조를, 이론적 체계를 끌어내기 위해... 음 이 점으로 상세하게 들어가지는 맙시다. 오늘 방송의 목적은 이런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 과학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해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이 방법의 배후에 위치한 철학적 입장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 입장은 “존재”에 가치를 두려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음 그런데 여기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폴-앙투안 미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미켈 : 예컨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한 행성을 생각해봅시다. 이 행성은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아킬레스의 화살은 어떤가요. 이것도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당신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을 생각할 때, 당신은 이 운동을 “운동의 구조”를 통해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조는 완전히 영원한 것이죠. 운동의 구조는 행성의 운동 배후에 존재할 대칭성을 보여주는 어떤 등식, 어떤 공식을 통해 주어집니다. 이 대칭성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겠죠. 이것이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고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움직이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움직이는 것은 불가피하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설명해야 할 “현상”이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재”의 층위로 옮겨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여기서 “실재”의 층위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겠죠. 따라서 과학자들의 논리 속에 위치했을 때에는, 생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생성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요. 예술가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변화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철학자와 가까운 입장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죠. 베르그손의 사유를 통틀어 문제시되는 철학은 서양적 사유 속에서는 아주 이상야릇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성의 철학입니다. 존재의 철학이 아니라요.


반 레트 : 그럼 변화가 실재 속에서 가장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미켈 : 당연하죠. 


반 레트 : 아주 역설적이군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미켈 : 비록 진정으로 논의를 거친 뒤에는 실체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반 레트 : 네. 베르그손은 변화가 실체적이라고 이야기하죠. 베르그손은 존재를 변화로 대체하려 하는 것인가요?


미켈 : 맞습니다. 베르그손은 전통 형이상학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죠. 이 위계는 과학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spontanément 작동하고 있습니다. 고전 과학 속에는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 형이상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할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이 위계를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위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도울 인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그를 돕는 이 인물이 바로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는 사물 안의 변화를 봅니다. 우리 안의 변화를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 안의 변화를 봅니다. 당신이 반 고흐를 언급하셔서 말인데요. 잘 보십시오. 그는 드레스에서 뭘 보았지요? 그는 소용돌이들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 소용돌이들은 무엇인가요? 그건 흐름들입니다. 그것은 그가 보는 것, 그리고 자연을 전달해줍니다. 그것은 반 고흐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폭력을 전달해줍니다. 그것은 정신의 폭력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폭력이기도 합니다. 이 두 폭력은 이 우주적인 표현성expressivité을 전달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가 보는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변화의 지각」을 구성하는 두 강연을 읽는다면, 베르그손이 예술가라는 인물의 예를 들고 과학자라는 인물을 언급한 뒤에는 어쨌건 철학자에 다다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철학은 예술이나 과학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다는 말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철학자는 말과 화해하고 개념적 도식을 재발견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조금 전에 개념을 평가절하했지만, 개념에 조금의 가치를 되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제 첫 저작의 제목이 그러한 것이긴 하지만[역주 : 미켈은 『베르그손, 형이상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철학자는 상상력을 가진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사유는 또한 개념들을 통해 표현되는 사유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부터 종종 직관이 지성 위에 올라타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직관에는 변증법적 차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창조적 진화』에서요. 그렇습니다. 이건 전통적인 의미의 개념은 아닙니다. “일반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건 개념적 도식입니다. 철학적 개념에는 언제나 개념과 이미지 사이의 연관이 존재합니다. 지속이나 생의 약동 같은 개념을 보세요. 언제나 이런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유할 수단을 제공합니다. 베르그손에서 한 철학적 개념의 의미는 결코 명시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자는 이 의미를 붙잡게 되겠죠. 철학자는 결국 실재에 대한 하나의 시각vision을 도출해 줄 것이니까요. 화가는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주시함으로써 이 시각을 형상화할 뿐입니다. 화가는 변화에 속하는 무언가를 형상화하여 표현하겠죠. 하지만 철학자는 실재에 대한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철학자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임을 말해줄 것입니다. 이것이 실재에 대한 하나의 시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이죠. 


반 레트 : “우리의 지각 속에서 얼어붙어 불변하던 것들이 다시 데워져 운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우리 주위에서 생기를 얻고,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거대한 약동이 존재와 사물을 실어간다. 우리는 이 약동이 우리를 고무시키고, 끌어당기며, 지탱함을 느낀다.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되고, 이러한 생의 증대가 그와 함께 중대한 철학적 수수께끼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제기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이 수수께끼들은 실재에 대한 응고된 시각이 낳은 것으로, 우리의 생명성의 인위적 약화를 사유의 용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사물들을 지속의 상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 사유하고 지각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적 지속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실재적 지속 속으로 파고들어 갈수록, 우리는 원리의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이 원리는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의 영원성은 불변하는 영원성이 아니라 생의 영원성임에 틀림없다.” 「변화의 지각」에 대한 이 강연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폴-앙투안 미켈. 이 강연의 목적은, 목적이란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우리 주위에서 생기를 얻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이 변화, 이 생성이 우리가 대면한 것이 되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이 논의의 결정적인 지점이군요.


미켈 : 맞습니다. 베르그손이 스피노자의 공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알아채셨을 겁니다. 스피노자의 공식을 이어받아 그것을 변형시키지요. 그것은 “지속의 상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가 됩니다[역주 :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 아래서sub specie æternitatis”라고 말한다].


반 레트 : 그렇죠.


미켈 : 즉 지속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이 지속이 우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이 우리가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이 강연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이상 단지 의식의 체험된 지속을 분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내재적 지속에 빠져들 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죠. 이 이행이 양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요. 우리는 이 방향으로 아주 조금 나아갔을 뿐입니다.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실재에 대한 시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이러한 생성의 형이상학을 정당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단지 암시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반 레트 : 네.


미켈 : 예술가는 변화를 보여주고, 과학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암시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합니다. 변화를 구성해야 합니다. 개념적 도식을 거쳐 구성된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 점을 다룰 수 없겠네요. 「변화의 지각」은 이 점을 다루는 텍스트는 아닙니다. 이 점은 『물질과 기억』에서, 『창조적 진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그 텍스트들은 「변화의 지각」보다 먼저 쓰인 것들이죠.


미켈 : 그렇습니다. 예컨대 “두 질서”에 관한 이론이 그러합니다. 이건 이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본질적인 지점입니다. 두 질서에 관한 이론 말입니다. “무엇이 실재인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저는 실재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특정 관점에 위치한다면 실재는 정신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관점이 존재합니다. 위의 관점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 관점은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실재는 물질이다.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의 이러한 영속적인 미끄러짐이 존재하기에, 무엇이 실재인지 분석할 경우 결코 단순히 어느 한 관점에 정지할 수 없게 됩니다. 관점의 복수성을 포괄해야 합니다. 이 관점의 복수성에서 생성의 형이상학[역주 : 미켈은 생성의 수학이라고 말했으나,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이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실재에 대하여 한번에 전부 정의할 수 있는 정지된 실체성의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이론은 베르그손이 그의 생성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도구들도 있지요. 『물질과 기억』에는 다른 도구들도 있습니다..


반 레트 : 어쨌건 제가 조금 전에 읽은 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 작업의 존재 의미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된다.” 베르그손은 단지 이론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예술가와 과학자의 경우를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를 철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다다라야 하는 생의 역량과 같은 것이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한층 더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겠죠. 그가 우리에게 권유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이건 실천적인 문제로군요.


미켈 : 잘 이야기하셨군요. 저는 극동 지역에 자주 갑니다. 극동 지역. 그러니까 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갈 일이 많습니다. 제가...


반 레트 : 일본에서는 베르그손이 많이 연구되지요.


미켈 : 프랑스 철학이나 베르그손 철학을 한국인들, 일본인들, 중국인들과 함께 논의할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동원하여 생성의 사유와 생의 사유 간의 연관을 알아챕니다. 이 연관은 거의 직접적인 것입니다. 이 점도 오늘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일입니다. 사태의 질서를 역전시킨다면, 밑바닥에 있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고 말한다면, 실재에 대한 “생기론적” 접근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원리와 같은 것은 없고...


반 레트 : 하지만 베르그손이 이러한 사유를 발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시겠지요. 생성으로 존재를 대체하는 이러한 사유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입니다. 그렇게까지 새로운 건 아니죠.


미켈 : 네. 헤라클레이토스와 함께 노자를 인용할 수도 있겠죠. 당신도 아시다시피요.


반 레트 : 그러니까요. 수많은 길이 있겠죠. 베르그손이 이 사유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미켈 : 네 베르그손이 발명한 것은 아니죠.


반 레트 : 그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미켈 : 하지만 서양에는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서양은 다소 이 전통에 대립하여 세워졌지요. 이러한 사실이 베르그손의 작업의 가치와 특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음악 : Ella Fitzgerald, You've changed)


반 레트 :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릅니다. “당신은 변했군요.” 하지만 베르그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변화, 즉 생성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이해하게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폴-앙투안 미켈, 오늘 베르그손에 대해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켈 : 제가 감사합니다.


반 레트 : 다시 한번 당신이 가르니에-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출간한 『사유와 운동』의 판본을 언급해두려 합니다. 피에르 몽테벨로와 세바스티앙 미라베트의 해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키메 출판사에서 나온 당신의 책 『과학에 비추어 본 베르그손』도요.


미켈 : 감사합니다.


반 레트 : 10시 48분 프랑스 문화방송입니다. 제랄딘 모스나-사부아의 “2분의 광고”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제랄딘.


제랄딘 모스나-사부아 : 안녕하세요 아델.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 레트 : 오늘 당신의 주의를 끈 책을 살펴보니, 베르그손에 관련된 책이네요. 제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스나-사부아 : 정확합니다.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주의 좋은 끝맺음인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에 관련된 이 책은 리오넬 아스테지아노의 책입니다. 이 책은 베르그손의 첫 저작인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에서부터 그의 마지막 저작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물론 그의 강의까지, 베르그손의 전 저작을 다루면서, 베르그손을 다른 철학자에 접근시키려는 대담한 기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철학자도 아니고, 여러분이 오늘 이 다른 철학자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셨는데요. 이 철학자는 스피노자입니다.


반 레트 : 네.


모스나-사부아 :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로 하나의 대담한 기획인데요. 이 양자를 접근시키는 것은 단지 두 거장 철학자를 접근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 서로 극도로 다른 두 철학자를 접근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에티카』의 체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철학자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지속, 자유를 통해 모든 독단론에 대립하는 철학자가 있는 것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들뢰즈 - 1981년 2월 3일 스피노자 강의 8)


질 들뢰즈 : 환희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신체에 맞는 어떤 신체와의 만남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것입니다. … 따라서 나는 내 신체에 맞는 이 신체를 사랑합니다. 증오가 슬픔에서 나오듯, 사랑은 환희에서 나옵니다.


모스나-사부아 : 극도로 다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해서만큼이나 스피노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제삼의 철학자가 있으니까요. 그건 질 들뢰즈입니다. 조금 전에 이 주제, “환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질 들뢰즈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번주 동안 이 주제를 환기시켜 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이 저작 속에서도 이 주제가 발견됩니다. 두 철학자를 인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환희는 환희에 속한 것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가”라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죠.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환희는 자유의 감정을 일으킬 뿐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저작의 2부는 이 질문에 답변하는 매혹적인 페이지들을 제시하는데요. 스피노자의 환희와 슬픔 사이의 구분, 베르그손의 감동과 정감 사이의 구분, 그 존재 속에 코나투스와 생의 약동을 보전하는 사태. 마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서로에게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 양자가 환희가 왜 실재의 회피가 아니라, 반대로 더 고양된 실재를 볼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반 레트 : 멋진 기획이군요. 꼭 읽어야겠네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에서 환희와 자유』.


모스나-사부아 : 네 멋진 제목이죠. 리오넬 아스테지아노의 책이고요, CNRS 출판사입니다.


반 레트 : 감사합니다 제랄딘. 감사합니다 여러분. 철학의 길이 끝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앙리 베르그손의 『사유와 운동』 시리즈가 이렇게 막을 내리네요. 내일은 “금요 철학의 길”로 돌아올 것입니다. 내일도 베르그손주의자와 함께 하네요! 철학자 까미유 리끼에가 이번에는 페기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페기의 철학, 어떤 바보에 대한 기억』. 내일 10시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생방송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이 방송을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시리즈 방송도요. 프랑스 문화방송 사이트의 철학의 길 페이지에서 방송 다시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에서 다운받아 원하실 때 원하시는 곳에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랄딘 무스나-사부아의 2분 광고도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주 제작을 맡은 니꼴라 베르제, 베르그손에게 목소리를 빌려준 조르주 클래스, 오늘 음악을 맡은 엘리즈 르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철학의 길 팀, 마리안 샤소르, 리비아 가리그, 앙뚜안 라봉, 니꼴라 브클루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여러분의 댓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학의 길은 『철학』지의 파트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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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3/4)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철학의 길 (2017년 6월 21일)


아델 반 레트 :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덥네요. 정말 덥습니다. 무기력, 녹아내림, 불쾌... 당신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사유와 운동』에서 베르그손이 전해주는 성찰들에 잠겨들기에 완벽한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베르그손은 우리가 사유와 다시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성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지성은 실재를 재단하여 실재와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사유와 접촉하는 것은 직관의 단순성을 통한 것입니다. 우리를 넌지시 앙리 베르그손에게로 데려다 줄 상쾌한 장미빛 마티니와 함께 이 프로그램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음악 : Pink Martini, Sympathique)


반 레트 : 그래도 조금은 일travail을 해 볼까요. 이건 오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르그손의 직관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직관은 어떤 작업travail의 결과물이지요. 안녕하세요, 다비드 라푸자드.


다비드 라푸자드 : 안녕하세요.


반 레트 : 당신은 파리 1 팡테옹-소르본 대학의 부교수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베르그손에 대한 책,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오늘의 주제와] 핑크 마티니와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이 노래 “공감적sympathique”입니다. 그들은, 아니 그녀들은 공감적인 것이 환상적인 일이라고 노래합니다. 베르그손에게 “공감”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희”나 “생의 약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공감도 베르그손이 중시하는 개념이죠.


라푸자드 : 네 공감도 아주 중시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방법으로서 중시됩니다. 즉 공감은... 공감은 베르그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직관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직관이 공감의 한 형태라고 말하곤 하지요. 따라서 양자가 동의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양자는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을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세계와 직관적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는 이 정의는 끊임없이 되돌아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면, 무엇에 대한 직관이 가능한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르그손은 공감을 개입시킵니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공감이, 아니 직관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접촉, 즉 세계와의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다른 사물과 관계맺게 해주는 것은 공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공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공감은 자기 자신의 운동과는 다른 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무언가의 내부로 들어가는 사태입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지성은 존재하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면서 그 사물들을 분석하고, 재단하고, 명명하고, 하나의 체계로 조직하는 반면, 공감은 말하자면 사물들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거의 엄밀함을 결여한 것처럼, 일종의 시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엄밀한 무언가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밖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 안에 반향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비를 통해서요. 따라서 나는 밖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스스로 묘사하고, 그 운동을 마치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스스로 일으킵니다. 따라서 타자, 타자적인 무언가, 음 뭐라고 할까요, 그건 춤의 운동일 수도 있고,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임의의 운동일 수도 있는데, 여하간 나는 그 운동을 내 안에서 재생하고, 그것을 재생함으로써 거기에 직관적으로 접근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닌 거군요?


라푸자드 :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하나의 인식 방식입니다. 공감이 사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운동에 접근하게 하는 한, 공감은 하나의 인식 방식에 대한 묘사입니다. 따라서 공감은 “공감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반 레트 : “함께 느낀다”는 거군요.


라푸자드 : 정확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말의 어원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함께 느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에게서 분명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모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운동시키는 것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거의...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공감은 운동의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맞습니다. 그 점을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운동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번주에 『사유와 운동』이라는 텍스트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봅시다. 이 책은 191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다양한 강연들과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니, 1911년이군요.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텍스트, 베르그손이 이 저작의 네 번째에 위치시킨 강연은 1911년 4월 10일 볼로뉴에서 열린 세계철학회에서 행해진 강연이니까요. 이 글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입니다.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직관이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의 작업의 관심은 우리가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항상 개념들은 아니라는 점을, 또한 어쨌건 개념이 반드시 지성의 사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 속에서, 25페이지 가량 되는 이 짧은 텍스트의 끝부분에서 공감이라는 이 개념을 발견합니다. 이 개념은 정확히 베르그손이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정박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죠. 당신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우리를 우리 밖으로 이끌어가고, 우리가 밖에서 목격하는 것을 우리 안에서 재생하게 만드는 이런 종류의 약동을 통해 우리와 세계 사이에 수립된 연결고리와 같은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라푸자드 : 바로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은 최근에 뇌 연구 분야에서 행해진 발견에 아주 매혹되었을 것 같습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된 발견 말입니다. 이 뉴런은 밖에서 행해진 것으로 지각된 운동을 재생하는 뉴런입니다. 마치 그것이 실제 세계 속에서 유효하게, 즉 현행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잠재적으로 재생하는 듯 말입니다. 예컨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사람은 아이에게 숟가락을 기울이면서 아이와 동시에 입을 열지요.


반 레트 : 모방mimétisme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모방의 한 형태와도 같은 것이죠. 하지만 더 심층적으로,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에 대해pour soi 재생하는 사태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에 대해”라는 말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관건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세계에 밀착시키고, 세계에 다시 매어주는 이러한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르그손은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정신은 자기 자신의 바탕에서 다른 것들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은 그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 다른 것들을 발견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네.


반 레트 : 우리에 관한 무언가를요.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공감은 우리 안에서 타자성의 한 형태를 밝혀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타자성은 사실 가장 내밀하게 구성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손은 직관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이면서도 여기서 관계를 맺는 자기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당신이 공감에 대해 정의한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무엇인지 정의해야겠군요. 다비드 라푸자드.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읽을 텍스트, 「철학적 직관」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들어보시죠. 이 구절에서 우리는“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는 베르그손의 주장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발췌문에서 베르그손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합니다. 당신이 조금 전에 든 “거울 뉴런”의 사례는 베르그손이 과학적 연구의 영역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베르그손이 쓴 그의 모든 작업들은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굉장히 많이 참조하고 정리해 두었지요. 단지 그의 사유는 변하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를 구분해둡니다. 자 들어보시죠.


조르주 클래스 : 과학은 행동의 보조이다. 그리고 행동은 결과를 겨냥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성은 원하는 특정한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특정한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과학적 지성은 사물들의 하나의 배치에서 하나의 재배치로, 하나의 동시성에서 다른 동시성으로 나아간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시한다. 혹은, 그것이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 간극 속에서 다른 배치들을, 그러니까 여전히 동시성들을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을 가지고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속으로 진입하여, 운동을 뒤따르며, 사물들의 생 자체인 생성을 채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후자의 임무는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운동에 대해 부동의 시각만을 취하여 반복하지 않는 것을 따라 반복들만을 모아들이면서 실재를 편의에 따라 잇따르는 평면들로 분할하여 인간의 행동에 종속시키는 데 전념하는 과학자는 자연을 기만하고 자연에 대해 불신과 싸움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반면 철학자는 자연을 동료로 여긴다. 과학의 준칙은 베이컨이 제시했던 것이다. 지배하기 위해 복종하라. 철학자는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공감을 추구한다.


(음악 : Bill Evans, Here's that rainy day)


반 레트 :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로 베르그손의 글을 들으셨습니다.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입니다. 10시 12분 1934년 출간된 베르그손의 텍스트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는 다양한 강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은 그 중 4번째 강연인 「철학적 직관」을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읽고 있습니다. 한편에 과학을, 다른 한편에 철학을 대립시키는 이 글은 아주 명료하네요. 조금 과하기까지 합니다. 베르그손의 작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흑백논리로 이해할지도 모릅니다. 과학은 거의... 음 나쁜 과학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반면, 반대로 철학은 직관의 편에 선다는 식으로요. 어떻게 하면 베르그손을 더 잘 이해하고, 이 점에 대한 오해를 완화시킬 수 있을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먼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의 모든 저작들이 과학을 아주 많이 참조한다는 점이지요. 그 말은 곧... 음, 우리가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을 편다면, 이건 베르그손의 첫 번째 저작인데요, 거기에는 정신생리학과 관련된 문제가 많습니다. 베르그손의 두 번째 책인 『물질과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어증이나 뇌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많지요. 『창조적 진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데요. 그 이유는 베르그손이 라마르크주의나 다윈주의의 가설들, 세포생물학의 연구들과 논쟁을 벌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과학에 대항하여 작업하기보다는 과학과 더불어 작업한다고 말이지요. 단지 베르그손은 과학의 풍부함과 풍요로움이 균등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베르그손은 자신의 작업을 전진시키기 위해 과학에 관심을 쏟지만, 과학에 하나의 한계를 할당합니다. 과학이 모든 영역에서 아무리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이 한계는 과학에 내적인 것입니다. 이 한계는 바로 지성입니다. 과학의 한계는...


반 레트 : 역설적으로 한계지어지는군요.


라푸자드 : 역설적으로. 네 맞습니다. 과학은 과학을 전진시키는 것에 의해 한계지어져 있습니다. 지성은 재조합가능하고, 분석가능하고, 재단 가능한 견고한 요소들 위에서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들은 체계들로 배치될 수 있어야 하고, 방정식들로 정돈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처럼, 물론 베르그손은 때로 그의 사유에 미묘한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지성은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의 재조합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지성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음 저는 이 한계가 인간 종의 구성적 한계라고 말하고 싶군요. 베르그손이 보기에 인간 종을 다른 동물 종들과 구분하여 특징짓는 것은 인간의 지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인 필요에 포함된 지성은 정신 속의 거의 전 영역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간 정신에 가장자리가 존재합니다. 바로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죠. 일종의 모호하지만 극도로 비옥한 이 영역이 바로 직관입니다.


반 레트 : 이 말은 곧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지성이 일종의 계산 능력이나 논리 능력으로 환원된다는 말인가요?


라푸자드 :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성은 또한 실천적이기도 합니다. 지성은 우리에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지요. 지성은 세계에 대해 행동할 수 있게 해주고, 세계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 세계를 재단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 레트 : 지성은 공간적인 것이군요. 재단한다는 것은 공간의 편에 있는 것이니까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시간을 공간이 아니라 지속의 편에서 사유하려 하지요.


라푸자드 : 물론입니다. 네, 지성은 공간적입니다. 맞습니다. 심지어 지성의 모든 생산물을 공간의 관념이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거기에는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이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은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의 기저에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바로 그 점입니다. 이미지들을 포함하여, 공간은 과학 영역에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표상하는 즉시, 우리는 사실 이 표상을 공간화하게 됩니다.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우리는 직관을 통해 접근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에 속하는 것은 전혀 공간적이지 않죠.


라푸자드 : 맞습니다. 지성은 본성상 표상적입니다. 그리고 직관은...


반 레트 : 직관도 정신 속에 위치해 있지요?


라푸자드 : 직관은 정신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직관이 전제하는 바는... 베르그손의 말처럼... 음 이것은 베르그손의 가장 유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인데요, “철학은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인간적 조건을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적 조건을 구성하는 지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해방된다는 말은 지성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컨대 지성을 일종의 관념에, 직관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직관은 모호하고, 비규정적이고, 불명료한 것이지만,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는,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예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 잠재성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들과 많은 작업이 필요합니다.


반 레트 : 벌써부터 직관을 정의하려 시도해야 하겠군요. 직관에 대한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정의를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장켈레비치 아카이브, 직관이란 무엇인가 (source :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 13/05/1967))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 직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가장 가까이서 사유하는 일종의 곡예의 기술입니다. 거의 사물 안에 들어갈 정도로, 사물 안에 들어가 있기에 더 이상 그것을 사유하지 않을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죠. 당신이 너무 멀리에 있다고 해보죠. 거리두기와 물러섬, 과도한 의식이 그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경우 당신은 진상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쪽에 위치한다면, 당신은 진리를 모든 면에서 알게 되지만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합니다. 이는 불꽃 주변의 불나방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방이 불꽃에서 멀리 떨어진다면 나방은 불꽃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 이미지는 차갑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죠. 나방이 불꽃 안에 위치한다면 나방은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불꽃에 대한 직관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고, 불꽃을 스쳐 지나가며, 불꽃과 접하는 곡예적인 기술입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그 불꽃에 의해 불타버리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진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어떤 번개같은 순간에, 진리는 우리 시각의 대상이 됩니다. 직관의 대상 말입니다. 직관 속에서 당신은 진리를 사는 동시에 진리를 사유하게 됩니다. 당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알게 되지요.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이 “행동인으로서 사유하고 사유인으로서 행동하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고 한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라는 말이고,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이 되라는 말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목소리, 아니 죄송합니다. 장켈레비치의 목소리의 어조는 베르그손이 묘사하는 생의 약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생의 약동은 결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동시에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죠. 이 목소리는 1967년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이라는 놀라운 제목을 가지고 있는 방송 중에 발화된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문화방송이었구요. 베르그손이 제안하는 정의는, 아니, 장켈레비치였죠.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손에 대한 한 저작의 저자입니다. 이 저작은 아주 훌륭하고, 접근 방식을 다각화하지요. 게다가 베르그손에게 보내는 가장 멋진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장켈레비치의 정의는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직관에 대해 말한 바를 이어가는군요. 직관은 나방이 불꽃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특정한 거리입니다. 알맞은 거리 말이죠. 너무 멀면 직관을 갖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우면 그것에 의해 불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떤 작업을 발명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점은 지금으로서는 반직관적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여기서 이 거리는 우리가 지성적인 인간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관은 단지 우리 정신의 가장자리에만 위치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보기에 작업이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발췌문에서 장켈리비치는 일종의 번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번개를 쫓아 이 번개를 다시 만나려고, 혹은 이 번개를 정식화하려고 하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직관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해볼 수도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마주쳤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컨대 우리는 생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합니다. 그리고 생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어떻게 솟아난 것인지도 모를 일종의 예감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부를 탐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다윈의 텍스트, 라마르크의 텍스트, 생물학자들의 텍스트, 자연주의자들의 텍스트를 읽고 나서, “자, 생 속에는, 그리고 어쩌면 이러저러한 사물들 속에도 생적인 측면이 있다”와 같은 가설을 그려보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가설들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을 납득해야 하구요. 수많은 청사진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정식화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건 다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정확히 그들이 말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말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 우리의 정신을 맴도는 일종의 “부정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니오”들이..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있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말하고자 하는 것 주위를 맴돌게 되지요.


라푸자드 : 주위를 맴돌고,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명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작업 속에서, 생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접근하려 한다고 해 봅시다. 베르그손은 생 속에서 생적인 것을 규정하려 하지요. 생 자체가 아니라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을요. 베르그손은 그가 시험해볼 수 있는 그 모든 가설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따라서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긍정적인 가설이 점진적으로 그려지고 점진적으로 나타나, 자신을 강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설은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이 바로 창조적 약동이라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가설을 찾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오랜 작업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그것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명명하는 것인가요? 그 가설이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명명할 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정확히 말해야겠군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반 레트 : 그러니까 그건 발견이군요?


라푸자드 : 그건 발견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우리가 조금 전에 공감에 대해 말했던 바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만, 타자적인 무언가로 발견합니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죠. 따라서 그것은 창조인 동시에 발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재이지만 너무 불명료한 선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선재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제시된 빛을 통해 수행한 작업이 이러한 불명료함을 밝히고 그 선재성에 더 많은 명료성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철학자의 작업은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을 밝혀내서 거기에 일종의 형태를 부여하는, 혹은 적어도 그 위에 말들을 부여하여 그것을 아마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겠군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적합하지 않은 수단, 즉 지성의 수단을 이용하여 타자에 속하는 것을 다시 전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네. 바로 그 점말입니다. 철학자는 직관의 편에 있지만, 또한 지성의 편에도 서있으니까요. 그리고 철학자는 자신의 지성에 호소하는 것 말고 다른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지요. 그럼 베르그손은 다른 수단이 없음에도 이 수단을 규탄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장켈레비치의 나방과 같은 것입니다.


반 레트 : 네.


라푸자드 : 베르그손은 그와 동시에 직관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직관으로 되돌아간다는 조건에서요. 한 번 직관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죠. 이 직관은 길잡이입니다. 그건... 우리는 지성을 발휘할 때는 언제나 직관과 가까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반 레트 : 이 점이 베르그손으로 하여금 이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 가운데 하나를 쓰도록 만들었나 보군요.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이런 설명을 제시합니다. 결국 철학자가 말하려 하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점이고, 이 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철학자는 그것을 말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말이죠. 단순성이 결국에는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고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매우 매우 풍요로운 것이라는 이 관념에 대해, 조르주 클래스가 읽는 베르그손의 텍스트를 들어보시죠. 


클래스 : 우리가 철학자의 사상 주변을 도는 대신 그 속에 더 자리잡으려 할수록, 우리는 그의 학설이 다음과 같이 변형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복잡성이 감소하고, 다음으로는 학설의 각 부분들이 서로의 내부로 들어가, 결국에는 하나의 단일한 점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이 점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점차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리라는 점을 느낀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공하는 것을 정식화하면서 그의 정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그러고 나서는 그의 수정을 또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따라서 이론에서 이론으로 교정을 거듭하며 그는 완성되어 간다고 믿었으나, 그가 했던 일은 단지 복잡성이 복잡성을 불러오고 전개가 전개에 병치되어 놓이면서 그의 본원적 직관의 단순성을 상승하는 근사치로 되돌려주었던 것뿐이다. 따라서 그의 학설의 무한히 증가할 복잡성은 그의 단순한 직관과 그가 이 직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들 간의 통약 불가능성에 불과하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이미지이지만,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철학자의 정신에 출몰하는hante 것이고, 그의 사유의 우여곡절을 통틀어 그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것이며, 직관 자체는 아니라 해도 필연적으로 상징적인 개념적 표현보다는 훨씬 더 직관에 가까운 것이다. 직관은 “설명들”을 제시하기 위해 이 이미지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음악 : Bugge Wesseltoft, Road home)


반 레트 : 직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철학적 직관은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오늘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에서 우리는 이 일에 도전하려 합니다. 「철학적 직관」은 베르그손이 1911년 행한 강연의 제목입니다. 이 글은 1934년 출간된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이 모음집을 다룰 것인데요.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합니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 문장들이 요약하는 바, 아니 설명하는 바, 아니 표현하는 바는... 여기 있는 것을 표현하는 어려움에 대해 베르그손이 말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 적절한 용어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여하간 이 문장들이 표현하는 바는 철학적인 몸짓 자체, 탁월한 예술적인 몸짓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는군요.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단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이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쓰고 또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고 또 작곡하면서 생을 보낸다는 말이니까요. 사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관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성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구요.


라푸자드 : 네. 그렇지만 이미...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것이 쉬운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죠. 쉬운 것은 바로 지성이 우리 인식의 가능한 재조합을 통해 접근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식들을 마음대로 재조합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해독하려 합니다. 반면 단순한 것은 끝점에서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서 우리가 작업에 대해 말한 바와 겹쳐집니다. 교수에 대해 말할 경우에 이 점이 두드러지죠. 가장 단순한 교수들, 가장 어려운 것들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말하는 데 성공하는 교수들은 가장 많이 작업하는[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마지막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작업을 거친 이후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고, 일종의 그림자처럼 작업의 전 과정동안 작업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그 단순성 자체에 있어, 그 응축성 자체에 있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발견되는 관념은... 뭐라고 할까요, 베르그손주의의 골격이 되는 관념입니다. 우리가 더 고양될수록, 우리는 한층 더 단순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 더 밀도있고 응축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압축하여...


반 레트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습니다. 맞아요. 극도의 밀도를 갖는 점이죠.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이 단순성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더 분산되고 더 공간화되며 정신의 강렬한 생을 더 이완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단순성은 이런 종류의 극도의 밀도를 가진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접촉하고 있으면서도 지성에 의해 이로부터 분리되어 있지요. 지성은 본성상, 그러니까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성의 본성입니다. 지성은 본성상 공간화할 수밖에 없고, 다시 말하면 재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최소의 노력을 향해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단순한 것을 향한 이 노력을 줄곧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의 말을 들으니 왜 베르그손이 논리혐오의 길에 빠지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논리혐오는 지성이 우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데려갈 수 없고 직관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성에 대한, 지성에 대한 증오를 갖는 것이지요. 왜 신비주의에 빠져서 일체의 철학적 작업, 그러니까 이성의, 지성의 작업을 몰아내면 안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제 생각으로는 철학에 내속적인 일종의 교육론이 이 지점에 있습니다. 몇몇 개인들은 아마도 충분히 강하고 강렬한 직관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신비가들의 경우나, 베르그손의 말하는 것처럼 몇몇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시각을 가지고, 사태를 지성의 재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실천적 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직관에 의해 전복되는 이러한 특권을 갖지 못한 채로 언제나 지성의 양태들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작업을 통해, 고된 일을 통해, 겸허한 희생을 통해 이 직관에 도달하여 그것의 덮개를 벗겨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반 레트 : 직관을 표현하기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군요. 그런 이유로...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이 지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구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선택지가 없는 동시에, 베르그손에게 이것은 단지 예술가, 신비가와 같은 예외적인 존재들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과 직관적인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텍스트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표현되는 이 “매개적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반 레트 : 여러 마디로 말하셔도 됩니다(웃음).


라푸자드 : 네. 여러 마디로 말해도 되지만(웃음), 뒤이어 설명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그건 일종의 몸짓geste입니다. 그건 철학자가 수행하는 몸짓이지만, 철학자가 그것을 수행하는지도 모르면서 소유하고 있는 몸짓이죠. 그것은... 하지만 이 몸짓 자체는 결코 직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건대 직관은 불가지한 것의 한계에 위치해 있고, 이 몸짓은 베르그손이 “매개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이미지는 개념 너머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철학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철학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경계에 있는 것입니다. 지성의 산물인 한에서 철학은 개념들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직관과 지성 사이에는 일종의 매개적인 영역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 장소에서 이미지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철학의 발생적 운동을 수용하려 하는 이미지들을 말이죠.


반 레트 : 이건 심적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시각적 이미지인가요? 그러니까 무언가에 대한 시각적 표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미지 말입니다. 아니면... 아니면 심적인 이미지인가요. 예컨대 이 이미지가 하나의 회화, 그림을 의미하는 건가요?


라푸자드 : 아닙니다. 그건 심적 이미지입니다. 동시에 이 이미지는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이미지를 빌려올 수는 있습니다. 어떤 운동을 표상하느냐에 따라서요. 말하자면 어떤 움직임이냐에 따라서 말이죠.


반 레트 : 예컨대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어떤 이미지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까요? 아니, 베르그손은 이미지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나요?


라푸자드 : 그건... 음 베르그손 자신이 사용했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죠. 이건 사실 베르그손이 드는 흔치 않은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그가 다른 영역에서는 사례들을 들긴 하지만요. 베르그손은 「철학적 직관」에서 버클리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버클리의 저작을 오랫동안 애독한 뒤에, 그러니까 오랜 작업 뒤에, 버클리의 저작 속에 제시되어 있는 가설들과 주장들이 어떤 것인지 검토한 뒤에, 서로 결부되어 있는 두 가지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말합니다. 그 중 하나는 물질이 일종의 투명한 막과 같다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지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버클리는 관념론 철학자이지요. 분명 베르그손이 많이 읽었던 철학자구요. 베르그손은 이 강연에서 버클리에게 몇몇 페이지들을 할애합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베르그손이 언제나 철학사를 참조하고 있다고 해도, 왜 베르그손이 특히 버클리를 다루고 있는지 물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버클리 또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직관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지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버클리는... 버클리가 만들어 낸 철학 전체를 통틀어 버클리가 찾던 것은 일종의 신과의 직접적 접촉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말하자면 이 중심적인 점을 어떤 이미지 속에서 다시 붙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신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러한 비물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버클리는 물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다른 이미지도 참조해볼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아마 더 생생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생의 약동, 즉 모든 생명체에 내속하는 생명성을 수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편들로 폭발하고, 이 파편들이 또 다른 파편들로 폭발하는 어떤 포탄의 관념입니다. 이것은 역동적인 이미지, 자연 속에서 전개될 수 있었던 다양한 형태들과 종들을 가로질러 영구히 폭발하고 있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한 잔의 물 속에 녹아드는 설탕 조각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베르그손은 지속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하지요. 우리가 물 속에 설탕 조각을 넣을 때, 우리는 설탕 조각의 완전히 용해되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압축할 수 없는 시간이 바로 베르그손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이 이 텍스트에서 설명되는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단지 교육적 은유일 뿐인가요?


라푸자드 : 저는... 교육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이미지는 사유의 대상이 가진 역동성, 운동에 속하는 어떤 지점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우리의 정신을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과의 공감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지요. 마치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어떤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아마도 그에 대한 직관에 합류할 수 있겠죠.


반 레트 : 그 때문에 베르그손이 펼쳐내는 귀중한 자원들이 그의 문체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군요. 어쨌든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죠. 1959년 RTF에서 이루어진 대담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메를로-퐁티 아카이브, 베르그손의 문체 (source : Henri Bergson, 19/10/1959, RTF))


모리스 메를로-퐁티 : 베르그손에게는, 직관적 철학자의 면모와 논쟁하는 철학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논쟁하는 철학자는 이전 철학이나 상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철학자입니다. 사실 이 두 철학자는 상당히 다릅니다. 베르그손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 학계의 교양은 가장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발표 중의 우아함이나 섬세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논증의 영역에 있다고 느낍니다. 그때 베르그손은 아주 능수능란하고 설득력있지요. 그런데 갑자기 몇몇 단어들이 탐사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 예술의 특정 기법들과 다행스럽게 마주치기에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이 자연에 선행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의 문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문체는 어떤 순간에는 언제나 연마되어 있고, 언제나 우아한,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다소 학적이기도 한 문체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문체는 제 생각으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특질을 갖습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힘과 활력이라는 특질을 갖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직관에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음악 : Keith Jarrett, Rio part IX)


반 레트 : “베르그손을 묘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가 분명히 유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언제나 반쯤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언제나 그가 보고 있는 형태를 아주 어렵게 기술하고 있는 사람의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고뇌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뒤섞여 있는 덩어리에서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양 엄지와 검지를 움직였다.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확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마치 베르그손이 사태의 혼란스러운 흐름 속에서 극도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특정한 곡선을 볼 수 있는 것 같았고, 베르그손은 아주 주의깊게 말을 고르고 은유와 묘사를 사용하였기에 다름아닌 그가 보고 있는 곡선의 정확한 형태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형태의 진술일 것이다. 베르그손은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각자의 사람이 계속해서 강연자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반쯤 감긴 눈, 고뇌하는 듯한 휴지,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듯한 엄지와 검지의 몸짓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문학비평가 토머스 에르네스트 흄Hulme이 기술하는 앙리 베르그손의 일화입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볼로뉴 강연에 참가했었죠. 이 강연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으로, 우리가 이번주에 다룰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음, 우리는 조금 전에 베르그손의 두 문체를 구분하는 메를로-퐁티의 목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논쟁하는 베르그손과 직관적 베르그손이 있었죠. 말하자면 갑자기 별안간 나타나는 시적인 약동을 가진 베르그손 말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제가 그 뒤에 읽은 흄Hulme의 글과 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주 우아하고, 거의 학적인 논쟁하는 사람인 동시에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을 향하는 직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거의 완전히 인격을 바꾸는 것 같네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저는... 제가 읽었던 내용에서는,


반 레트 : 앗, 처음 보시는 건가요?


라푸자드 : 예. 책에 실린 내용밖에 알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 두 발췌문에서 충격적인 점은 어떤 애착... 정확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애착입니다. 직관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모호하고 흐릿하고 비결정적인 무언가이기는 커녕, 물론 직관이 비결정적이고 불가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직관은 우리를 정확성을 향해 인도하고, 정확성을 향해 밀어갑니다.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구절들, 번개와도 같은 통찰력의 묘사들은 사실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커다란 정확성의 순간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정확성을 가장 높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 사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 사물을 생각할 때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 모음집의 첫 번째 논문에서부터 철학사에서 정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지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개념의 일반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식이지요. 


반 레트 : “철학사에서 가장 결여되어 왔던 것은 정확성이다.” 이것이 이 모음집의 첫 문장입니다.


라푸자드 : 맞습니다. 정확히 그러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위해 재단된 의복은 정확히 이 사물을 위해 재단되어야 하고, 다른 어떤 사물에도 맞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그것은 아주 우아하고 현대적인 형태의 충족이유율입니다.


반 레트 : 맞아요. 그리고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정확성이 꼭 지성의 편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 말이죠.


라푸자드 : 네 그렇습니다. 정확성은 바로... 음... 베르그손은 라베송에 대한 텍스트에서 자신이 전통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는데요. 거기서 베르그손은 추상적 관념을 정의하는 두 가지 방식을 언급합니다. 한편으로, 추상적 관념, 예컨대 색의 관념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것입니다. 이 색들은 모두 구체적인 관념이기 때문이죠. 이 경우 추상 관념은 어떤 내용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한편으로 색의 관념은 구체적인 흰색 빛과 일체를 이룹니다. 이 빛은 프리즘을 통해 모든 색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완벽히 구체적인 이런 흰색 빛은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각각의 구체적인 색들은 모두 이 빛이 갖는 하나의 뉘앙스라거나 하나의 정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유해야 할 사태는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적 실재의 등급들이 됩니다.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이러한 것입니다. 실재 전체는 지속이라는 요소의 내부에서 사유되며, 각각의 구체적인 실재들은 지속이 갖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완전히 정확한 하나의 리듬이 됩니다. 물론 어떻게 각각의 실재가 그 자체로 지속의 특별한 리듬인지를 포착하려면, 이 지속과 가능한 한 직관적인 접촉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반 레트 : 직관 덕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왜냐하면 지금은 실재를 감각하는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시니까요.


라푸자드 : 직관 덕이지만, 공감이 수반되는 직관이어야 합니다. 그건...


반 레트 :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죠. 자신의 고유한 직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미 이 직관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당신이 말하는 리듬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정도에... 뉘앙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겠죠.


라푸자드 :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우선은 이런 것이죠.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리듬을 맞출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 리듬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베르그손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점은, 물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물질인 바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생 속에 있는 생명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 안에서 생명적인 것을 발견해야 하지요. 기타 등등. 따라서 베르그손이 사유한 모든 것, 즉 물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것, 생명적인 것, 사회적인 것... 베르그손이 이것들을 사유한 것은 단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상응하는 것들로... 평행하는 것들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는 이건 우리가 친구와 교제할 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관건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있던 친구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니까요. 우리는 그 친구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그만의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몸짓, 혹은 존재 방식이 그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죠. 


반 레트 :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용어를 통해 베르그손의 저작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사르트르 아카이브, 철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소명vocation은 베르그손에서 왔다 (source : diffusé le 21/04/1980, 사르트르의 죽음 며칠 전, TF1))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 왜 문학이 아니라 철학 쪽으로 방향을 잡으셨던 건가요?


장-폴 사르트르 : 아, 그건 베르그손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장애를 가지신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콜로나디스트리아라는 분이죠. 그는 첫 번째 작문 주제로 “지속의 감정”을 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베르그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책이었죠. 저는 그 책들에 사로잡혔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철학은 엄청난 것이구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베르그손을 거의 베낀 작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베껴쓰는 일은 잘 없지만,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베르그손이 진리를 말했는데, 왜 내가 다른 말을 해야 하지?” 그래서 저는 거의 요약에 가까운 작문을 제출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 어떤 성적을 받으셨나요?


사르트르 : 망했었지요. 그보다 2년 전에 저는 철학 수업에서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는지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일차적으로는 작가였지요. 그런데 철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도래했습니다. 이건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철학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음악 : Bill Fleming, Vim vigor and vitality)


반 레트 : 네. 생명성, 혹은 어쩌면 생의 약동. 베르그손은 이 생명성 혹은 생이 가진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신 바에 따르면요. 우리도 여전히 이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이 탐색을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내일은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 주의 기획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오늘 우리와 함께 「철학적 직관」에 대해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푸자드 :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반 레트 : 아주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베르그손을 읽고싶게 만들어 주시는군요. 청취자 여러분도 『사유와 운동』에 빠져보도록 하십시오.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판매중입니다.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다비드 라푸자드의 책,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도 읽어보시죠!


(음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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