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 자유 문제의 변천 1강 1904/12/06 (1)



여러분, 


이미 내가 작년에 예고했던 것처럼, 우리가 올해 다루게 될 것은 고전적 자유의 문제이다.

첫 번째 강의는 필연적으로 모호한 일반성들에 할애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벌써 즉각적으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자유의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이론의 편을 들어 해결책을 속단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면, 자유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유의 문제를 정의하는 일은 아마도 훨씬 쉬운 일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해 어떤 의견을 제기하건, 그리고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건 간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 가지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가 우리 행동에 내속적이거나 내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성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직접적 의식에 주어지는 성질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고voulons 하자. 그러면 이 의지volonté의 내부에, 말하자면 이 의지에 내재적으로, 우리가 자유의 감정이라고 부르는 어떤 감정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자유는 의지가 행동할 때 직접적 의식에 의해 주어지는 실재적인 혹은 표면적인 감정이다. 다른 한 편, 만일 자유의 문제가 존재한다면, - 그리고 자유의 문제는 존재하는데 - 반성réflexion이 개입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문제는 반성에 대해서만, 반성적 사유에 대해서만 제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의 문제는 분명히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사유의 대면으로부터 생겨나고, 도출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사변에 제기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왜 행동은 사변에 이 문제를 제기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것들이 일치한다면, 하나는 다른 하나에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두 능력들 혹은 이 두 기능들이 절대적으로 서로에 의해 규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자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어떤 방식으로도 속단하지 않는다면,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 “행동”과 “사변”이 서로에 의해 규제되지도 않고 규제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다.


행동을 고려해보자.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한 사례로 어떤 의지적인 행위, 일어서는 행위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는 일어선다. 이것은 직접적 의식에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의지적 행위이다. 이 행위의 가장 명백한 성질은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단순한 무언가라는 점이다.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절대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것은 절대일 수 있다. 실로 그 의지적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닫혀 있는 어떤 것, 닫힌 체계이다. 나는 그 행위가 불가분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서려는 의도 이후에 일어서는 행위 자체가 오고, 그 후에 실행이 온다는 식의 구분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많은 계기들을 구분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단순 행위에 대한 서로 다른 연속적 관점들일 뿐이다. 우리는 의지의 행위가 단순한 무언가라고 말할 수 있다.


훨씬 더 복잡한 사례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한 기간에 걸쳐 뻗어 있는 행위들을 생각해보자. 예컨대 한 시간 동안 자유에 대해 말하는 행위 말이다. 여기 있는 것은 원하는 만큼의 부분들로 분할되고 나누어질 수 있는 하나의 행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지향intention, 단일한 지향이라는 의미에서 단순한 행위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우리는 거의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즉 마치 수정란이 무한히 분할되어 생명체들을 탄생시키는 것처럼, 하나의 불가분적 지향이 발화되는 만큼의 계기들로 굴절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운동이며, 동일한 추동력poussée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의지적 행위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것이며, 어쨌든 그것은 닫혀 있는 어떤 것, 그 자체로 충분한 어떤 것처럼 드러난다. 바로 이 점이 의지는 언제나 통일체unités로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정식화하고자 하는 점이다. 의지는 언제나 통일체와 관련된다. [반면에] 반성적 지성은 언제나 두 사물을 필요로 한다. 지성에게는 둘이 필요하다.


반성적 지식, 더욱이 지성 일반은 지성과의 대립을 통해, 그것이 두 항을 필요로 하며 통일체가 아니라 쌍couples과 관련된다는 이 두드러지는 성질을 통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에게는 한 쌍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성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전 영역에 걸쳐 가시적이지만, 만일 다양한 지성적 기능들을 열거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단지 모든 지성적 행위들에 공통적인 표현, 그것들의 공통 척도만을 고려해보면 된다. 모든 지성적 행위는 명제로 정식화될 수 있으며, 명제는 두 항을 포함한다. 주어와 술어. 어느 하나의 항이 지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천만에! 하나의 항은 지성이 고려하는 것의 절반에 불과하다. 지성은 언제나 이 항을 다른 항을 통해서 보충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지성은 한 쌍을 필요로 한다. 램프를 예로 들어보자. 램프는 … [그러면] 여러분은 내게 물을 것이다. 뭐냐? 램프가 무엇이라는 것이냐? 만일 내가 … 켠다면, 여러분은 내게 물을 것이다. 무엇이 켜져 있는 것이냐? 뭐냐? 지성이 만족하기 위해서는 두 항이 필요하다. 램프가 켜져 있다. 아! 명제가 완성되었다. 정신은 명제 속에 머물고, 그 속에서 한 쌍을, 즉 서로를 보완하는 두 항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철저하고, 근본적이고, 명시적이며, 외적인 차이가 있다. - 두말할 필요없이 여기서 나는 외적 차이들에 만족할 것인데, 그것은 문제의 바탕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의지와 지성 사이에는 매우 명시적인 외적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평행 조건의 차이라고 부를 것이다. [두 경우에] 평행의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의지는 서 있는 사람과 같이 하나의 지점에서 평형을 유지한다. 의지는 단일한 자리를 점유하며, 그 자리는 그의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자리이다. 나는 지성의 평형을 평행봉을 든 줄 타는 곡예사의 평형에 비유하려 한다. 이 평형은 가능한 두 추락, 왼쪽과 오른쪽 사이의 진동으로, 가능한 두 운동 사이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가능한 두 위치의 이원성이 바로 그의 평형을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지성에는 언제나 두 항이 필요한 반면, 의지에는 단지 한 항으로 충분하다.


지성에는 두 항이 필요하다는 말에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 지성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이 두 항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줄 타는 곡예사의 평행봉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 평행봉은 내가 말한 바 있는 두 가능한 추락 사이의 연결 부호(하이픈)와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언제나 연결 부호를 필요로 하며, 그것이 관계하는 두 항 사이에 연결 부호를 수립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모든 지성적 행위가 하나의 종합이라는 말로, 단지 두 항 사이의 종합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내가 방금 전에 발화한 것과 같은 명제 속에는 램프라는 주어와 켜져 있다는 술어가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두 항 사이에 정신이 수립한 하나의 관계가 있다. 따라서 모든 지성적 행위는 두 항의 종합이며, 이 항들은 이렇게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시간 속에서 잇따르는 사건들, 사실들에 관련될 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 정확히 이 지점이다. 정신은 언제나 쌍들을 찾으려 한다. 그 쌍들은 우리가 앞으로 정의하려 시도할 특정한 성질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그 쌍의] 한 쪽 편을 원인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 편을 결과라고 부른다.


사실들을 사유하는 것, 사건들을 사유하는 것.. 그것들은 따라서 두 항 사이에, 더 나아가 무한한 항들 사이에 인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각각의 항들은 우리가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고려하느냐에 따라 원인이 되거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전에 제기했던 사례로 돌아가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어서기를 원한다. 나는 일어선다. 여기에는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실현하는 지향이고, 직접적 의식의 관점에서 그 자체로 충분한 무언가이다. 직접적 의식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는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한다. 지성에게는 한 쌍이 필요하다. 사유는 이 행위를 이전의 상황과 연관지으려 한다. 나는 일어선다 … 더웠기 때문에 … 열을 싫어하기 때문에 ….  이것들은 서로 결합되어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일련의 이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렇게 구성된 상황은 행동과 함께 지성이 머무는 한 쌍을 형성한다. 따라서 직접적 지성에게는 그 행동이 그 자체로 충분한 하나의 절대인 반면, 반대로 반성적 사유에게는 행동이 반성적 사유의 모든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두 항 중 하나를 취했을 때 그로 인해 다른 하나의 항이 결정되는 방식으로 하나의 쌍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더 정확한 형태로, 그러나 결코 다르지는 않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우리의 지성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인과의 얽힘, 원인과 결과의 짜임을 사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그 두 항이 서로 얽혀 있는 한 쌍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그 요소와 그 사건이 말하자면 상호 결정되어 있는 자연을 사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면, 우리의 직접적 의식은 -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관련되는 한에서 - 일종의 절대로 보이는 자기충족적 항들에 결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의 문제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기능,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사유의 대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직접적 의식은 자기충족적인 항들, 통일체들에 관련되고, 반성적 사유는 서로 결합되어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고 상호 결정하는 자연을 형성하는 쌍들, 이원성들에 관련된다.


나는 이 두 기능이 즉각적으로 서로 다른 성질들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성질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상호 배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여러분, 우리가 막 이 두 기능들 사이에서 주목한 간격을 더 가까이에서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간격을 측정하려 노력할수록 그것은 줄어들기는커녕 반대로 더 커질 것이다.


나는 즉시 우리가 도달할 결론들 중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결론은 이전 강의에서 우리가 이미 도달했던 것이다. 나는 즉시 의지와 오성 사이, 즉 [한편으로는] 의지 혹은 우리가 의지에 대해 갖는 직접적 의식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삽입되는 이 의지의 산물에 대해 작용하는 오성 사이의 이 간격에 대해 가장 정확한 것처럼 보이는 공식을 제시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행동은 시간 속에서 수행된다. 그것은 명증적인 것이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지속하는, 시간의 총체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은 시간 속에서 생산된다. 반성, 지성은 시간을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삼을 수도 없다. 시간은 반성적 사유의 손아귀를 절대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확증하고 그것의 귀결들을 전개하는데 한 해를, 아니 두 해를 할애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지성은 시간을 포착할 수 없다. 우리가 시간을 표상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공간 속의 선을 보게 되며, 이것은 지속하지 않는 어떤 것,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이다. 물론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고쳐 말하려 할 것이다. 거기에 운동을 도입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사유가 이 운동을 포착하고자 할 때, 시간 속에 있는 것을 포착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유는 결코 하나의 위치 이상을 포착할 수 없다. 그 점의 한 위치, 그리고 나서 다른 위치, 그리고 나서 다른 위치,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언제나 위치들을 포착할 뿐, 결코 운동을 포착할 수는 없다. 그 운동체가 위치를 바꾸기만 한다면, 적어도 한 위치와 다음 위치 사이에 운동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운동을, 한 위치에서 다음 위치로의 이 이행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고려된 간격 사이에 또 다시 위치들을, 언제나 무한히 증가하는 수의 위치들을 추가할 것이다. 이 위치들은 무한히 운동의 이미지 혹은 운동의 모조품에 가까워질 것이다. 운동 자체는 우리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격을 수축시켜 운동을 붙잡았다고 믿는다. 마치 아이가 손으로 연기를 잡으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으려는 두 위치 사이로 연기는 빠져나가고, 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유를 통해 시간 자체를 붙잡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는 상징들은 필연적으로 부적절한 상징들이다. 만일 내적인 삶을 예로 든다면, 이 삶은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실재적 지속이 존재하는 것은 …. 음, 이 지점으로는 조금 후에 되돌아오도록 하자. 우리는 실증 과학에서 문제가 되는 시간이 지속하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인 바 있다. 실증 과학에서 문제가 되는 시간은 단지 원점에서 출발한 직선 혹은 곡선 위에서 계산된 길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학이 고려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성들, 즉 이 선 위의 점들과 다른 선들 위의 점들 사이의 상응이다. 상응 말고는, 동시성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공간만이 존재한다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 속에는 직선과 곡선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형이상학에서도 모든 일은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선 외적 시간은 과학과 지성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내적 삶이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지속의 흐름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 행동은 이 지속 속에서 수행된다. 그러나 지성이 행동에 주의를 집중할 때, 그 사실 자체로 인해 지성은 행동을 정지시키고 고정시킨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지성은 내적인 삶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붙잡을 수 없다. 지성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 뿐이다. 지성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유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사유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는 시간 속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은 시간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이다. 행동, 그것은 현재이며, 현재는 이미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침식이다. 현재는 미래를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기울어짐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정의 자체이다. 그리고 만일 지성이 시간 속에 있다면 그것은 과거 속에 있지 미래 속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이미 만들어진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지성은 현재 속에 있지도, 과거 속에 있지도 않다. 지성은 시간 밖에서 활동한다. 지성에게는,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지성에게는 쌍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쌍들 사이의 관계는 비시간적인 것이거나, 우리가 그것을 고려하는 순간에는 비시간적이라고 가정되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하는 일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철학자들이 말해왔던 것을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성이 보편적인 것, 일반적인 것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일반성들을 사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특정한 시간 속에 있지도 않고,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의식은 다른 것을 위해 만들어졌다. 직접적인 의식은 개별적인 것singulier, 직접적인 것을 붙잡는다. 그것은 시간, 시간 자체의 전개를 구성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직접적 의식에 주어지는 한에서의 직관과 통상적으로 작동하는 반성적 사유 사이에 간격이 있는 이유이다. 그 간격은 우리가 그것을 더 가까이에서 붙잡을수록, 그것을 더 가까이에서 붙잡았다고 생각할 수록 증가하는 것이다.



Henri Bergson, 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4-1905, PUF,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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