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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0.05 엘리 뒤링 - 철학의 비정상성에 대한 주석 (베르그손의 한 강의로부터)
  2. 2018.10.05 베르그손 - 기억 이론의 역사 1강 1903/12/11

엘리 뒤링 - 철학의 비정상성에 대한 주석 (베르그손의 한 강의로부터)

[옮긴이 주. 이 글은 베르그손의 1903년 12월 11일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 대한 주석이다. 이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이 점을 반복한다. 철학은 특별한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를 거부한다. 우리가 권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특정한 사유방식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각주:1] 그러나 어떤 노력인가? 기실,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동시적인 노력이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1903년 12월 11일의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각주:2] 그 후 철학적 활동의 변별적 특징화--이것이 바로 이 강의의 주제인데--는 "두 방법들", 즉 과학의 방법과 철학의 방법 사이의 구분을 통해 정확해진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노력들에 대한 이 첫번째 이미지는 인식의 두 이상들 사이, 별개의 두 영역의 규범성 사이의 정적 대립에 이르기는 커녕, 관계적이고 강도적인 측면을 간직한다. 이 이미지는 보충관계 이상의, 물리학적 의미에서 힘의 결합과 같은 무언가를 암시한다. 어쨌든 이 이미지는 사유의 일상적 방향의 "역전"이라는 여전히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방적인 이미지를 복잡화한다. 과학과 철학 간의 성공적인, 혹은 실패한 만남에 대한 성찰들을 일상적으로 부양하는 상대적 운동의 비유들 너머에서, 사태를 역동적으로 고찰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자.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업의 일상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각주:3] 같은 해, 조금 앞서 출간된 「형이상학 입문」의 유명한 이 공식은 우리에게 생성의 실재성을 놓치게 만드는 지성적 습관들의 영향력을 해체할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행 방향을 "뒤집어", "뚜렷한 윤곽을 지닌 개념들"에서 출발해서만 실재에 다다르는 작업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표적은 개념적 사유 자체, 혹은 개념적 사유가 포함하는 규정성의 요구라기보다는, 우리를 개념들에서 시작하도록 만들고, 개념들을 때로는 궁극 범주들처럼, 때로는 실재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을 실재의 기준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측정기나 체처럼 기능하도록 하는, 요컨대 개념들에서 계속적인 구성물이라는 쟁점을 발견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규정된 위치들과 기능들로 응고시키는 운동이었다. "실재의 모든 굴곡을 따르고 사물들의 내적인 삶의 운동 자체를 채택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들"[각주:4]에 호소하는 모순어법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난점은 여기에 있다. 유동적인 개념들도 여전히 개념들이다. 그리고 이 개념들이 삽입되는 사유의 운동은 갑작스런 분기를 통해 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지성주의의 사면을 거슬러 오르는 데 열중한다.[각주:5]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유의 운동이 그 방향을 역전시킨다 해도, 그것은 사실상 주도적인 계수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동일한 선을 따라 작업한다.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가했던 사람들은 이 점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은 더 해명할 필요가 있다. 1903년의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과 명시적으로 아주 가까운 용어들로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을 구분하며 시작함으로써 사태를 정확히 한다. 한편에는 과학적 인식이 연장하는 "일상적인 인식"의 노력이 있다. 이것은 고체, 부동성, 고정되고 명확한 윤곽을 지닌 실재들을 향하는 인식이다. 다른 한편에는 운동의 운동성 자체--베르그손이 "실재적 변화"라고 부르기에 이르는 것--에 대한 포착이 요구하는 특별한 노력이 있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인식 기법"[각주:6]은 우리의 고유한 활동성이 증언하는 가능성, 즉 우리 안에서 원하는 대로 특정한 운동을 생산할 뿐더러 그 운동을 우리 밖으로 투사할 가능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적 공감 작업"을 통해 그 운동을 우리 밖에서 생산되는 것으로서, 그러니까 공간 속에 펼쳐지는 기하학적 선의 형태가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한 쪽 끝에서는 그것을 만들어낸 운동에, 그러니까 지속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경험할 가능성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 기하학적 선의 자취를 정신적으로 (다시) 주파할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이러한 작업이 요구하는 노력은 이 작업이 사물을 현장에 되돌려놓기 위해 "자연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야"[각주:8]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유가 자연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은 사유로 하여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재구성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발생을 반대로 개념화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일련의 친숙한 대립들이 반대되는 방향이라는 말로 정식화된 이 첫번째 구분을 강화한다. 과학은 분석을 특권화한다. 과학은 정확히 결과물들, 즉 일단 운동이 실현된 후에 그 운동이 남긴 자취들에서 출발하여 작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직관은 직관에 의존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베르그손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이 특성을 설명하는데, 이 사례들은 직관의 전면적이고 총괄적인 성격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내밀하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마치 총괄적인 것처럼" 안다. 하지만 한 영혼의 형태,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영혼의 거동을 "표현하기에는 어떤 말도 충분히 단순하지 않다."[각주:9]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표현을 빌자면, 좋은 화가는 모델로부터 그 모델의 독자적singulière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물결치는", "구불거리는" 선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발생적 선"[각주:10]은 형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 선은 한 개인의 다양한 가시적 형태들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이자 단순한 행위 혹은 운동을 번역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전반적인 음조는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21세기 초에 뒤쳐진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강의의 정확히 이 부분에서 이 철학자는 우리를 위한 놀라움을 준비해 두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면역체계의 환기를 위한"추가접종piqûre de rappel"이라는 의미에서--하나의 환기rappel을 준비해두었다. 철학과 예술(모성애의 사례를 고려한다면 여기에 "감정"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에는 "중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철학적 직관은 바로 개체적인 것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철학적 직관,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범주, 유들과 관련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새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자문한다거나, 그 얼굴 생김새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들, 물질의 문제, 의식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사변할 것이다. 이것들은 분석의 결과들이라기보다는 철학자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하는 직관들이다."[각주:11]

귀중한 환기점이다. 베르그손주의가 우리를 추상들로부터 떼어내어 곧장 독자성의 영역으로 향하게 한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사유의 개별화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혼동한 모든 사람들은 이 환기점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일반 관념의 학문으로서 철학의 전통적 개념화에 대한 비판은 진정한 개체성을 드러내는 질적 차이에 접근할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함을 고발하는 베르그손의 빈번한 언급과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일반성의 요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적인 것générique의 요소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된다. 철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유들, 실재의 층위들 혹은 영역들, 경험의 폭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경험 자체나 예술의 작업을 대체하여 우리에게 개별적 실재들을 포착하게 한다고 자처한 바가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직관은 지성적 활동의 평면 위에 감성을 중복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우선은 방법, 즉 개념들의 기예로서의 무언가이다. 더욱이 이러한 방법은 이중적이다. 베르그손은 곧장 이 점을 설명하려 애쓴다. "방법은 이중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철학사로의 회귀와 학설들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각주:12] 이것이 바로 "지성주의적 환상에 대한 지성적 반대급부"[각주:13]이다. "거짓 문제들"의 해명, 그리고 우선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 요컨대, 이차적인 분석. 그러나 또한, 그리고 동시적으로, 베르그손이 다른 곳에서 사실상 문제들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체계들의 역사.[각주:14]

하지만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이러한 비판적 차원이 철학적 활동이 배양되는 인식의 생산 과정에서 그가 분석적 기법들에 인정하는 충분히 긍정적인 성격을 시야에서 놓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언어편중주의verbalisme의 비판, 개념들의 단순한 조작적 변증법에 머무는 이론들에 대한 거부가 분석이 필연적으로 관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분석은 관찰과 기술 작업을 통해 사실들을 도출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케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실증 과학이 철학에 주는 이점이다. 실증과학은 이론들을 생산하기에 앞서 훌륭한 소여들의 공급자이다. 의식의 직접 소여 옆에는 에너지의 감소나 기억의 질병들에 관련된 물리학적 질서나 생리학적 질서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실증 과학이 없다면 철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학이 몇몇 지점들에서 과학의 현 상태와 충분히 동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들을 충분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15]...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방법이 문제시되는 경우, 특별히 출발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발점의 선택은 운동 방향만큼이나 결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들로 시작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들이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철학적 이점을 은폐할 수 있는 합리화를 덧붙임으로써 사실들을 특정한 관점 속에 넣는 과학 이론들의 틀 속에서 제시된다 하더라도, 사실들을 경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철학적 직관이 운동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을 동반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분석이야말로 철학이 정확해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실의 선들과 접촉하고, 따라서 결국은 거기서 떨어져 나올지라도 대개의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사실의 선들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적 판형에 스스로를 적용한다. 분석은, 그리고 심지어 변증법조차, "직관을 시험하기 위해 필요한"[각주:16] 것들이다. 혹은 베르그손이 1903년 강의에서 이야기하듯, "철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석들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결과들과 동화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노력을 통해, 일종의 도약을 통해, 진정한 도약을 통해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하여, 이 직관에서 출발하고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소여들을 재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거짓된 길에 위치한 것이다. 분석과 접촉하여 끊임없이 직관을 시험하지 않고서 직관을, 뭐랄까, 진술하는 데 그치는 철학은 순전한 공상일 것이다."[각주:17]

거짓, 공상. 베르그손이 "자유롭게 내버려져" 과학이 그 실천적 조건들을 제공할 실험적 제어와는 독립적으로 그 문제를 공식화하는 철학이 이룰 일탈을 특징짓기 위해 이렇게나 단호한 용어들을 선택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난 직관은 철학 전체를 일종의 백일몽으로 전복시키며,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주의의 거대한 주제들--지속, 창조, 자유 등--의 단순한 언어적 반복을 노리고 있다. 그것은 우아한 착란délire--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착란은 dé-lirer, 즉 고랑sillon에서 벗어나기를 의미한다--의 위험이다. 최선의 해독제는 다시 한번 말하건대, 시작점에 주의를 기울이는[깨어있는] 것이다. 개념들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지만, 직관에서만 출발해서도 안된다. 언제나 사실들을 통해, 분석이 밝혀낼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 시작해야 한다. 심지어 일단 직관에 "자리잡은" 뒤에도, 사실과 접촉하여 직관을 전개하는 일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깨어있어]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직관이 말하자면 분석 쪽으로 자기 자신을 구부려서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공통 표면"[각주:18]을  통해 분석을 뒤따르는 이러한 복잡한 운동이 베르그손주의의 독특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일상적인 모티프, 흐름이나 방향이라는 개념들과 연결된 직관들의 벡터적인 모티프와의 단절을 드러내는 하나의 위상학적인 이미지가 강제된다.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여러번 여기에 호소한다. 그것은 비틀림torsion이다. 베르그손은 수학자 에밀 보렐에게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적 활동은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일종의 비틀림"[각주:19]의 결과다. 이 표현은 이미 『창조적 진화』에서부터 등장한다. 진정한 운동성, 그러니까 생성의 창조적 측면을 사유하는 것은 지성에게 있어 "지성의 자연적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지성이 "스스로 비틀리는 것"[각주:20]을 전제한다.

이 이미지는 레옹 브룅슈빅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 아름다운 헌사의 텍스트에서, "지속 속의" 사의 특징적인 작업이 실천적으로는 아주 힘든 직관의 작업이기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각주:21]는 역설을 강조한다. 직관이 요구하는 노력이 그렇게나 힘든 것이라면, 그 이유는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이 비틀림으로 인해 관건이 되는 것이 단순히 일상적 인식과 과학의 지성적 진행이 수행되는 것과 평행한 길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본성에 반하는 저지받은 운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베르그손은 앞선 모든 고찰들을 충분히 잘 요약하는 기이한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함이 절대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각주:22] 이것이 "철학함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이지 않다..."가 아님에 주목하자. 이 뉘앙스를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어쩌면 들뢰즈처럼 "상궤에서 벗어난 운동들"에 체계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와, 과학적 인식의 자연적 운동을 언제나 몇몇 정확한 지점에서 바로잡거나 교정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인식이 실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방식 중 하나로 남는 실증적 형이상학 사이의 차이는 여기에서 작동할지도 모른다.





  1.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2007, p.95. 베르그손은 청중들과 독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요구되는 이 노력을 "과격하다violent"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Ibid., pp.157, 210, 213). 이러한 준-생리학적인 보충을 무엇이 정당화하는지는 뒤이어 보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édité par A. François, Paris 2018, p. 19.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이 강의는 그 해의 첫 강의이다. 이 강의는 베르그손이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 라틴 철학사" 강의직(강의명에도 불구하고 근대 철학으로의 수많은 주제이탈이 이루어졌다)을 맡아 수행했던 이전 3년 간의 강의에서 제시되었던 연구들을 방법론적으로 요점정리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14. [본문으로]
  4. Ibid., p. 213. [본문으로]
  5. Ibid., p. 206: "만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면 형이상학은 단지 사유 작업의 자연적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 정신의 확장을 통해 즉각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물 속에 위치하여, 결국 개념들에서 실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서 개념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일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6.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1. [본문으로]
  7. Voir Durée et Simultanéité, Paris 2009, pp. 151-156. [본문으로]
  8.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
  9. Ibid., p. 23. [본문으로]
  10. Ibid. 이 사례는 다음 해에 펠릭스 라베송에게 헌사되어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64에도 실린 저자 소개에도 등장한다. "발생적 축"이라는 표현은 라베송의 것이다. [본문으로]
  11.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69. [본문으로]
  14. 1899년부터 테오뒬 리보가 가지고 있었던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근대철학 교수직으로 옮길 때, 베르그손의 본래 계획은 전통적인 "체계들의 역사"를 "문제들의 역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voir R.-M. Mossé-Bastide, Bergson éducateur, Paris 1955, p. 65). 인과의 관념, 시간의 관념, 기억의 관념, 자유의 관념, 의지의 관념, 어떤 관념이 문제시되건 간에, 베르그손은 그의 강의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체적인 문제들의 변형을 추적하고, 그보다 앞서 서로 다른 학설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던 방식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의 정확한 공식화를 도출하고자 하는 데 할애하였다. 베르그손은 이 "위대한 문제들"에 있어 상반되는 두 주장들이 종종 공통 전제 위에서 반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그는 연속성의 외양 하에서 사실상 새로운 문제를 여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에도 동일한 관심을 기울인다("유"를 통한 사유에서 근대적인 "법칙" 관념으로의 이행이 함축하는 자연 관념의 변형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시간 관념에 대한 1902-1903년 강의의 핵심에 위치한 이 질문은 기억 이론들을 다루는 1903-1904년 강의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창조적 진화』의 3장과 4장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5.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6.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2007, p. 239.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폴-앙투안 미켈과 함께 서명한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 : 교토 선언문」을 참조하라. 이 글은 «Dissertatio: Revista de Filosofia», volume suplementar IV, dossiê Bergson, 2016 (https:// periodicos.ufpel.edu.br/ojs2/index.php/dissertatio/article/view/11010/7097)에 실렸고, 영문 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17.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p. 25-26. "끊임없이"라는 부사는 아주 축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그손은 1916년 마드리드의 학생들에게 이 점을 환기시킨다.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철학은 언제나 여러분이 대학에 있었을 때의 정신의 기질, 새로운 대상에 대한 연구나, 심지어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연구에 맞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기질을 요구한다"(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Paris 2011, p. 483). [본문으로]
  18.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44. [본문으로]
  19. H. Bergson, Réponse à un article d’É. Borel, janvier 1908 (dans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357). [본문으로]
  20.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op. cit., p. 162. 이 뒷부분에서, 베르그손은 오성이 개입시킨 장애물들을 극복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동일한 의미에서 "의지가 스스로 행하는 비틀림"에 대해 이야기한다(p. 251). [본문으로]
  21. La vie intérieure de l’intuition, texte reproduit en annexe de 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987. [본문으로]
  2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

베르그손 - 기억 이론의 역사 1강 1903/12/11


여러분,

우리는 지난 3년 간, 철학과 문제들의 역사에 대한 일반적 입문을 살펴보았고, 작년의 강의에서는 결론을 끌어내고 철학을 하기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과 그 노력의 본성을 살펴보고 정의하려 했다.


우리는 이 노력이 그 본성과 방향에 의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즉 과학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방식으로 알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과 다르다고, 근본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이다.


이 결론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도록 하자. 뒤이을 내용을 위해서는 이 점이 필수적이니 말이다.


일상적 인식과 일상적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과학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고 조금은 거친 형태로 요약하자면, 이 인식은 무엇보다도 고체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보통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고정되고 확고하며 부동적인 윤곽을 가진 고체적 사물들에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행동은 이런 부류의 사물들에 대해 수행된다. 우리는 아주 명확한 윤곽을 지닌 사물들에 영향을 미친다. 말 그대로 말하건, 비유를 통해 말하건 간에, 우리는 견고함[고체성]을 필요로 한다.


물질적 사물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질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질을 액체적인 형태로 개념화하려 해 보자. 우리는 그것의 유동적인 부분들을 고찰하여, 이 액체가 액체인 이유는 그 부분들이 더 많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들 자체는 고체들인가 액체들인가? 그것들이 액체들이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유동적 부분들을 고찰하게 될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확고하고 고정된 윤곽을 지닌 안정적인 무언가에 도달할 때까지 다시 한 번 동일한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그것이 입자라거나 분자, 혹은 원자라고 원하는 대로 말해 보자.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입자를 아주 확고하고, 말하자면 고체적인 윤곽을 지닌 것으로 표상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왜 운동은 액체적이거나 기체적이라기보다는 고체적일 것인가? 원자론은 일반적으로 운동이 고체적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안정적이고 완전히 확고한 윤곽을 지닌 이러한 표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체적 물체가 물질이 겪는 변천의 마지막 단계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고찰해본다면, 물질의 최종 상태, 그 종점에 도달한 물질의 입자와 같은 무언가를 이 변천의 기원에 두는 것은 아주 철학적이지 않은 처사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태를 고찰한다. 반복하건대, 우리는 고체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행동은 고체들에 집중한다.


나는 이것이 말 그대로도 참이지만, 비유적으로도 참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동성을, 그러니까 결국 운동을 표상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일을 행하는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운동체의 운동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이 운동체가 자리를 옮겼다고 말하고 이 이동을 잇따르는 위치들로 표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말하자면 점 A와 점 B라고 부르는 두 끝점들 사이에 운동체가 지나쳐 가는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향하는 점 M, N, P 등을 끼워넣는다.


이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이 이동 자체를 분명히 표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련의 잇따르는 위치들로 표상하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동에서 위치들로 나아간다. 우리가 언제나 고체적 입자들을 가지고 우리의 액체성을 재조합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운동과 운동성을 위치의 연속을 가지고 재조합할 거이다. 이 위치들은 고체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안정적이고 고정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학이 이러한 방식으로만 운동을 다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과학은 운동을 위치들의 연속으로 표상해야 한다. 이동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을 벗어나는 것이거나, 아니면 과학이 새로운 위치들을, 언제나 위치들만을 개입시킴으로써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작업을 통해서는 적어도 그 자체로는 포착될 수 없는 이러한 운동체의 운동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운동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운동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작업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기법을 통해서 인식된다. 우리가 운동성인 한에서의 운동을 인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새로운 인식 기법에 호소하는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 운동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내적으로 이 점을 의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산하는 이 운동을 밖으로 투사할 수 있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운동체의 내부에 위치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안에서 포착하는 것을 그 안에서 포착하고 그 안에서 붙잡을 수 있다. 아! 그 때 우리는 운동에 대해, 행동에 대해 내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작업을 통해... 음 뭐라 말해야 할까? 우리가 작년에 말했던 것처럼 지적인 공감 작업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운동체의 내부로 옮겨가 말하자면 이 운동체의 운동성과 행위에 일치하는 이러한 작업과 운동체의 바깥 쪽에 위치하여 운동체의 위치들을 뒤따르고 위치들의 가산과 병렬을 통해 운동을 재구성하려는 작업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다. 후자의 경우, 즉 일상적인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경우, 우리는 운동으로부터 그 운동이 공간 속에 남겨둔 부동적인 흔적들, 지점들, 말하자면 잔여들을 포착한다. 그것들은 고체적 잔여들이다. 사람들은 이 잔여들을 요소로 삼아 운동을 재구성하려 하지만, 그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재구성해내는 것은 운동의 대략적인 모방물이다. 이 근사치를 원하는 만큼 멀리까지 밀고나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모방에 불과하다.


운동 그 자체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구성을 추상함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반대로 스스로를 생산하는 운동 자체 속에 위치하려 노력하는 인식 작업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작업을 직관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인위적 재구성, 대략적인 운동, 어림잡은 모방물, 사물의 실천적 등가성에 도달하는 작업을 우리는 분석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분석이 인식의 일상적인 기법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철학 외적인 인식에서는 정상적인 기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철학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석은 인식의 일상적인 방식이다. 반대로 직관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기법일 것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경사로를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다. 자연적인 것, 자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물들을 찾는 것이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물들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동성들을 붙잡는 것이지 운동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는 운동을, 행동을 안정적이고 서로에 대해 고체적인 요소들의 조합과 병렬을 통해 표상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말했던 이 직관, 전형적인 철학의 기법인 이 직관이 비록 일상적인 인식 방식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일상적 삶 속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관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직관을 가지고 있다. 혹은 적어도 우리가 임의의 대상에 대해 내밀하고 심층적인, 말하자면 총괄적인 인식을 가지는 경우에 우리는 이 직관을 소묘한다. 일상적 인식들 가운데 언제나 가능한, 가장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을 고찰해보자. 말하자면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 갖는 인식을 생각해보자. 자신의 아이의 일화를, 자신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수천의 사태들을 이야기하는 어머니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어머니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이 결코 자신이 지각하고 아는 것을 정확하게 완전히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어머니들이 사람들이 가끔 “안다”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에서처럼 언제나 그들의 아이를 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평가함에 있어서, 즉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를 비교함에 있어서, 혹은 자신의 아이와 사람들이 제기하는 이러저러한 이상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실수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인식이 총괄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총괄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복잡한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해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말도 이를 표현할 정도로 충분히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혼의 형상, 정신적인 윤곽, 정신의 윤곽이다. 하지만 윤곽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의 표지, 무언가, 뭐랄까...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있는 무언가, 하나의 행동이다. 그것은 운동적이고 유동적인 윤곽이다. 그것은 아주 섬세한 무언가이고,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결코 끝낼 수 없을 것이다. 단어를 사용한다면 사태 주위를 선회하면서 가능한 모든 외적인 관점들을 추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관점들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기실 이러한 관점들을 아무리 접근시키더라도 언제나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가능한 관점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 사태를 표현하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을 끝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표현 불가능한 형상에 있어서 이 사태는 완전하고 총괄적인 것이다. 이것은 직관의 한 사례, 말 없는 인식의 한 사례이다. 말이 개입하자마자, 그것은 분석, 과학, 기술, 일화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경험한 것을 인식하게 하는 방법들이지만, 기술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하나의 단순한 사례였다. 다른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장의 미학, 창조함으로써 예술적 창조에 속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제시하려 했던 사람의 미학을 연구한다면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학 가운데 라베송이 즐겨 인용하는 한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아주 주목할만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선 우리에게 예술의 목적이 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분명한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이렇게 말한다. 특히 생에 대해서 말이다. 다음으로--이 점이 벌써 아주 주목할만한 생각인데--그는 생을 특징짓는 것이 하나의 물결치는 형태, 구물거리는 형태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생명체들을 구분해주는 것, 하나의 생명체를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것이, 그 생명체의 고유한 구불거림의 방식이라고 덧붙인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구불거림을 가지고 있다. 예술의 목표는 이 구불거림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생김새를, 예컨대 한 모델의 얼굴과 두상을 고찰할 때, 먼저 사람들이 보게 되는 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선이 존재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신의 사무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선은 말하자면 발생적인 선이지, 진짜 선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이다. 그것은 얼굴의 선들을 발생시키는 운동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무언가, 극도로 단순한 무언가이지만, 유동적인 것이다. 너무나도 유동적인 것이어서 예술가는 그것을 고정시킬 수 없고, 그의 정신의 시선으로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없다. 그럼에도 이것이 나머지 전체의 열쇠가 되는 것이며, 예술가가 이 무언가를, 다른 모든 것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이 알지못할 무언가를 붙잡게 된다면, 그는 일종의 닮음을, 그의 초상화의 본질 자체를 붙잡게 되는 것이다.


음... 나는 이렇게 말해볼 것이다. 측정을 통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다면--이러한 것은 가능할 것이다--, 즉, 얼굴의 치수를 재고, 그것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놓아, 얼굴의 세부사항을 정확히 재현하는 화가가 있다면, 사태를 밖으로부터 고찰하는 이 화가는 우리가 조금 전에 분석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일을 수행할 것이다. 그는 분석을 통해 작업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유사성에, 점점 더 완전해지는 닮음에 도달할 것이고, 그것은 점증하는 어림잡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대한 예술가, 천재적인 예술가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식으로 작업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그 예술가는 자신의 모델을 심층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어느 한 순간에 모든 다른 것이 유래할 발생적인 축, 운동의 발생적인 선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 빈치의 말에 따르면, 이 선은 화폭 위에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으로도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체의 열쇠를 제공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의 원천, 기원에 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고찰하여 서로 대립시켰던 두 가지 기법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에 대한 사례들을 발견하였고, 위대한 예술가들에게서 그것들에 대한 서술과 용법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서로 반대되는 방향과 의미를 지는 두 기법을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과학적 인식을,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인식을 규정했던 것이다.


나는 조금 전에 예술에서 사례를 빌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철학이 예술이라고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철학의 기법과 예술가의 기법 사이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중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는 언제나 개체적인 것을 되찾으려 하고, 내가 조금 전에 인용한 직관은 개체적인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반면,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직관은 사물들의 범주, 유들과 관련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새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자문한다거나, 그 얼굴 생김새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들, 물질의 문제, 의식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사변할 것이다. 이것들은 분석의 결과들이라기보다는 철학자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하는 직관들이다. 우리가 말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이다.


직관을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법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정의한 바 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몇몇 사례들을 제공하려 애썼다. 방법은 이중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분석에 대한 연구와 비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철학사로의 회귀와 학설들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요점은 두 가지이다. 분석의 비판과 체계의 역사.


먼저 분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분석에서, 즉 사실들에 대한 기술, 관찰, 실증 과학의 소여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증 과학이 없다면 철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학이 몇몇 지점들에서 과학의 현 상태와 충분히 동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들을 충분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철학은 과학 전체와 동화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증 과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화가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기 위해 우선 그 모델을 관조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델을 주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모델을 결코 충분히 주시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모델을 측정하고 그것을 화폭 위에 전개한다고 무언가 뛰어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에서 출발한다 해도, 우리가 직관에서 출발해서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화폭 위에서 이 칫수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초상화는 닮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철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석들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결과들과 동화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노력을 통해, 일종의 도약을 통해, 진정한 도약을 통해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하여, 이 직관에서 출발하고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소여들을 재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위치한 것이다. 분석과 접촉하여 끊임없이 직관을 시험하지 않고서 직관을, 뭐랄까, 진술하는 데 그치는 철학은 순전한 공상일 것이다. 철학은 질증 과학과 접촉하여 언제나 끊임없이 검증될 때에만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분석을 가지고서는 절대 직관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직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관에서 출발하여 직관을 따르고 직관을 전개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리를 빗겨가 공상 속에, 꿈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직관이 아니다.


이상이 첫 번째 지점, 분석에 대한 비판이다. 두 번째 지점은 체계들에 대한 연구, 철학사로의 회귀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철학사는 이런 관점에 대해 이중적인 효용을 갖는다. 한편으로 철학사는 우리가 말했던 직관이 위대한 사상가들, 위대한 철학자들, 거장들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철학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힘이 닿는 한에서 따라야 할 모델을 제공해준다. 철학사는 이러한 첫 번째 이점, 첫 번째 효과를 갖는다. 둘째로, 철학사는 해야 할 것 말고도 피해야 할 것도 알려준다. 철학사는 철학이 제기하는 거대한 난점들, 해결 불가능한 유명한 문제들, 체계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대립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직관 옆에, 띄엄띄엄 나타난 직관 옆에, 철학사의 아름다운 대로와 같은 직관 옆에, 이러한 길을 따라 갈림길들, 때로는 오랫동안 따라지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여러 길들이 존재한다. 이 길들은 직관보다는 분석의 방향으로 향하는 길들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역할이 과학적인 분석을 행하고, 과학을 고찰하는 것이라는, 과학을 더 멀리 밀어가고 더 멀리 연장하며 과학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피해하기 어렵다. 철학자는 과학을 더 멀리까지 따라가고 과학과 같은 길로 나아감으로써 철학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마치 과학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양, 마치 과학 너머에 무지 말고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양 말이다. 이 무지는 아름다운 공식들 밑에 숨겨져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 막다른 길에 도달하는 것이며, 대립에, 모든 부류의 모순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과학보다 더 멀리 나아가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들을 일반화하는 것, 이미 획득된 결과들을 붙잡아 그것을 확장하고, 거기에 더 높은 일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그 결론 속에서 일반성의 등급을 시험했으며, 우리는 그보다 멀리 나아갈 권리가 없다.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간다면, 그만큼 확장시킬 수 있을 다른 과학적 일반화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일반화들이 서로 일치한다면 그것들은 더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경우 여러 일반화들 대신에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확장시키고 더 멀리까지 밀고나가 하나의 체계를 만드냐에 따라 하나의 일반화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차이나고, 서로 분쟁하는 여러 체계들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적 소여에 근거할 것이나, 모두가 과학적 소여들을 너무 많이 넘어설 것이고, 결코 화해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직관이 이루었던 것을 보여주는 철학사는 사람들이 철학적 계시의 진정한 목표와 형이상학의 진정한 목적을 망각하여, 철학의 역할도, 대상도, 방법도 갖지 않는, 단순히 연장되었을 뿐인 과학을 철학의 색조로 제시할 때 겪게 되는 위험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분석은 과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실증 과학에 속한다. 반면 철학은 직관에 의존해야 한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두 가지 방법이다.


우리는 올해의 강의에서 이러한 일반성들을 드러낸 뒤에, 올해와 내년에는 몇몇 구체적인 문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는 심리학의 문제로 시작하려 한다. 이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철학의 목표가 직관을 취하는 것이라면, 철학이 연구되는 대상과의 지성적 공감 속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요컨대 가장 쉬운 것은 심리학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내적이며, 우리가 가장 쉽게 공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덜 쉬운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이라고 말했다. 맞다. 반성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밖으로부터 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해야 할 직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당히 큰 노력을 가정한다. 비록 이 노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외출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심리학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중에서 우리는 먼저 기억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의식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기억이 없는 의식, 즉 선행하는 것과 뒤따르는 것에 대한 인상이 없는 의식은 없다. 기억이 없는 의식을 가정해 보라. 그러면 언제나 순간적인 것 속에, 현행적 순간 속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선행하는 순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의식에 대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의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일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무의식을 정의하려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순간적 정신이다. 원한다면, 그것은 순간적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이 존재하는 한, 기억이 존재한다. 기억은 의식의 특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난 몇 해간 행했던 증명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귀결은 실존의 서로 다른 정도들이 그만큼의 기억의 정도들에 따라 특징지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증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삭제하고 순간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기억이 의식의 본질 자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을 연구할 것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말한 두 가지 방법, 분석에 대한 연구와 비판, 그리고 체계의 진화에 대한 연구를 적용할 것이다.


역사는 고찰하지 말고, 분석부터 시작해보자. 오늘 나는 이 연구의 구도를 그리기 위해 단지 이 분석과 역사에 대해 간략히 몇 마디만 하려고 한다.


분석부터 시작해보자. 기억에 대한 분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심리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들의 총체이다. 올해 강의의 첫 번째 시간에 우리는 이 결과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몇몇 결론들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의 거대한 선들을 아주 간략하게 상기시킬 것이다.


기억의 양상들, 기억의 형성과 전개를 고찰한다면, 네 가지 계기, 네 가지 본질적인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 상기시켜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지점은 기억의 형성이다. 단순한 사례를 들도록 하겠다. 시각적 기억, 우리 모두가 특정한 얼굴을 보고 갖게 되는 기억, 예컨대 친구의 얼굴을 보고 갖게 되는 기억을 생각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이 얼굴을 지각했다. 당신은 시각적인 인생을 갖게 되었다. 인상은 망막 위에 맺힌다. 그 인상은 특정한 감관으로, 뇌 중추들로 보내졌다. 이로부터 특정한 변양이 생산된다.


이렇게 하여 특정한 뇌 중추 속에 변양이 생겨난다. 이 변양은 어떤 것인가? 이 인상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미지들을, 은유들을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사태가 축음기처럼 일어난다고 말했다. 뾰족함 침이 축음기 원판 위에 도안을 그린다. 이 도안이 남아서 진동을 만들어내고, 진동을 찍어낸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은유들을 사용한다. 사실 뇌 중추 속에서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 사람들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특정 수의 세포들, 혹은 사람들이 일컫는 뉴런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변양되었다. 이 뉴런들은 서로 연결되었다. 즉, 어떤 시각적 인상, 망막에 맺히는 인상이 주어진다면, 이 인상은 뇌로 보내져 특정한 세포들의, 뭐랄까, 역동적인 연합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양된 특정 세포들의 소통을 결정한다. 세포들 간의 이러한 안정적인 연합이 이제부터 기억을 축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더 명료한 은유를 원한다면, 전기 램프들을, 장식조명을 위해서 몇몇 도안들에 따라, 예컨대 꽃 모양으로 배치된 에디슨의 램프들을 가정해보자. 그 램프들을 서로 연결하는 선은 특정한 도안을 구성한다. 이런 부류의 가능한 무한한 도안들이 존재한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각적 기억에 대해서 특정 수의 세포들, 뇌의 뉴런들이 관념적인 선에 의해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형상, 이러한 도안이 이제부터 거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물질적 등가물일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뇌의 메커니즘의 형성.


이제 시각적 기억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 기억은 재생산될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상기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특정 수의 세포들이 자극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인상을 받는다. 거기에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기억이 재생산될 것이다.


조금 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비유를 다시 사용하자면, 한밤 중에 에디슨의 램프들이 그리는 꽃 모양이 있다. 전류가 흐르면 모든 전구가 켜지고, 꽃 모양이 한밤 중에 그려질 것이다. 전류가 흐르기를 그친다면,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뇌세포들이 거기에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최초의 변양이 다시 생겨날 때, 전류가, 즉 신경 전류가 흐를 때, 전구가 켜진다. 기억이 한밤 중으로부터 나온다.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전류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면 기억은 무의식으로 다시 들어간다. 기억의 상기는 이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뇌의 메커니즘이 다시 작동될 때 우리는 이 기억이 처음의 인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 현상이 처음보다 덜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 뇌의 상태가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더 이상 최초의 상태가 가졌던 힘과 강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억을 이루는 것은 덜 강렬해진 최초의 상태, 완화된 최초의 상태이다.


이게 첫 번째 계기와 두 번째 계기이다. 이제 세 번째 계기를 살펴보자. 뇌피질 속에 저장된 이 기억은 이웃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들은 심지어 이 기억을 잠식할 것이다. 이 기억이 다시 활기를 얻어, 국재화되고, 자극받을 때, 그것은 또한 이웃 기억들도 자극한다. 결과적으로 이 기억은 의식 속에 다시 나타날 때 다른 기억들을 뒤따라 불러낸다.


이 기억들은 어떤 것들일까? 우선 가장 가까운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본래 기억과 동시에, 본래 기억과 함께 인상을 준 기억들, 본래 기억과 연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다음으로, 본래 기억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기억들, 즉 본래 기억과 닮은 기억들도 있다. 이런 이유로 기억 전체로 되돌아간 기억은 자신과 함께 다른 기억들을, 자신과 근접한 기억들과 자신과 닮은 기억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근접성과 유사성, 이것들이 바로 기억들이 서로를 암시하는 두 가지 법칙, 즉 기억 연합의 법칙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기이다.


네 번째 계기. 아! 그것은 기억의 정확한 국재화이다. 즉, 정신에 표상되는 기억이 과거의 특정한 한 지점에 국재화되어 있다는 사태이다. 나는 뗀느가 이 작업에 대해 제시했던 그 모든 세부사항들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전적인 것으로 남은 분석이다.


뗀느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기억은 삽입을 통한 몇몇 표지들jalons 덕에 과거 속에 국재화된다. 즉, 예컨대 특정 시기, 특정 범주의 기억을 위치시켜야 할 과거의 정확한 한 지점을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우리는 기억들의 쌍들을 불러내 그 사이에 국재화할 기억을 끼워넣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두 기억 사이에서 그 기억의 정확한 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억을 미끄러지도록 할 것이다. 그 순간에 기억은 과거 속에 국재화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기억 형성의 네 단계, 네 계기들이다. 이것이 기억에 대한 분석 속에서 거대한 참조지점들이다. 뇌의 메커니즘의 형성, 메커니즘의 자극, 연합, 국재화. 이러한 분석을 우리는 그 모든 세부사항에 있어서 전개하고, 서로 다른 전개 방향을 따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분석인 한에서 수용하가능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수용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분석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기억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 모든 일은 마치 이것이 진정한, 본질적인, 근본적인 과정인 것처럼 일어난다.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이러한 것인 양 일어난다. 심지어 사태가 진짜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양 처신하고 추론하지 않는다면, 기억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분석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태가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심리학적인 관점 옆에는 다른 관점, 철학적 관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이 네 가지 계기를 붙잡아, 원한다면, 마지막 계기에서 시작해보자. 네 번째 계기에서 세 번째 계기로, 세 번째에서 두 번째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 계기로 나아가 보자.


국재화를 먼저 다루어보자. 하나의 기억을 국재화하여 그것을 참조지점이 되는 다른 두 기억 사이에 위치시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알고 있음을 가정한다. 과거 속에 국재화할 기억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나는 이 기억을 그 사이에 위치시킬 두 기억, 혹은 여러 기억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기억들을 어떻게 찾게 될 것인가? 내가 이 작업, 뗀느가 말하는 삽입의 작업이 수행되는 순간에 국재화가 이미 수행되어 있거나, 혹은 거의 수행되어 있거나 잠재적으로 수행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국재화를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표현하기 위해, 심지어 그것을 나 자신에게 표현하기 위해, 그 국재화에 대해 표현 가능하고 소통 가능한 관념을 갖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이렇게 진행해야 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진행하는 순간, 나는 이미 해결을 향한 길 위에 있게 된다. 심지어 해결책은 이미 발견되어 있다. 이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억을 국재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심층적인 느낌에 호소해 보자. 기억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그에 대한 분석을 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기억에 내재화하도록 노력해 보자. 내가 어떤 기억에 스스로 내재화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 기억이 국재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하나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하는 시기의 표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 표지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 각자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실존의 서로 다른 시기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색조와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이전에, 오래 전에 살았던 장소를 다시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각하면서 우리가 지금 지각하는 것 말고도 다른 것이 존재했음을, 어떤 뉘앙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덧붙어 있었음을, 말하자면 그 광경을 둘러싸고 있던 후광이, 가장자리가 존재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 가장자리를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더 이상 찾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과거 속으로 이행하게 될 것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 경우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할수록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 우리가 지각하는 명확한 윤곽이 이러한 종류의 고유한 인상의 재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것을 다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떤 장소를 다시 보려 할 때 실망을 겪으며 기억 속에, 순수한 꿈 속에 남겨두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는 점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 사물을 대면할 때보다도 더 사물 자체에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지 못할 과거의 특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불가분적인 무언가이다.


그러한 시기의 기억을 국재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단순한 인상을 취하여, 그것을 굴절시키고 분할하고 분산시키려 노력한다. 우리는 특정한 평면의 위로 매우 높은 곳까지 찾으러 가서 발견한 몇몇 불가분적인 지점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일련의 굴절을 통해 조금씩 분할하여 특정한 평면 위에 중첩시킨다. 뗀느는 이 평면 위에서 기억들을 발견한 것이다. 뗀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특정한 기억이 동일한 평면 위에서 발견된 다른 두 기억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 분산은 이미 행해진 것이다. 국재화의 본질적인 지점 전체는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국재화의 과정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계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국재화 과정은 삽입이나 병렬의 과정이 아니다. 그 과정은 생물학적 과정, 수정란의 분열 과정과 훨씬 더 유사한 것이다. 수정란은 배아의 모든 단계를 가로지르며 분열되고 분할된다. 직관은 이러한 것이다. 그 시기는 기억들로 분할되고 분열된다. 이 기억들은 분산되어, 이 시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들의 전개를 한 평면 위에서 구성한다.


국재화가 이렇게 일단 실현되고 나면, 우리는 이 국재화를 이해하기 위해 직관을 통해 그 과정의 내부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직관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과들을 취하여 형체를 갖게 된 기억들, 의식적인 것이 된 기억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평면 위에 분산된 기억들의 작업 자체를 따르도록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것들이 분산되도록 하는 운동을 포착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본성에 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외려 철학적인 본성의 노력일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방향으로 행해지는 노력이 아니다.


이제 세 번째 지점에 도달했다. 이전의 가설에서는 국재화의 조건이 되는 연합--국재화를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연합의 과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하나의 실재이다. 아무도 그 점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의 연합, 기억을 통한 다른 기억의 암시. 누구도 우리의 기억들이 그들 간의 유사성과 또한 근접성에 의해 서로 이끌린다는 점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기억들의 삶을 설명하는 데 전적으로 충분한 것인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모든 기억들에는 각기 그 기억에 유사하고, 따라서 그 기억에 이끌릴 수 있는 수천의 기억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한 기억이 수천 수만, 원하는 만큼 존재한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닮아있다. 정도의 문제이다. 두 대상이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공통점이 없는 두 대상은 없다.


일단 기억이 호출되고 나면, 기억이 불려오고 나면, 언제나 그 기억이 불려온 이유는 그것이 앞선 기억과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누구도 그것이 불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마찬가지로 유사하고 선행하던 다른 수천의 기억들도 마찬가지로 불려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왜 이 기억이 불려왔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 번째 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세 번째 지점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기억을 고체적인 사물들처럼, 말하자면 서로를 끌어당기는 물체들처럼 표상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기억들 간의 인력이라고 불러왔던 것을 통해 현상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자, 사물들이 일단 이루어진 후에 행해지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우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물 속으로 침투하게 해주지 못한다.


두 번째 지점과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몇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을 삼가고 요약에 그쳐야겠다. 단지 다음과 같은 내용만 말해보려 한다. 우리가 이 두 지점을 함께 고찰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단 수립된 메커니즘의 형태 하에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억들의 대화이다. 뇌가 기억에 필요불가결하리라는 사실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뇌가 없다면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의 작업이 뇌의 작업이며 기억의 손상이 뇌의 손상에 상응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어떤 기억이 특정한 뇌의 장치에 상응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분석 속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태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양 행동하는 것은 이득이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가설이 일으키는 극복 불가능한 난점들은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가진 형이상학을 한켠에 치워두고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 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친구의 얼굴을 포착했다. 당신의 망막에 인상이 맺혔다. 이 인상은 뇌 중추들로 전달되어 특정한 메커니즘이 남겨졌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겠다. 하나의 시각적 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의 인상이 존재한다. 먼저 나는 이 사람을 한번만 보았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볼때마다, 그를 동일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주변 환경 속에서, 동일한 조명으로 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를 5분동안 한번밖에 보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그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적어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고 말했다면, 내 망막 속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이미지가 맺혔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뇌에도 이에 상응하는 수천 수백만의 [이미지들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이다. 당신은 하나의 기억이라고 말했지만, 수백만의 기억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뇌의 이 수백만의 장치들이 단일한 무언가를 형성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그 점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주도권이, 즉 이 모든 것을 통일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정신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모든 점은 사실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의식 상태의 본질 자체를 망각하고 있다. 그 본질이란 의식의 유동성, 즉 의식이 서로 다른 수천, 수백만의 형태들을 통과해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있다. 당신은 무한정한 수의 이 모든 이미지들을 고정시킨다. 당신은 그 이미지들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시킨다. 당신은 고체적인 것을 갖는 것에 몰두하여 이 모든 이미지들을 그것들을 낳은 대상과 혼동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이 하나의 이미지를 뇌의 장치의 윤곽들에 본따게 된다. 이 점은 놀랍지 않다. 당신은 그 윤곽들에 정확히 들어맞을 수 있도록 각각의 요철을 미리 표상한다.


따라서 사실 이러한 분석 전체는, 여기가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인데, 이러한 분석 전체는 어떤 의식 상태로서의 기억을 무언가 견고하고 정지해 있는 것으로 만들어, 거기서 운동과 작용, 즉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기보다는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자 하는 편파적인 관념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린다.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분석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결과물들을 취하여 이 결과물들을 통한 사물의 대략적 재구성, 즉 침전물을 통한, 과정의 결정화들을 통한 과정의 대략적인 재구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은 불가피한 것이다. 분석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기억의 심리학의 한 측면밖에 보여줄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것을 위한, 그 과정을 만질 수 있고 정지된 결과들 속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즉 더이상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 연구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 강의의 전반부가 될 것이다. 전반부는 상당히 길 것이다. 강의의 중반부에서 우리는 이론들의 역사적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일 것이다--이것이 우리 강의의 결론일 것이다--. 이 연구가 다다른 거대한 형이상학적 난점들,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내속적인 난점들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이 난점들은 철학이 너무나도 자주 자신의 역할이 분석을 연장하여 분석과 동일한 방향으로 분석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초래된 것이라는 점 말이다. 아! 이런 방식으로 사태를 이해한다면, 기억을 뇌의 과정에 덧붙어 그 선을 정확히 따르는 무언가처럼 표상한다면, 그러면 먼저 왜 물질 말고도 의식이 존재하는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이 두 사물이 서로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한다면, 문제를 다른쪽 끝에서 붙잡는다면, 즉 고체적인 것, 물질에서 출발하여 의식을 거기에 중첩시키는 대신 동적인 것, 액체적인 것, 의식에서 출발하여 물질이 생성의 여러 유형의 완만한 결정화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한다면, 사태는 훨씬 단순해질 것이고 불가해한 것처럼 보였던 문제는 해결 가능한 것은 아니라 해도 언젠가 심대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 강의의 중반부일 것이다. 이론들의 연구와 비판 말이다. 후반부는 한 두 강으로만 이루어지게 될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 귀결을 보게 될 것이다.


다음 주 금요일에 우리는 이 강의의 전반부에 착수할 것이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분석들을 연구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의의 전반부는 상당히 길 것이고 또 가장 구체적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가능한 한 많은 사실들과 관찰들을 포함시켜 더 교훈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국한되어 있었던 다소 추상적인 일반성들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이다.


Henri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PUF,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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