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뒤링 - 기묘한 고집 : 베르그손, 랑주뱅, 쌍둥이들의 시간

[옮긴이 주 : 이 글은 2018년 6월 11일 이루어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아인슈타인> 국제 학회에서 이루어진 엘리 뒤링의 발표를 번역한 것이다. 발표 내용 전체는 이곳에서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개 감사드립니다. 다들 잘 들리시나요.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스톱워치를 켜고 30분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여러분께 세가지 사항을 설명하려 합니다. 우선은 베르그손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은 이 쌍둥이들, 그러니까 물론 랑주뱅Langevin의 쌍둥이들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베르그손이 랑주뱅의 문제와 맺는 이 긴장된 관계를 특징짓는 기이한 고집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 건물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도 곧 보시다시피 콜레주 드 프랑스는 이 문제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이고, 어쨌건 철학자들과 물리학자들 사이의 많은 논의와 의견교환이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자료들 속에 나타난 이 문제의 전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겠습니다. 저는 철학자이고, 이러한 관점, 철학의 관점에서 이 복잡한 문제, 그리고 때로는 고약한 문제를 다뤄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 간의 만남의 부재non-rencontre, 혹은 토론의 부재non-discussion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상이 제가 다룰 내용입니다.

이 쌍둥이들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일상적인 조건 하에서 거대한 천체와 마주하여, 그러니까 중력장과 마주하여, 하나의 역학계의 운동은 강도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속이라고 불리는 속도의 변양을 겪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상대성 이론의 중심적 직관은... 일반 상대성 이론뿐 아니라 당대의 상식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도 되풀이되는 당혹감의 주자였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이미, 이 중심적 직관은 결국 랑주뱅이 일군의 철학자들에게,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중들에게 일종의 우화를 통해 아주 명료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몇마디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우화는 오늘날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비록 랑주뱅이 이에 대해 말했던 그 시기, 랑주뱅이 이 이론을 소개했던 해인 1911년에 그것은 “역설”도 아니었고, “쌍둥이”에 대한 것도 아니었던데다가, 랑주뱅이 자신의 이름을 그 우화에 붙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랑주뱅의” 것도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이 논변은 몇마디 말로 집약됩니다. 바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11년 볼로뉴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랑주뱅은 상대성 이론의 교육 모델이 될 법한 아주 아름다운 강연의 막바지에 동원된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고찰은,” 음... 랑주뱅은 제가 단번에 진술했던 내용을,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중력장을 마주하여 하나의 물체, 혹은 물리계는 가속되는, 혹은 마찬가지로 감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막 설명한 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변양이, 이 지점이 중심적 직관인데요, 흘러간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관찰하게 됩니다. 가속은 이 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흘러간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랑주뱅이 제시한 이러한 고찰은... 랑주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고찰은 2년의 시간을 들여 200년 뒤의 지구가 어떤 것일지를 알 수 있는 상상가능한 수단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이 여행자가,” 랑주뱅은 여행자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와 충분히 가까운 속도로 지구로부터 발사된 발사체에 갇혀있기를 승낙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아주 빠른 속도죠. “1년이 지난 뒤 예컨대 어떤 별을 만나서 동일한 속도로 지구로 돌아오도록 채비를 하면 된다. 2년의 세월만큼 나이를 먹고 지구로 돌아온 이 여행자가 그의 방주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지구에서 200년의 세월이 흘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두 경우에 흘러간 지속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격차는 랑주뱅이 여기서 제기한 것을 그대로 적용한 것, 물론 랑주뱅은 몇몇 보충 논변과 설명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제가 진술한 원리, 그러니까 가속이 가속된 계의 흘러간 고유시간을 변양시킨다는 원리를 순전히 적용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운동 중에 있는 물리계들은, 그 계들이 가속을 겪는다면, 서로 다르게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당대의 상식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에게도 완전히 예사롭지 않았던 이 현상, 지속의 편차déphasage라는 이 현상... 저는 은유일 뿐인 감속이나 팽창이라는 표현보다는 편차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에서 흘러간 지속들 간의 격차, 편차로부터, 랑주뱅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고유 시간을, 고유 시간이라는 개념을 개입시킴으로써 아주 잘 설명했던 바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옵니다. 즉 그것은 국소적으로, 그 자리에서 측정된 고유한 크기와 같은 것으로, 제가 즉각적으로 강조하자면, 이는 종종 그렇게 여겨지는 바와는 달리 “상대적인” 크기가 아닙니다. 이 측정은 관성계의 선택에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 반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상대성 이론의 거대한 직관, 철학적 영향은 형식주의의 심장부에 실제로 헤아려지는 시간, 고유 시간, 절대적인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위치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시간은 관성계의 선택에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시-공간 속에서 문제시되는 계가 그리는 여정에 상대적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이 시간은 이 계가 자신의 역사의 여정 속에서 우주의 나머지와 맺고 있는 관계에 상대적입니다. 가속되고 감속되는 것은 언제나 주변환경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따라서 다시 한번 말하건대 한 계와 우주의 나머지와의 연속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 되기 전에도 쌍둥이는 쌍둥이라고 지시되지 않았고도 존재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의 쌍둥이는 그러합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의 논문 초판본에서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에 연관된 고유 시간을 비교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1912-1913년경 폰 라우에von Laue가 개입하여, 그러니까 1911년 랑주뱅의 개입이 있은 후에 지속적으로 통용되던 무언가를 “랑주뱅의 역설”이라고 지칭합니다. 이 역설은 랑주뱅의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역설이요. 그리고 몇 년 뒤, 1918년에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쌍둥이”라는 말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나 의식 일반 대신 두 명의 쌍둥이를 상상한 것이죠.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콜레주 드 프랑스가 이 문제가 결정화되는 지점, 혹은 장소로 개입하는데요. 팽르베Painlevé, 제가 아는 바로는 수학자 폴 팽르베는 랑주뱅과 함께 1922년 아인슈타인을 파리로 초청하는 일의 관계자였는데요. 팽르베는 등속 운동하는 궤도의 분절들만이 개입하는, 말하자면 순수한, 조금은 이상화된 버전의 랑주뱅의 역설을 공식화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잘못된 대칭을 통한 공식화였지요. 이것은 제가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몇몇 지점에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몇몇 오해를 강조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죠. 몇몇 이해부족을 말입니다. 조금 뒤에 돌아오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결국 제가 그 윤곽을 묘사한 쌍둥이에 대한 이 조그마한 극의 최종장은 베르그손 자신입니다. 즉 제가 조금 뒤에 언급할 책, 『지속과 동시성』을 통한 베르그손의 개입입니다. 이 책은 처음으로 쌍둥이들에 이름을 붙입니다. 오랜 철학 전통 속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피에르와 폴이라는 이름이죠. 개념적 논변을 위해 동원된 두 인물이 있을 때 보통은 피에르와 폴이라고 불리죠. 이것이 바로 소위 “랑주뱅의 쌍둥이 역설”이라 불리는 문제가 결정화되는 꽤나 긴, 수십년간의 역사입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일찍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1911년 랑주뱅이 강연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청중의 일원이었습니다. 푸앵카레Poincaré, 오스트발트Ostwald 등과 함께 말입니다. 그 자리에는 또한 철학자 뒤르켐Durkheim이나 러셀Russell, 브룅슈빅Brunschvicg 등도 참석해 있었죠. 베르그손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22년에... 중간에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늦기는 했지만 1922년에 베르그손은 다시 한번 출석하였고, 심지어는 아인슈타인 강연 중에 프랑스 철학회가 조직한 회담을 기회 삼아 논평을 부탁받기도 합니다. 1922년 4월 6일은 베르그손을... 아니 죄송합니다, 아인슈타인을 철학자들에게 소개하고 회담을 갖는 자리였습니다. 베르그손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르그손은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논평을 권유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즉흥적인 것이었죠. 베르그손은 글을 써오지 않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베르그손은 그의 논평의 중점을 쌍둥이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성의 문제에 둡니다. 훨씬 더 일반적인 문제죠. 동시성의 시간적 의미에 관한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성의 시간적 의미는 자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시성을 공간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공존의 질서의 소여, 말하자면 “같은 시간에” 공간적으로 병렬될 수 있음이라는 사실말입니다. 동시성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동시성은... 상대성 이론이 이 문제를 건드리는 한에서 상대성 이론의 요점은, 동시성이 시간 자체의 한 차원으로 고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에서 이러한 고찰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칸트가 동시성은 시간으로부터 파생된 가장 흥미로운 관념임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공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시간으로부터요.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이 문제를 새로운 물리 이론과 관련하여 고찰했습니다. 그 어조는 전혀 논쟁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간략한 의견교환의, 의견교환에 뒤이은 담화의 원본을 읽어본다면, 어조는 논쟁적이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은 결코 상대성 이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명시적으로 이 이론을 옹호했고, 물리학자가 이 이론에 접목하는 철학적 해석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했지요. 조금 뒤에 제가 그 사례를 제시할 것이지만, 베르그손의 전술은 조금은 우회적이고 완곡합니다. 솔직히 요점을 포착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변의 정확한 효과 말입니다. 이 논변 자체로는 논변이 전개되었다기보다는 환기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상하시듯, 아인슈타인은 이 논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고, 단순한 언어적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평소처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립니다. 조금은 거친 방식으로요. 그는 다섯 줄로 요약되는 응답에서 베르그손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문제는 심리학적 시간과, 물론 물리적 시간이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세번째 시간, 철학자의 시간을 위한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이보다 폭력적인 반박은 없겠죠.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손이 제기하려 했던 문제를 단순히 빼내어 배제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배제하고 한편으로는 주체의 시간인 심리학적으로 체험된 시간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계의 시간, 객관적 조정의 시간, 물리학의 시간이라는 이 양자택일, 이 이원성을 베르그손에게 되돌려줍니다. 이 두 시간 사이에는 문제가, 철학적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기묘한” 점은 이 논평이 동시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쌍둥이가 아니라요. 쌍둥이 역설은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루 전인 1922년 4월 5일, 여기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팽르베는 대담하게도 일군의 저명한 동료들을 앞에 두고 특수 상대성 이론 속에는 쌍둥이들의 시간 간의 격차를 유도하는 데 있어 초보적인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증명하겠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논변을 명확히 하자면, 팽르베는 우주선 속의 항성 여행을 더 이상 참조하지 않고 기차 여행, 왕복하는 기차라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쌍방에서 측정된,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기차의 기관사의 관점으로부터 측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플랫폼에서 움직이지 않는 역장의 관점으로부터 측정된 고유시간이 비교됩니다. 팽르베가 구성하고자 했던 논변의 힘줄은, 사실상 우리가 궤도를 둘씩 짝지어 고찰한다면 외견상으로는 완전한 상호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견상으로 그러한 이유는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팽르베는 운동의 속도를 등속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이건 그 이후로 자주 반복되는 논변인데요, 베르그손 자신에 의해서도 반복되죠. 그리하여 역장의 시간이 느려지는지, 기관사의 시간이 느려지는지 구별해서 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두 위치는 완전히 대칭적이기 때문이죠.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분명히 그건 사실이 아니죠. 사실 이 문제 속에는 두 개의 관성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견상으로는 하나의 기차와 하나의 역이 존재하지만, 두 개의 관성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관성계가 존재합니다. 기차는 길을 되돌아오기 때문이죠.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어쨌건 가속은 이 기차가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에 의해 존속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감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속도 벡터의 방향 변화는 기술적으로는 가속입니다. 어쨌건 이 논의는 완전히 가설적입니다. 사유 실험이죠. 이 역행의 지점은 상황 속에 일종의 근본적인 비대칭성, 불균형성을 도입합니다. 이 비대칭성에서 출발한다면 랑주뱅이 예측한 결과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설은 존속합니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역설은 역설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처음에 놀랍게 보였던 것, 역설적으로 보였던 것은 단지 이 지속간의 편차가 상호성, 혹은 완전한 대칭성의 장 속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인다면, 역설은 상당부분 완화됩니다.

이렇게 이 문제는 모든 참가자들이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막을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팽르베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튿날 베르그손 자신도 그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베르그손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은 베르그손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음을 보여줍니다. 이튿날 역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되는 것은 기묘하게도... 이건 아주 예상과는 다른데요, 15분여 가량 이루어진 그의 꽤나 긴 담화 속에서 “미생물”이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쌍둥이가 아니라 미생물이 문제시됩니다. 저는 이 작은 여담을 통해, 어떤 점에서 베르그손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자이면서도 말하자면 극도로 섬세한 저자인지 보이는 동시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 스승 중 하나인, 그러니까 저를 철학적으로 성장시킨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 반대로 철학자와 물리학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일종의 속도의 격차, 혹은 상대적 운동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으로 상대적 속도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르그손은 하나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고려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 극도로 느린 속도를 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가 취했던 우회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극도로 불투명한 것이었습니다. 미생물에 대한 참조는 좋은 사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관건은 무엇일까요? 관건은 물리학자가 규정한 조건들 속에서 동시성을 사유하기 위해 또 한 번 가설적인 관점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쌍둥이의 사유실험의 맞은편에 또다른 사유실험을 제안하는 것인데요. 미생물의 사유실험은 미생물의 관점에 위치하는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니까 극도로 미소한 공간상의 간격을 감각할 수 있는 극도로 작은 존재인 미생물은 동시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밀한 관점을,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세밀한 해상도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미생물에게는 절대적 동시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접성의 동시성은, 아무리 가까운 것을 상상하더라도, 국소적 일치, 그러니까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건에 중첩을 아무리 가깝다고 상상하더라도, 말하자면 무한히 줌을 당기는 것을 허용하는 미생물의 가설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원거리의 동시성으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르그손이 여기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과학자들의 동시성”입니다. 원거리의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물리학자의 조건에, 즉 신호교환을 통한 멀리 떨어진 시계들의 조정coordination과 동기화synchronisation라는 조건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생물의 원리는 사실 무한한 줌 당기기의 원리, 무한히 세밀한 해상도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실재의 모든 층위에서 원거리의 동시성을, 그러니까 과학자들의 동시성의 조건을 재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어느 정도 사태를 명확히 했지만, 진술된 그대로의 논변이 갖는 정확한 효력은 포착하기가 더 까다롭습니다. 사실 이 효력은 아인슈타인의 비판을 필두로 하여 아주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아인슈타인이 한 담화에서 베르그손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엄밀히 물리적인 차원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고려하는 것은 바로 정확히 이 미생물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후에 메츠Metz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씁니다. “베르그손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니까 동일한 장소에 있는 “두 사건들 간의 동시성이(또한 비-동시성이) 선택된 계와는 독립적인, 절대적인 무언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절대적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는 베르그손이 이 점을 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아니죠. 베르그손은 절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베르그손은 이 점을 전혀 잊지 않았고, 사실 반대로 그의 논변의 아이디어 전체는, 실제로는 물리학자가 동기화 과정을 시계바늘 읽기라는 국소적 작업에 결부시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국소적 작업은 정말로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절대”라는 말은 베르그손이 고찰하는 특별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이긴 하지만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언제나 두 사태의 일람적synoptique 포착, 단일한 포착, 조금은 역설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참조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두 사태를 둘이라고, 서로 구분된다고, 두 사건이라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성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포착합니다. 정확히 이 지점에서 철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1905년의 논문에서 이렇게 썼지요.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장소, 혹은 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사건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비정확성을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사치approximation의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말이죠. “이러한 동시성은 ‘추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들이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동시성에 대한 우리의 접근의 제약에 대한 의견일치, 우리가 언제나 다소간 근접적 동시성이라는 조건 속에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인 일치나 절대적인 동시성의 근사치로 만족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가능한 의견일치의 지점으로부터 아주 분명한 분기가 존재합니다. 분기점은 “추상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즉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훨씬 천천히 전진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지점에서 상당히 속도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물리학자가 필연적으로 추상에 호소한다는 사실에서 물리학자가 과학자의 관점을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직관적 관점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상의 불가능성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가서 측정의 실천적 제약조건에서 떨어져나오는 추상의 평면에 위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사실 이 지점에 철학적으로 훨씬 더 섬세하게 논의되어야 할 무언가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징후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하나의 해석틀을 제시하면서 미생물에 대한 이러한 인용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물론 관심이 있으실 경우, 베르그손의 조금은 기묘한 발표와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평의 텍스트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에게 되돌려주는 조금은 거친 응답으로 되돌아간다면, 논변의 진정한 효력과 기저의 쟁점을 해독해내는 데 제가 지금 제시하는 일종의 해석틀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단지... 이 점이 베르그손의 철학적 논변의 특이점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과학자들과 직접적인 의견교환에 동원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것은 미생물에 대한 이 동일한 참조가 한번에 두 가지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시적으로요. 한편으로 더 명백한 점은, 이 미생물이 과학적 이성의 확성기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실재의 모든 층위에서 모든 것을 원거리 동시성의 용어로, 그러니까 시계의 조정으로 정의하려는 과학적 이성입니다. 베르그손이 사용하는 미생물은 아인슈타인 자신보다 더 아인슈타인적이기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모든 층위에서 이 미생물들은 동기화 과정을, 그러니까 동기화의 효과와 시간 편차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생물은 바로 이러한 소여로부터 일종의 축이 되는 지점,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직관적 기준점인 환원 불가능한 직관적 동시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미생물이 가정상 원하는 만큼 작아질 수 있고 원하는 만큼의 공간상의 간극을 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점점 작아져 한 점에서 수렴된다고 가정되는 일련의 간극들을 시-공간상의 한 수학적 점에 관념적으로 투사하는 추상과정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 하나의 점, 사건의 점은 아인슈타인이 원리상 요구한 절대적 동시성, 국소적이고 점적인 동시성의 자리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생물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미생물은 크기의 질서와 독립적인 관계들의 체계로서 잠재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과학을 실재의 바탕에 가정합니다. 이 경우에 그것은, 베르그손의 말을 빌자면, “직관적 동시성에 독립적인 과학적 동시성의 체계”입니다. 직관적 동시성은 말하자면 존재 속으로 유보되고, 더이상 접근된 직관적 동시성에 대한 국소적인, 근접적 경험에 관념적으로, 즉 권리상 결부될 수단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미생물의 첫번째, 더 명백한 기능입니다. 두번째 기능은 베르그손의 논변 속에서 말하자면 첫번째 기능에 중첩되는 것이고, 포착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 동일한 미생물이 사실 베르그손의 논변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 제가 생각하기로는 푸앵카레의 영향을 받은 고찰을 예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찰은 베르그손의 수많은 추론들의 배후에 위치한 것으로, 층위의 질문, 즉 크기의 상대성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공간의 상대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베르그손은 다른 곳에서 거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거인은 미생물과 상보적인 비유로, 거리 층위의 다른쪽 끝에 위치하여 거대한 거리를 수축시킴으로써 자신의 층위에서 준직관적인 동시성의 조건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즉 거인은 과학적 동시성을 거치지 않고서도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을 하나의 단일한 지각적 행위 속에 수축시켜 직관적 동시성의 조건 속에 위치함으로써 이 두 사건을 동시간적이고 동시적인 것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덧붙이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미생물들, 아니, 모든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을 함에 있어서 행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찰과 측정의 조건 속에 위치하는 경우에 물리학자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발표 후에] 이 점에 대해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논변은 명료합니다. 그것은 과학적 관점을 직관적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미생물이 사태를 처리하고 시간을 처리하는 방식을 통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질적이고 상대적인 공간이라는 수학적 표상은 사실상 경험의 서로 다른 층위, 서로 다른 평면을 연결하는 원리에 속하는 것으로, 근접적이고 직관적인 동시성의 영역과 물리학자가 상대성 이론의 조건 속에서 기술된 과학적 동시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층위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일종의 연속적 연관을 드러내어 줍니다.

베르그손은 이 점을 알아챘지만, 그는 이것을 다소간 혼합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즉 사태들은 중첩되어 명확히 분절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법, 직관의 방법에 있어 이러한 상황은 전형적인 것입니다. 직관은 눈을 열기만 하면 세계를 볼 수 있고 본원적인 영감이나 원천인 체험된vécu 경험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직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직관은 아주 복잡한 지성적인 작업입니다. 그것은 과학과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애매함의 지점, 그러니까 여기서는 서로 다른 층위들, 혹은 서로 다른 평면들, 추상의 평면과 직관의 평면 사이의 왕복운동이라는 애매함의 지점을 찾아내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그저 잘라내어 서로 다른 실재의 평면들을 너무 빨리 분해해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입니다. 이 애매함의 영역에 위치하여 이 영역을 가로지르고 그 안에서 움직임으로써, 인용하자면, “하나의 동시성에서 다른 동시성으로”, 그러니까 자연적 동시성에서 과학적 동시성으로, 실재성의 주입이 수행되는 방식을 현장에서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베르그손은 이 유동적인 영역에 위치하고자 했고, 우리를 거기에 위치시키고자 했습니다. 거의 시간이 없었고 아주 바빴던 아인슈타인을 15분 동안의 짧은 논의를 통해 이 영역에 위치시키려 했던 베르그손의 시도는 아주 야심찬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몇몇 오해들로 이어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포착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은, 이 유동적인 영역에서부터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아인슈타인을 너무 빨리 어떤 주장에 빠지게 만드는 일종의 미끄러짐입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주장은 동시성이라는 지성적 구성물을 독립적인 것으로 삼으려는 오류, 형이상학적 차원의 오류입니다. 이 구성물은 고유하게 시간적인 의미를 갖지만, 사실상 직관적 동시성이 체험되는 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현상학에 대해, 메를로-퐁티에서, 어떤 점에서는 이미 후설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사태에 대해 추론하게끔 합니다. 그것은 지각의 자연적 조건에 정박되어 있는 인간적 경험의 본원적 기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과학 구성의 역사 속에서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간극-없음, 모든 지성적 가공과 추상적 평면들이 이 본원적 정박과 일종의 연속적 연관을 보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아인슈타인이 말하듯 기술적 조건 속에서 규정된 동시성들이 계속해서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 과학적 동시성을 다른 크기가 아니라 실재의 시간적 차원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양자의 연관을 유지하는 이러한 실재성의 주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베르그손은 현상학자일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현상학자가 아니죠. 이 기나긴 “미생물적” 여담을 거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가 보기에는 고유한 의미에서 베르그손의 문제가 되는 주제, 사실상 이러한 사례, 미생물이라는 이러한 반대 사례, 반대 사유실험을 통해 도입된 주제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재의 층위라는 주제, 혹은 제 생각으로는 이게 더 적절한 용어로 보이는데, 사유가 시간에 대해 채택하는 원근법perspective이라는 주제입니다. 저는 미생물이 여기서 원근법의 원리를 육화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인 아이디어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단번에 특정한 거리 속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시간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시야에 넣지 않는다면,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구체적으로는 동시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순수한 국소적 일치로서의 동시성, 원거리 동시성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시계바늘을 읽는 작업에 정박케 하는 지금-여기의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일종의 지리-시간적 토대로서 시-공간상의 각각의 지점에 단번에 위치시킨다는 생각은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극도로 사후적으로 가공된 무언가를 실재 속에 투사하는, 재투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인위성은 그것의 파생성을 드러내어 줍니다. 실제로 일차적인 것은 하나의 시간, 원거리에서 경험된 동시성입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의미의 동시성, 물리이론의 틀 속에서 이해된 동시성이 아니라, 더 직접적이고, 말하자면 더 “자연적인” 원거리 동시성입니다. 그것은 근접한 사건들의 총체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의 동시성이고, 말하자면 주변을, 환경을 규정하는 두꺼운 동시성입니다. 우리는 이 동시성에 대해 관점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에 있어 제가 암시적으로, 그리고 조금 은유적으로 말한다는 점은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컨대 심리학적 질서, 이 질문에 대한 고유한 의미에서 심리학적 작업을 참조해보도록 합시다. 아동기의 시간 의식과 시간 범주의 발달에 대한 피아제의 텍스트에서 말입니다. 피아제는 이 점에 대해 베르그손보다 훨씬 명료하게, 아주 단순한 설명을 합니다. 피아제의 설명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국소적인 동시성의 소여는 점차적으로 시간의 선을 따라 연쇄의 경험과 짝지어지더라도 아직은 구체적으로 시간적인 면모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범주로서의 시간의 관념이 연쇄나 변화의 이산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위해서는 원거리의 조정에 대한 고찰을 도입해야 합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길을 되돌아가,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역전시켜, 이미 개념적인 하나의 정신적인 작업을 통해 내 경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던 일과 이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관계지을 가능성을 붙잡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들은 말 그대로 원거리 동시성 관계이지만, 이 “거리”의 의미는 아직 동기화의 과정이나 신호 교환을 통해 틀지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의미의 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거리는 여기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나 자신을 직관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여기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동시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발표 전체를 인도하는 근본적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계 시간의 옆에 주체의 시간, 주체적이고 심리학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초점은 주체적이고 심리학적인 시간이라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의 문제입니다. 베르그손의 주장은 이 시간이란 단번에 원근법의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무언가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바는, 아인슈타인이 이 문제를 너무 빨리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 그 징후는... 1922년 아인슈타인과의 논의 몇달 후에 출간된 저서 『지속과 동시성』을 거쳐, 또한 그 후 몇 년간 아인슈타인 편에서 개입한 베크렐Becquerel이나 앙드레 메츠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연장된 차후의 논의 속에서, 되풀이되는 징후는 물리학자들의 일종의 유사논변으로, 그것은 더이상 도처에서 전체에 대해 적용되는 보편적 시간, 절대적인 총괄적 시간을 균일하게 정의할 수단이 없다는 논의 없이 확인된 사실, 제가 앞서 말했듯 쌍둥이 역설이 묘사하는 바대로 모든 것이 매 순간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 가속하고 있기 때문에 고유 시간들이 일상적인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편차를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니까 징후는 이렇게 불가피하고 넘어설 수 없는 사실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실은 형이상학적인 주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고, 성찰 없이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것으로 발표를 끝마치려 합니다. 이 주장은... 가능한 변형태가 몇 개 있는데요. 대략적으로 말하면, 한편으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국소적인 지속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변이의 선들을 국소적으로 패러미터화 하는 방식들인 고유 시간들은 존재하지만, 불변하고 객관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조정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 존재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괴물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시-공간일 수 있겠죠. 어쨌건 시간은 생성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블록-우주라는 형식 속에 응결된 시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로 펼쳐진 이 블록-우주 속에서는 더이상 우리로 하여금 이 우주의 발생이나 시간적 전개를 목격하게 해줄 보편적인 생성의 베이스라인을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방식으로 정의할 수단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직관은 “시간은 국소적인 용법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시간으로부터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적 성격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조금 전에 설명했다시피, 이 시간적 성격은 거의 전적으로 우리가 시간에 대해 단번에 하나의 원근법을 채택할 수 있고, 또 채택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원근법을 채택한다는 것은 동시성의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시성의 관념을 실재 자체의 한 차원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지 관성계의 사용이나 관성계의 자의적 선택에 결부되어, 동시성의 선들에 대한 총괄적 틀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만 곧장 상대적인 것임이 상기되어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하나의 인공물이 아니라요. 이러한 상대화의 확인 너머에서 동시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리고 예컨대 베르그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한 것처럼, 필연적으로 총괄적일, 그러니까 말 그대로 보편적이어서 우주 전체의 층위에 있는 동시성의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지역적인 동시성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러한 동시성을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층위의 개념이 개입됩니다. 하나의 관찰자, 혹은 하나의 역학계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통해 규정된 동시성의 구역들, 동시성의 영역들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 상호작용 또한 일상적인 인과제약 하에 있습니다. 빛보다 빨리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제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시간이 없으니 이 점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논의가 가능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상대성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즉 상대성 이론 자체로부터 시간에 따른 공존의 양태를, 시간에 따른 사물들의 연결 양태를 사유하기 위한 도식을 끌어내려는 사람들에 의하면, 제가 생각하기로는 베르그손이 예감한 것처럼 동시성의 여러 양태들을 실제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양태들은 물론 아주 비표준적일 것이고, 아마도 물리학자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지만, 객관적일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내인적 크기를 통해, 말하자면 고유 시간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관성계의 선택에 의존적이지도 않을 것이지만, 다소간 확고한 특성을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즉, 시-공간 상의 여러 영역에서 사건들의 집합들이 서로 예컨대 모든 방향으로 신호를 방사할 수 있는 원점의 사건의 관점과 같은 적어도 한 원근법에서는 동시성의 막들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음... 묘사를 해드려야겠네요. 몇몇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어야 했겠지만, 그 경우에는 세부사항을 설명했어야 했을테고 시간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시-공간이라는 고전적인 표상 속에서 민코프스키의 다이어그램을 사용함으로써 이 동시성의 구역 혹은 영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영역은, 이 얘기까지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화이트헤드에 의해 정의된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몇몇 물리학자들에게 베르그손보다 더 잘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그가 “동시간성”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에게 동시성의 한 변종으로, 아주 단순한 형태를 띱니다. 하나의 사건을 고찰해봅시다. 시-공간상의 한 사건의 지점을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빛의 속도로 모든 방향으로 퍼져가는 광선의 방출이라고 해봅시다. 이 지점으로부터, 음 그러니까 이 사건은 어쨌든 지표화된 것입니다. 이 원점의 사건이 여는 원근법이 있는 것이죠. 이 지점으로부터 우주의 모든 사건들을 고찰해 봅시다. 원리상, 그러니까 원리상의 이유로, 이 원점의 사건에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사건들을요. 예컨대 은하의 다른쪽 끝에서 일어나는 일을 고찰해 봅시다. 충분히 제한된 시간 간격 동안 인과적 연결을 갖기에는, 그러니까 빛보다 느린 속도로 점차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에너지를 주고받기에는 충분히 먼 거리에 있는 사건이요. 그러면 우리는 말하자면 두 사건들 간의 인과적 연결 불가능성이라는 분리의 관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일반화해 봅시다. 그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게 되는 것은 에딩턴Eddington이 “절대적인 다른 곳”이라고, Absolute Elsewhere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 도식에서 두 개의 빛의 원뿔의 외부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영역을 “동시간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역은 하나의 지표화된 사건, 하나의 원점의 사건과 관련하여 이 사건과 인과적으로 단절되고, 따라서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이 사건과 동시적인 사건의 총체, 그렇게 단절된 시-공간상의 영역 전체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시성은 평면적인 동시성, 순간의 동시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동시성을 생각하게 되지만요. 평면적인 동시성은 실제로 상대적인 것이죠. 이 동시성은 절대적인 동시성, 관성계의 선택과 독립적인 동시성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동시성은 실천적인 이유로 완전히 무용한 것이죠. 이 동시성은 물리학자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철학자에게 이것은 극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역적 동시성의 여러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베르그손이 그의 추론 속에서 암암리에, 하지만 미묘하고 암시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던 바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확대된 동시성의 학설과 같은 것을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확대된 동시성의 학설은 물리학의 이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학설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처럼 이 학설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는 단순히 산타 클로스에 대해 말하듯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형이상학이나, 시간을 바구니 속의 사과처럼 셀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다수의 시간이, 운동 중인 계만큼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형이상학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고 적절한 형이상학이었습니다. 과학적 결과물을 참조하여 형성되는 공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질문이 더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어쩌면 물리학과 물리학이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형이상학 사이의 연속적인 대화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릅니다. 물리학자는 형이상학자입니다. 그건 불가피합니다. 물리학자가 일요일마다 철학책을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처럼 엄격하게 과학적인 결과를 넘어 그들 학문의 토대와 일반적 범위, 추상의 역량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이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실재를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인 범주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는 시간들의 “단일성”과 “다수성” 같은 것들이지만 다른 범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결”과 “통일”의 문제, 사건들을 시-공간처럼 통일된 형태로 “총체화”하는 문제... 아마도 사건들의 총체화를 사유하는 다른 방식도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문제들이 더 있겠죠. 여러분께 이런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하지만 또한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졌던 대화가 어떤 점에서 어려웠던 것인지를 환기하려 했습니다. 이번 세기에는 이런 대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