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뒤링 - 철학의 비정상성에 대한 주석 (베르그손의 한 강의로부터)

[옮긴이 주. 이 글은 베르그손의 1903년 12월 11일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 대한 주석이다. 이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이 점을 반복한다. 철학은 특별한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를 거부한다. 우리가 권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특정한 사유방식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각주:1] 그러나 어떤 노력인가? 기실,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동시적인 노력이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1903년 12월 11일의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각주:2] 그 후 철학적 활동의 변별적 특징화--이것이 바로 이 강의의 주제인데--는 "두 방법들", 즉 과학의 방법과 철학의 방법 사이의 구분을 통해 정확해진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노력들에 대한 이 첫번째 이미지는 인식의 두 이상들 사이, 별개의 두 영역의 규범성 사이의 정적 대립에 이르기는 커녕, 관계적이고 강도적인 측면을 간직한다. 이 이미지는 보충관계 이상의, 물리학적 의미에서 힘의 결합과 같은 무언가를 암시한다. 어쨌든 이 이미지는 사유의 일상적 방향의 "역전"이라는 여전히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방적인 이미지를 복잡화한다. 과학과 철학 간의 성공적인, 혹은 실패한 만남에 대한 성찰들을 일상적으로 부양하는 상대적 운동의 비유들 너머에서, 사태를 역동적으로 고찰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자.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업의 일상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각주:3] 같은 해, 조금 앞서 출간된 「형이상학 입문」의 유명한 이 공식은 우리에게 생성의 실재성을 놓치게 만드는 지성적 습관들의 영향력을 해체할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행 방향을 "뒤집어", "뚜렷한 윤곽을 지닌 개념들"에서 출발해서만 실재에 다다르는 작업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표적은 개념적 사유 자체, 혹은 개념적 사유가 포함하는 규정성의 요구라기보다는, 우리를 개념들에서 시작하도록 만들고, 개념들을 때로는 궁극 범주들처럼, 때로는 실재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을 실재의 기준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측정기나 체처럼 기능하도록 하는, 요컨대 개념들에서 계속적인 구성물이라는 쟁점을 발견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규정된 위치들과 기능들로 응고시키는 운동이었다. "실재의 모든 굴곡을 따르고 사물들의 내적인 삶의 운동 자체를 채택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들"[각주:4]에 호소하는 모순어법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난점은 여기에 있다. 유동적인 개념들도 여전히 개념들이다. 그리고 이 개념들이 삽입되는 사유의 운동은 갑작스런 분기를 통해 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지성주의의 사면을 거슬러 오르는 데 열중한다.[각주:5]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유의 운동이 그 방향을 역전시킨다 해도, 그것은 사실상 주도적인 계수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동일한 선을 따라 작업한다.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가했던 사람들은 이 점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은 더 해명할 필요가 있다. 1903년의 강의 중에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과 명시적으로 아주 가까운 용어들로 "반대 방향의 서로 다른 두 노력"을 구분하며 시작함으로써 사태를 정확히 한다. 한편에는 과학적 인식이 연장하는 "일상적인 인식"의 노력이 있다. 이것은 고체, 부동성, 고정되고 명확한 윤곽을 지닌 실재들을 향하는 인식이다. 다른 한편에는 운동의 운동성 자체--베르그손이 "실재적 변화"라고 부르기에 이르는 것--에 대한 포착이 요구하는 특별한 노력이 있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인식 기법"[각주:6]은 우리의 고유한 활동성이 증언하는 가능성, 즉 우리 안에서 원하는 대로 특정한 운동을 생산할 뿐더러 그 운동을 우리 밖으로 투사할 가능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적 공감 작업"을 통해 그 운동을 우리 밖에서 생산되는 것으로서, 그러니까 공간 속에 펼쳐지는 기하학적 선의 형태가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한 쪽 끝에서는 그것을 만들어낸 운동에, 그러니까 지속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경험할 가능성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 기하학적 선의 자취를 정신적으로 (다시) 주파할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이러한 작업이 요구하는 노력은 이 작업이 사물을 현장에 되돌려놓기 위해 "자연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야"[각주:8]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유가 자연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은 사유로 하여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재구성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발생을 반대로 개념화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일련의 친숙한 대립들이 반대되는 방향이라는 말로 정식화된 이 첫번째 구분을 강화한다. 과학은 분석을 특권화한다. 과학은 정확히 결과물들, 즉 일단 운동이 실현된 후에 그 운동이 남긴 자취들에서 출발하여 작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직관은 직관에 의존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베르그손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이 특성을 설명하는데, 이 사례들은 직관의 전면적이고 총괄적인 성격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내밀하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마치 총괄적인 것처럼" 안다. 하지만 한 영혼의 형태,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영혼의 거동을 "표현하기에는 어떤 말도 충분히 단순하지 않다."[각주:9]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표현을 빌자면, 좋은 화가는 모델로부터 그 모델의 독자적singulière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물결치는", "구불거리는" 선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설명에 따르면, 이 "발생적 선"[각주:10]은 형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이다. 그 선은 한 개인의 다양한 가시적 형태들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이자 단순한 행위 혹은 운동을 번역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전반적인 음조는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21세기 초에 뒤쳐진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강의의 정확히 이 부분에서 이 철학자는 우리를 위한 놀라움을 준비해 두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면역체계의 환기를 위한"추가접종piqûre de rappel"이라는 의미에서--하나의 환기rappel을 준비해두었다. 철학과 예술(모성애의 사례를 고려한다면 여기에 "감정"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에는 "중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철학적 직관은 바로 개체적인 것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철학적 직관,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범주, 유들과 관련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새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자문한다거나, 그 얼굴 생김새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거대한 문제들, 물질의 문제, 의식의 조직화에 대한 문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커다란 문제들에 대해 사변할 것이다. 이것들은 분석의 결과들이라기보다는 철학자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하는 직관들이다."[각주:11]

귀중한 환기점이다. 베르그손주의가 우리를 추상들로부터 떼어내어 곧장 독자성의 영역으로 향하게 한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사유의 개별화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혼동한 모든 사람들은 이 환기점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일반 관념의 학문으로서 철학의 전통적 개념화에 대한 비판은 진정한 개체성을 드러내는 질적 차이에 접근할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함을 고발하는 베르그손의 빈번한 언급과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일반성의 요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적인 것générique의 요소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된다. 철학적 직관은 사물들의 유들, 실재의 층위들 혹은 영역들, 경험의 폭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경험 자체나 예술의 작업을 대체하여 우리에게 개별적 실재들을 포착하게 한다고 자처한 바가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직관은 지성적 활동의 평면 위에 감성을 중복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우선은 방법, 즉 개념들의 기예로서의 무언가이다. 더욱이 이러한 방법은 이중적이다. 베르그손은 곧장 이 점을 설명하려 애쓴다. "방법은 이중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철학사로의 회귀와 학설들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각주:12] 이것이 바로 "지성주의적 환상에 대한 지성적 반대급부"[각주:13]이다. "거짓 문제들"의 해명, 그리고 우선은 분석들에 대한 연구와 비판. 요컨대, 이차적인 분석. 그러나 또한, 그리고 동시적으로, 베르그손이 다른 곳에서 사실상 문제들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체계들의 역사.[각주:14]

하지만 베르그손이 강조하는 이러한 비판적 차원이 철학적 활동이 배양되는 인식의 생산 과정에서 그가 분석적 기법들에 인정하는 충분히 긍정적인 성격을 시야에서 놓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언어편중주의verbalisme의 비판, 개념들의 단순한 조작적 변증법에 머무는 이론들에 대한 거부가 분석이 필연적으로 관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분석은 관찰과 기술 작업을 통해 사실들을 도출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케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실증 과학이 철학에 주는 이점이다. 실증과학은 이론들을 생산하기에 앞서 훌륭한 소여들의 공급자이다. 의식의 직접 소여 옆에는 에너지의 감소나 기억의 질병들에 관련된 물리학적 질서나 생리학적 질서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실증 과학이 없다면 철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학이 몇몇 지점들에서 과학의 현 상태와 충분히 동화되지 않는다면, 사태들을 충분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15]...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방법이 문제시되는 경우, 특별히 출발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발점의 선택은 운동 방향만큼이나 결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들로 시작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들이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철학적 이점을 은폐할 수 있는 합리화를 덧붙임으로써 사실들을 특정한 관점 속에 넣는 과학 이론들의 틀 속에서 제시된다 하더라도, 사실들을 경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철학적 직관이 운동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을 동반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분석이야말로 철학이 정확해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실의 선들과 접촉하고, 따라서 결국은 거기서 떨어져 나올지라도 대개의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사실의 선들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적 판형에 스스로를 적용한다. 분석은, 그리고 심지어 변증법조차, "직관을 시험하기 위해 필요한"[각주:16] 것들이다. 혹은 베르그손이 1903년 강의에서 이야기하듯, "철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석들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결과들과 동화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노력을 통해, 일종의 도약을 통해, 진정한 도약을 통해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하여, 이 직관에서 출발하고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소여들을 재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거짓된 길에 위치한 것이다. 분석과 접촉하여 끊임없이 직관을 시험하지 않고서 직관을, 뭐랄까, 진술하는 데 그치는 철학은 순전한 공상일 것이다."[각주:17]

거짓, 공상. 베르그손이 "자유롭게 내버려져" 과학이 그 실천적 조건들을 제공할 실험적 제어와는 독립적으로 그 문제를 공식화하는 철학이 이룰 일탈을 특징짓기 위해 이렇게나 단호한 용어들을 선택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난 직관은 철학 전체를 일종의 백일몽으로 전복시키며,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주의의 거대한 주제들--지속, 창조, 자유 등--의 단순한 언어적 반복을 노리고 있다. 그것은 우아한 착란délire--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착란은 dé-lirer, 즉 고랑sillon에서 벗어나기를 의미한다--의 위험이다. 최선의 해독제는 다시 한번 말하건대, 시작점에 주의를 기울이는[깨어있는] 것이다. 개념들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지만, 직관에서만 출발해서도 안된다. 언제나 사실들을 통해, 분석이 밝혀낼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 시작해야 한다. 심지어 일단 직관에 "자리잡은" 뒤에도, 사실과 접촉하여 직관을 전개하는 일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깨어있어] 분석의 소여들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직관이 말하자면 분석 쪽으로 자기 자신을 구부려서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공통 표면"[각주:18]을  통해 분석을 뒤따르는 이러한 복잡한 운동이 베르그손주의의 독특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일상적인 모티프, 흐름이나 방향이라는 개념들과 연결된 직관들의 벡터적인 모티프와의 단절을 드러내는 하나의 위상학적인 이미지가 강제된다.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여러번 여기에 호소한다. 그것은 비틀림torsion이다. 베르그손은 수학자 에밀 보렐에게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적 활동은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일종의 비틀림"[각주:19]의 결과다. 이 표현은 이미 『창조적 진화』에서부터 등장한다. 진정한 운동성, 그러니까 생성의 창조적 측면을 사유하는 것은 지성에게 있어 "지성의 자연적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지성이 "스스로 비틀리는 것"[각주:20]을 전제한다.

이 이미지는 레옹 브룅슈빅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 아름다운 헌사의 텍스트에서, "지속 속의" 사의 특징적인 작업이 실천적으로는 아주 힘든 직관의 작업이기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각주:21]는 역설을 강조한다. 직관이 요구하는 노력이 그렇게나 힘든 것이라면, 그 이유는 사유가 스스로에 대해 행하는 이 비틀림으로 인해 관건이 되는 것이 단순히 일상적 인식과 과학의 지성적 진행이 수행되는 것과 평행한 길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본성에 반하는 저지받은 운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베르그손은 앞선 모든 고찰들을 충분히 잘 요약하는 기이한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함이 절대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각주:22] 이것이 "철학함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이지 않다..."가 아님에 주목하자. 이 뉘앙스를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어쩌면 들뢰즈처럼 "상궤에서 벗어난 운동들"에 체계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와, 과학적 인식의 자연적 운동을 언제나 몇몇 정확한 지점에서 바로잡거나 교정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인식이 실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방식 중 하나로 남는 실증적 형이상학 사이의 차이는 여기에서 작동할지도 모른다.





  1.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2007, p.95. 베르그손은 청중들과 독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요구되는 이 노력을 "과격하다violent"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Ibid., pp.157, 210, 213). 이러한 준-생리학적인 보충을 무엇이 정당화하는지는 뒤이어 보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édité par A. François, Paris 2018, p. 19.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이 강의는 그 해의 첫 강의이다. 이 강의는 베르그손이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 라틴 철학사" 강의직(강의명에도 불구하고 근대 철학으로의 수많은 주제이탈이 이루어졌다)을 맡아 수행했던 이전 3년 간의 강의에서 제시되었던 연구들을 방법론적으로 요점정리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14. [본문으로]
  4. Ibid., p. 213. [본문으로]
  5. Ibid., p. 206: "만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면 형이상학은 단지 사유 작업의 자연적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 정신의 확장을 통해 즉각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물 속에 위치하여, 결국 개념들에서 실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서 개념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일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6.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1. [본문으로]
  7. Voir Durée et Simultanéité, Paris 2009, pp. 151-156. [본문으로]
  8.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
  9. Ibid., p. 23. [본문으로]
  10. Ibid. 이 사례는 다음 해에 펠릭스 라베송에게 헌사되어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264에도 실린 저자 소개에도 등장한다. "발생적 축"이라는 표현은 라베송의 것이다. [본문으로]
  11.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69. [본문으로]
  14. 1899년부터 테오뒬 리보가 가지고 있었던 꼴레주 드 프랑스의 근대철학 교수직으로 옮길 때, 베르그손의 본래 계획은 전통적인 "체계들의 역사"를 "문제들의 역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voir R.-M. Mossé-Bastide, Bergson éducateur, Paris 1955, p. 65). 인과의 관념, 시간의 관념, 기억의 관념, 자유의 관념, 의지의 관념, 어떤 관념이 문제시되건 간에, 베르그손은 그의 강의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체적인 문제들의 변형을 추적하고, 그보다 앞서 서로 다른 학설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던 방식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의 정확한 공식화를 도출하고자 하는 데 할애하였다. 베르그손은 이 "위대한 문제들"에 있어 상반되는 두 주장들이 종종 공통 전제 위에서 반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그는 연속성의 외양 하에서 사실상 새로운 문제를 여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에도 동일한 관심을 기울인다("유"를 통한 사유에서 근대적인 "법칙" 관념으로의 이행이 함축하는 자연 관념의 변형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시간 관념에 대한 1902-1903년 강의의 핵심에 위치한 이 질문은 기억 이론들을 다루는 1903-1904년 강의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창조적 진화』의 3장과 4장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5.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5. [본문으로]
  16.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2007, p. 239.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폴-앙투안 미켈과 함께 서명한 「우리, 베르그손주의자들 : 교토 선언문」을 참조하라. 이 글은 «Dissertatio: Revista de Filosofia», volume suplementar IV, dossiê Bergson, 2016 (https:// periodicos.ufpel.edu.br/ojs2/index.php/dissertatio/article/view/11010/7097)에 실렸고, 영문 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17.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p. 25-26. "끊임없이"라는 부사는 아주 축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그손은 1916년 마드리드의 학생들에게 이 점을 환기시킨다.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철학은 언제나 여러분이 대학에 있었을 때의 정신의 기질, 새로운 대상에 대한 연구나, 심지어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연구에 맞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기질을 요구한다"(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Paris 2011, p. 483). [본문으로]
  18. H.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op. cit., p. 44. [본문으로]
  19. H. Bergson, Réponse à un article d’É. Borel, janvier 1908 (dans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357). [본문으로]
  20. H.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op. cit., p. 162. 이 뒷부분에서, 베르그손은 오성이 개입시킨 장애물들을 극복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동일한 의미에서 "의지가 스스로 행하는 비틀림"에 대해 이야기한다(p. 251). [본문으로]
  21. La vie intérieure de l’intuition, texte reproduit en annexe de H. Bergson, Écrits philosophiques, op. cit., p. 987. [본문으로]
  22. H. Bergson, 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op. cit., p. 2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