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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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2017년 6월 21일)


아델 반 레트 :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덥네요. 정말 덥습니다. 무기력, 녹아내림, 불쾌... 당신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사유와 운동』에서 베르그손이 전해주는 성찰들에 잠겨들기에 완벽한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베르그손은 우리가 사유와 다시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성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지성은 실재를 재단하여 실재와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사유와 접촉하는 것은 직관의 단순성을 통한 것입니다. 우리를 넌지시 앙리 베르그손에게로 데려다 줄 상쾌한 장미빛 마티니와 함께 이 프로그램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음악 : Pink Martini, Sympathique)


반 레트 : 그래도 조금은 일travail을 해 볼까요. 이건 오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르그손의 직관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직관은 어떤 작업travail의 결과물이지요. 안녕하세요, 다비드 라푸자드.


다비드 라푸자드 : 안녕하세요.


반 레트 : 당신은 파리 1 팡테옹-소르본 대학의 부교수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베르그손에 대한 책,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오늘의 주제와] 핑크 마티니와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이 노래 “공감적sympathique”입니다. 그들은, 아니 그녀들은 공감적인 것이 환상적인 일이라고 노래합니다. 베르그손에게 “공감”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희”나 “생의 약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공감도 베르그손이 중시하는 개념이죠.


라푸자드 : 네 공감도 아주 중시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방법으로서 중시됩니다. 즉 공감은... 공감은 베르그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직관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직관이 공감의 한 형태라고 말하곤 하지요. 따라서 양자가 동의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양자는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을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세계와 직관적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는 이 정의는 끊임없이 되돌아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면, 무엇에 대한 직관이 가능한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르그손은 공감을 개입시킵니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공감이, 아니 직관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접촉, 즉 세계와의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다른 사물과 관계맺게 해주는 것은 공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공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공감은 자기 자신의 운동과는 다른 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무언가의 내부로 들어가는 사태입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지성은 존재하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면서 그 사물들을 분석하고, 재단하고, 명명하고, 하나의 체계로 조직하는 반면, 공감은 말하자면 사물들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거의 엄밀함을 결여한 것처럼, 일종의 시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엄밀한 무언가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밖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 안에 반향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비를 통해서요. 따라서 나는 밖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스스로 묘사하고, 그 운동을 마치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스스로 일으킵니다. 따라서 타자, 타자적인 무언가, 음 뭐라고 할까요, 그건 춤의 운동일 수도 있고,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임의의 운동일 수도 있는데, 여하간 나는 그 운동을 내 안에서 재생하고, 그것을 재생함으로써 거기에 직관적으로 접근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닌 거군요?


라푸자드 : 공감은 도덕적인 자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하나의 인식 방식입니다. 공감이 사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운동에 접근하게 하는 한, 공감은 하나의 인식 방식에 대한 묘사입니다. 따라서 공감은 “공감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반 레트 : “함께 느낀다”는 거군요.


라푸자드 : 정확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말의 어원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함께 느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에게서 분명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모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운동시키는 것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거의...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공감은 운동의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맞습니다. 그 점을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운동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번주에 『사유와 운동』이라는 텍스트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봅시다. 이 책은 191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다양한 강연들과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니, 1911년이군요.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텍스트, 베르그손이 이 저작의 네 번째에 위치시킨 강연은 1911년 4월 10일 볼로뉴에서 열린 세계철학회에서 행해진 강연이니까요. 이 글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입니다.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직관이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의 작업의 관심은 우리가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항상 개념들은 아니라는 점을, 또한 어쨌건 개념이 반드시 지성의 사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 속에서, 25페이지 가량 되는 이 짧은 텍스트의 끝부분에서 공감이라는 이 개념을 발견합니다. 이 개념은 정확히 베르그손이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정박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죠. 당신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우리를 우리 밖으로 이끌어가고, 우리가 밖에서 목격하는 것을 우리 안에서 재생하게 만드는 이런 종류의 약동을 통해 우리와 세계 사이에 수립된 연결고리와 같은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라푸자드 : 바로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은 최근에 뇌 연구 분야에서 행해진 발견에 아주 매혹되었을 것 같습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된 발견 말입니다. 이 뉴런은 밖에서 행해진 것으로 지각된 운동을 재생하는 뉴런입니다. 마치 그것이 실제 세계 속에서 유효하게, 즉 현행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잠재적으로 재생하는 듯 말입니다. 예컨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사람은 아이에게 숟가락을 기울이면서 아이와 동시에 입을 열지요.


반 레트 : 모방mimétisme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모방의 한 형태와도 같은 것이죠. 하지만 더 심층적으로, 그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에 대해pour soi 재생하는 사태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에 대해”라는 말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관건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세계에 밀착시키고, 세계에 다시 매어주는 이러한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르그손은 직관이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정신은 자기 자신의 바탕에서 다른 것들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은 그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공감의 운동을 통해 이 다른 것들을 발견합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공감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네.


반 레트 : 우리에 관한 무언가를요.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공감은 우리 안에서 타자성의 한 형태를 밝혀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타자성은 사실 가장 내밀하게 구성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손은 직관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이면서도 여기서 관계를 맺는 자기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당신이 공감에 대해 정의한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무엇인지 정의해야겠군요. 다비드 라푸자드.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읽을 텍스트, 「철학적 직관」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들어보시죠. 이 구절에서 우리는“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는 베르그손의 주장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철학자는 공감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발췌문에서 베르그손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합니다. 당신이 조금 전에 든 “거울 뉴런”의 사례는 베르그손이 과학적 연구의 영역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베르그손이 쓴 그의 모든 작업들은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굉장히 많이 참조하고 정리해 두었지요. 단지 그의 사유는 변하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를 구분해둡니다. 자 들어보시죠.


조르주 클래스 : 과학은 행동의 보조이다. 그리고 행동은 결과를 겨냥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성은 원하는 특정한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특정한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과학적 지성은 사물들의 하나의 배치에서 하나의 재배치로, 하나의 동시성에서 다른 동시성으로 나아간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시한다. 혹은, 그것이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 간극 속에서 다른 배치들을, 그러니까 여전히 동시성들을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을 가지고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속으로 진입하여, 운동을 뒤따르며, 사물들의 생 자체인 생성을 채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후자의 임무는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운동에 대해 부동의 시각만을 취하여 반복하지 않는 것을 따라 반복들만을 모아들이면서 실재를 편의에 따라 잇따르는 평면들로 분할하여 인간의 행동에 종속시키는 데 전념하는 과학자는 자연을 기만하고 자연에 대해 불신과 싸움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반면 철학자는 자연을 동료로 여긴다. 과학의 준칙은 베이컨이 제시했던 것이다. 지배하기 위해 복종하라. 철학자는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공감을 추구한다.


(음악 : Bill Evans, Here's that rainy day)


반 레트 :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로 베르그손의 글을 들으셨습니다.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입니다. 10시 12분 1934년 출간된 베르그손의 텍스트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는 다양한 강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은 그 중 4번째 강연인 「철학적 직관」을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읽고 있습니다. 한편에 과학을, 다른 한편에 철학을 대립시키는 이 글은 아주 명료하네요. 조금 과하기까지 합니다. 베르그손의 작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흑백논리로 이해할지도 모릅니다. 과학은 거의... 음 나쁜 과학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반면, 반대로 철학은 직관의 편에 선다는 식으로요. 어떻게 하면 베르그손을 더 잘 이해하고, 이 점에 대한 오해를 완화시킬 수 있을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먼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의 모든 저작들이 과학을 아주 많이 참조한다는 점이지요. 그 말은 곧... 음, 우리가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을 편다면, 이건 베르그손의 첫 번째 저작인데요, 거기에는 정신생리학과 관련된 문제가 많습니다. 베르그손의 두 번째 책인 『물질과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어증이나 뇌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많지요. 『창조적 진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데요. 그 이유는 베르그손이 라마르크주의나 다윈주의의 가설들, 세포생물학의 연구들과 논쟁을 벌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과학에 대항하여 작업하기보다는 과학과 더불어 작업한다고 말이지요. 단지 베르그손은 과학의 풍부함과 풍요로움이 균등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베르그손은 자신의 작업을 전진시키기 위해 과학에 관심을 쏟지만, 과학에 하나의 한계를 할당합니다. 과학이 모든 영역에서 아무리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이 한계는 과학에 내적인 것입니다. 이 한계는 바로 지성입니다. 과학의 한계는...


반 레트 : 역설적으로 한계지어지는군요.


라푸자드 : 역설적으로. 네 맞습니다. 과학은 과학을 전진시키는 것에 의해 한계지어져 있습니다. 지성은 재조합가능하고, 분석가능하고, 재단 가능한 견고한 요소들 위에서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들은 체계들로 배치될 수 있어야 하고, 방정식들로 정돈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처럼, 물론 베르그손은 때로 그의 사유에 미묘한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지성은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요소들의 재조합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지성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음 저는 이 한계가 인간 종의 구성적 한계라고 말하고 싶군요. 베르그손이 보기에 인간 종을 다른 동물 종들과 구분하여 특징짓는 것은 인간의 지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인 필요에 포함된 지성은 정신 속의 거의 전 영역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간 정신에 가장자리가 존재합니다. 바로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죠. 일종의 모호하지만 극도로 비옥한 이 영역이 바로 직관입니다.


반 레트 : 이 말은 곧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지성이 일종의 계산 능력이나 논리 능력으로 환원된다는 말인가요?


라푸자드 :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성은 또한 실천적이기도 합니다. 지성은 우리에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지요. 지성은 세계에 대해 행동할 수 있게 해주고, 세계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 세계를 재단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 레트 : 지성은 공간적인 것이군요. 재단한다는 것은 공간의 편에 있는 것이니까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시간을 공간이 아니라 지속의 편에서 사유하려 하지요.


라푸자드 : 물론입니다. 네, 지성은 공간적입니다. 맞습니다. 심지어 지성의 모든 생산물을 공간의 관념이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거기에는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이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이 무한한 가분성의 도식은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의 기저에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바로 그 점입니다. 이미지들을 포함하여, 공간은 과학 영역에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표상하는 즉시, 우리는 사실 이 표상을 공간화하게 됩니다.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우리는 직관을 통해 접근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에 속하는 것은 전혀 공간적이지 않죠.


라푸자드 : 맞습니다. 지성은 본성상 표상적입니다. 그리고 직관은...


반 레트 : 직관도 정신 속에 위치해 있지요?


라푸자드 : 직관은 정신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직관이 전제하는 바는... 베르그손의 말처럼... 음 이것은 베르그손의 가장 유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인데요, “철학은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인간적 조건을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적 조건을 구성하는 지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해방된다는 말은 지성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컨대 지성을 일종의 관념에, 직관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직관은 모호하고, 비규정적이고, 불명료한 것이지만,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는, 잠재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예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 잠재성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들과 많은 작업이 필요합니다.


반 레트 : 벌써부터 직관을 정의하려 시도해야 하겠군요. 직관에 대한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정의를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장켈레비치 아카이브, 직관이란 무엇인가 (source :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 13/05/1967))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 직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가장 가까이서 사유하는 일종의 곡예의 기술입니다. 거의 사물 안에 들어갈 정도로, 사물 안에 들어가 있기에 더 이상 그것을 사유하지 않을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죠. 당신이 너무 멀리에 있다고 해보죠. 거리두기와 물러섬, 과도한 의식이 그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경우 당신은 진상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쪽에 위치한다면, 당신은 진리를 모든 면에서 알게 되지만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합니다. 이는 불꽃 주변의 불나방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방이 불꽃에서 멀리 떨어진다면 나방은 불꽃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 이미지는 차갑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죠. 나방이 불꽃 안에 위치한다면 나방은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불꽃에 대한 직관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고, 불꽃을 스쳐 지나가며, 불꽃과 접하는 곡예적인 기술입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그 불꽃에 의해 불타버리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진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어떤 번개같은 순간에, 진리는 우리 시각의 대상이 됩니다. 직관의 대상 말입니다. 직관 속에서 당신은 진리를 사는 동시에 진리를 사유하게 됩니다. 당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알게 되지요.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이 “행동인으로서 사유하고 사유인으로서 행동하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고 한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하라는 말이고,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이 되라는 말입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의 목소리, 아니 죄송합니다. 장켈레비치의 목소리의 어조는 베르그손이 묘사하는 생의 약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생의 약동은 결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동시에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죠. 이 목소리는 1967년 “서양의 스펙트럼 분석”이라는 놀라운 제목을 가지고 있는 방송 중에 발화된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문화방송이었구요. 베르그손이 제안하는 정의는, 아니, 장켈레비치였죠.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손에 대한 한 저작의 저자입니다. 이 저작은 아주 훌륭하고, 접근 방식을 다각화하지요. 게다가 베르그손에게 보내는 가장 멋진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장켈레비치의 정의는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직관에 대해 말한 바를 이어가는군요. 직관은 나방이 불꽃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특정한 거리입니다. 알맞은 거리 말이죠. 너무 멀면 직관을 갖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우면 그것에 의해 불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떤 작업을 발명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점은 지금으로서는 반직관적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여기서 이 거리는 우리가 지성적인 인간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관은 단지 우리 정신의 가장자리에만 위치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보기에 작업이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발췌문에서 장켈리비치는 일종의 번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번개를 쫓아 이 번개를 다시 만나려고, 혹은 이 번개를 정식화하려고 하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직관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해볼 수도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마주쳤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컨대 우리는 생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합니다. 그리고 생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어떻게 솟아난 것인지도 모를 일종의 예감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부를 탐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다윈의 텍스트, 라마르크의 텍스트, 생물학자들의 텍스트, 자연주의자들의 텍스트를 읽고 나서, “자, 생 속에는, 그리고 어쩌면 이러저러한 사물들 속에도 생적인 측면이 있다”와 같은 가설을 그려보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가설들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을 납득해야 하구요. 수많은 청사진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정식화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건 다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정확히 그들이 말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말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 우리의 정신을 맴도는 일종의 “부정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니오”들이..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있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맞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 레트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라푸자드 : 맞습니다.


반 레트 : 말하고자 하는 것 주위를 맴돌게 되지요.


라푸자드 : 주위를 맴돌고,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명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작업 속에서, 생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접근하려 한다고 해 봅시다. 베르그손은 생 속에서 생적인 것을 규정하려 하지요. 생 자체가 아니라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을요. 베르그손은 그가 시험해볼 수 있는 그 모든 가설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따라서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긍정적인 가설이 점진적으로 그려지고 점진적으로 나타나, 자신을 강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설은 생 속에 있는 생적인 것이 바로 창조적 약동이라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가설을 찾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오랜 작업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 레트 : 그것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명명하는 것인가요? 그 가설이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명명할 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정확히 말해야겠군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반 레트 : 그러니까 그건 발견이군요?


라푸자드 : 그건 발견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우리가 조금 전에 공감에 대해 말했던 바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만, 타자적인 무언가로 발견합니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죠. 따라서 그것은 창조인 동시에 발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재이지만 너무 불명료한 선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선재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제시된 빛을 통해 수행한 작업이 이러한 불명료함을 밝히고 그 선재성에 더 많은 명료성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반 레트 : 그러니까 철학자의 작업은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을 밝혀내서 거기에 일종의 형태를 부여하는, 혹은 적어도 그 위에 말들을 부여하여 그것을 아마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겠군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적합하지 않은 수단, 즉 지성의 수단을 이용하여 타자에 속하는 것을 다시 전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네. 바로 그 점말입니다. 철학자는 직관의 편에 있지만, 또한 지성의 편에도 서있으니까요. 그리고 철학자는 자신의 지성에 호소하는 것 말고 다른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지요. 그럼 베르그손은 다른 수단이 없음에도 이 수단을 규탄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음... 그건 장켈레비치의 나방과 같은 것입니다.


반 레트 : 네.


라푸자드 : 베르그손은 그와 동시에 직관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직관으로 되돌아간다는 조건에서요. 한 번 직관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죠. 이 직관은 길잡이입니다. 그건... 우리는 지성을 발휘할 때는 언제나 직관과 가까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반 레트 : 이 점이 베르그손으로 하여금 이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 가운데 하나를 쓰도록 만들었나 보군요.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이런 설명을 제시합니다. 결국 철학자가 말하려 하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점이고, 이 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철학자는 그것을 말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말이죠. 단순성이 결국에는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고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매우 매우 풍요로운 것이라는 이 관념에 대해, 조르주 클래스가 읽는 베르그손의 텍스트를 들어보시죠. 


클래스 : 우리가 철학자의 사상 주변을 도는 대신 그 속에 더 자리잡으려 할수록, 우리는 그의 학설이 다음과 같이 변형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복잡성이 감소하고, 다음으로는 학설의 각 부분들이 서로의 내부로 들어가, 결국에는 하나의 단일한 점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이 점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점차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리라는 점을 느낀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공하는 것을 정식화하면서 그의 정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그러고 나서는 그의 수정을 또 수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따라서 이론에서 이론으로 교정을 거듭하며 그는 완성되어 간다고 믿었으나, 그가 했던 일은 단지 복잡성이 복잡성을 불러오고 전개가 전개에 병치되어 놓이면서 그의 본원적 직관의 단순성을 상승하는 근사치로 되돌려주었던 것뿐이다. 따라서 그의 학설의 무한히 증가할 복잡성은 그의 단순한 직관과 그가 이 직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들 간의 통약 불가능성에 불과하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이미지이지만,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철학자의 정신에 출몰하는hante 것이고, 그의 사유의 우여곡절을 통틀어 그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것이며, 직관 자체는 아니라 해도 필연적으로 상징적인 개념적 표현보다는 훨씬 더 직관에 가까운 것이다. 직관은 “설명들”을 제시하기 위해 이 이미지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음악 : Bugge Wesseltoft, Road home)


반 레트 : 직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철학적 직관은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오늘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에서 우리는 이 일에 도전하려 합니다. 「철학적 직관」은 베르그손이 1911년 행한 강연의 제목입니다. 이 글은 1934년 출간된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이 모음집을 다룰 것인데요.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와 함께 합니다. “이 점에는 단순한 무언가, 무한히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극도로 단순하여, 그 철학자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철학자는 평생동안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 문장들이 요약하는 바, 아니 설명하는 바, 아니 표현하는 바는... 여기 있는 것을 표현하는 어려움에 대해 베르그손이 말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 적절한 용어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여하간 이 문장들이 표현하는 바는 철학적인 몸짓 자체, 탁월한 예술적인 몸짓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는군요.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단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이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쓰고 또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고 또 작곡하면서 생을 보낸다는 말이니까요. 사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관념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성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구요.


라푸자드 : 네. 그렇지만 이미...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것이 쉬운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죠. 쉬운 것은 바로 지성이 우리 인식의 가능한 재조합을 통해 접근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식들을 마음대로 재조합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해독하려 합니다. 반면 단순한 것은 끝점에서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서 우리가 작업에 대해 말한 바와 겹쳐집니다. 교수에 대해 말할 경우에 이 점이 두드러지죠. 가장 단순한 교수들, 가장 어려운 것들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말하는 데 성공하는 교수들은 가장 많이 작업하는[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마지막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작업을 거친 이후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고, 일종의 그림자처럼 작업의 전 과정동안 작업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그 단순성 자체에 있어, 그 응축성 자체에 있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발견되는 관념은... 뭐라고 할까요, 베르그손주의의 골격이 되는 관념입니다. 우리가 더 고양될수록, 우리는 한층 더 단순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 더 밀도있고 응축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압축하여...


반 레트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군요.


라푸자드 : 거의 하나의 점과 같습니다. 맞아요. 극도의 밀도를 갖는 점이죠.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이 단순성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더 분산되고 더 공간화되며 정신의 강렬한 생을 더 이완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단순성은 이런 종류의 극도의 밀도를 가진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접촉하고 있으면서도 지성에 의해 이로부터 분리되어 있지요. 지성은 본성상, 그러니까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성의 본성입니다. 지성은 본성상 공간화할 수밖에 없고, 다시 말하면 재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최소의 노력을 향해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단순한 것을 향한 이 노력을 줄곧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일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의 말을 들으니 왜 베르그손이 논리혐오의 길에 빠지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논리혐오는 지성이 우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데려갈 수 없고 직관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성에 대한, 지성에 대한 증오를 갖는 것이지요. 왜 신비주의에 빠져서 일체의 철학적 작업, 그러니까 이성의, 지성의 작업을 몰아내면 안되는 것인가요?


라푸자드 : 제 생각으로는 철학에 내속적인 일종의 교육론이 이 지점에 있습니다. 몇몇 개인들은 아마도 충분히 강하고 강렬한 직관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신비가들의 경우나, 베르그손의 말하는 것처럼 몇몇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시각을 가지고, 사태를 지성의 재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실천적 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직관에 의해 전복되는 이러한 특권을 갖지 못한 채로 언제나 지성의 양태들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작업을 통해, 고된 일을 통해, 겸허한 희생을 통해 이 직관에 도달하여 그것의 덮개를 벗겨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반 레트 : 직관을 표현하기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군요. 그런 이유로...


라푸자드 : 정확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이 지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구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군요.


라푸자드 : 선택지가 없는 동시에, 베르그손에게 이것은 단지 예술가, 신비가와 같은 예외적인 존재들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과 직관적인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은 텍스트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직관은 무엇인가? 철학자가 이에 대한 정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우리라고 그 일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포착하여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이 직관을 번역하는 추상들의 복잡성 사이에 있는 특정한 매개적 이미지일 것이다.” “희미하고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표현되는 이 “매개적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반 레트 : 여러 마디로 말하셔도 됩니다(웃음).


라푸자드 : 네. 여러 마디로 말해도 되지만(웃음), 뒤이어 설명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그건 일종의 몸짓geste입니다. 그건 철학자가 수행하는 몸짓이지만, 철학자가 그것을 수행하는지도 모르면서 소유하고 있는 몸짓이죠. 그것은... 하지만 이 몸짓 자체는 결코 직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건대 직관은 불가지한 것의 한계에 위치해 있고, 이 몸짓은 베르그손이 “매개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이미지는 개념 너머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철학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철학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경계에 있는 것입니다. 지성의 산물인 한에서 철학은 개념들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직관과 지성 사이에는 일종의 매개적인 영역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 장소에서 이미지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철학의 발생적 운동을 수용하려 하는 이미지들을 말이죠.


반 레트 : 이건 심적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시각적 이미지인가요? 그러니까 무언가에 대한 시각적 표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미지 말입니다. 아니면... 아니면 심적인 이미지인가요. 예컨대 이 이미지가 하나의 회화, 그림을 의미하는 건가요?


라푸자드 : 아닙니다. 그건 심적 이미지입니다. 동시에 이 이미지는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이미지를 빌려올 수는 있습니다. 어떤 운동을 표상하느냐에 따라서요. 말하자면 어떤 움직임이냐에 따라서 말이죠.


반 레트 : 예컨대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어떤 이미지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까요? 아니, 베르그손은 이미지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나요?


라푸자드 : 그건... 음 베르그손 자신이 사용했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죠. 이건 사실 베르그손이 드는 흔치 않은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그가 다른 영역에서는 사례들을 들긴 하지만요. 베르그손은 「철학적 직관」에서 버클리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버클리의 저작을 오랫동안 애독한 뒤에, 그러니까 오랜 작업 뒤에, 버클리의 저작 속에 제시되어 있는 가설들과 주장들이 어떤 것인지 검토한 뒤에, 서로 결부되어 있는 두 가지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말합니다. 그 중 하나는 물질이 일종의 투명한 막과 같다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지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버클리는 관념론 철학자이지요. 분명 베르그손이 많이 읽었던 철학자구요. 베르그손은 이 강연에서 버클리에게 몇몇 페이지들을 할애합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베르그손이 언제나 철학사를 참조하고 있다고 해도, 왜 베르그손이 특히 버클리를 다루고 있는지 물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버클리 또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직관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지만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버클리는... 버클리가 만들어 낸 철학 전체를 통틀어 버클리가 찾던 것은 일종의 신과의 직접적 접촉입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말하자면 이 중심적인 점을 어떤 이미지 속에서 다시 붙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신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러한 비물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버클리는 물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다른 이미지도 참조해볼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아마 더 생생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생의 약동, 즉 모든 생명체에 내속하는 생명성을 수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편들로 폭발하고, 이 파편들이 또 다른 파편들로 폭발하는 어떤 포탄의 관념입니다. 이것은 역동적인 이미지, 자연 속에서 전개될 수 있었던 다양한 형태들과 종들을 가로질러 영구히 폭발하고 있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반 레트 : 한 잔의 물 속에 녹아드는 설탕 조각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베르그손은 지속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하지요. 우리가 물 속에 설탕 조각을 넣을 때, 우리는 설탕 조각의 완전히 용해되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압축할 수 없는 시간이 바로 베르그손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이 이 텍스트에서 설명되는 이미지인가요? 아니면 단지 교육적 은유일 뿐인가요?


라푸자드 : 저는... 교육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이미지는 사유의 대상이 가진 역동성, 운동에 속하는 어떤 지점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종종 우리의 정신을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과의 공감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지요. 마치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어떤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아마도 그에 대한 직관에 합류할 수 있겠죠.


반 레트 : 그 때문에 베르그손이 펼쳐내는 귀중한 자원들이 그의 문체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군요. 어쨌든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죠. 1959년 RTF에서 이루어진 대담입니다.


(녹음된 목소리 : 메를로-퐁티 아카이브, 베르그손의 문체 (source : Henri Bergson, 19/10/1959, RTF))


모리스 메를로-퐁티 : 베르그손에게는, 직관적 철학자의 면모와 논쟁하는 철학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논쟁하는 철학자는 이전 철학이나 상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철학자입니다. 사실 이 두 철학자는 상당히 다릅니다. 베르그손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 학계의 교양은 가장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발표 중의 우아함이나 섬세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논증의 영역에 있다고 느낍니다. 그때 베르그손은 아주 능수능란하고 설득력있지요. 그런데 갑자기 몇몇 단어들이 탐사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 예술의 특정 기법들과 다행스럽게 마주치기에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이 자연에 선행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그손의 문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문체는 어떤 순간에는 언제나 연마되어 있고, 언제나 우아한,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다소 학적이기도 한 문체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문체는 제 생각으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특질을 갖습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힘과 활력이라는 특질을 갖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직관에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음악 : Keith Jarrett, Rio part IX)


반 레트 : “베르그손을 묘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가 분명히 유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언제나 반쯤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언제나 그가 보고 있는 형태를 아주 어렵게 기술하고 있는 사람의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고뇌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뒤섞여 있는 덩어리에서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양 엄지와 검지를 움직였다.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확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마치 베르그손이 사태의 혼란스러운 흐름 속에서 극도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특정한 곡선을 볼 수 있는 것 같았고, 베르그손은 아주 주의깊게 말을 고르고 은유와 묘사를 사용하였기에 다름아닌 그가 보고 있는 곡선의 정확한 형태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형태의 진술일 것이다. 베르그손은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각자의 사람이 계속해서 강연자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계속)


반 레트 : 반쯤 감긴 눈, 고뇌하는 듯한 휴지, 가느다란 실을 끌어내는 듯한 엄지와 검지의 몸짓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문학비평가 토머스 에르네스트 흄Hulme이 기술하는 앙리 베르그손의 일화입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볼로뉴 강연에 참가했었죠. 이 강연의 제목은 「철학적 직관」으로, 우리가 이번주에 다룰 모음집 『사유와 운동』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은 철학자 다비드 라푸자드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음, 우리는 조금 전에 베르그손의 두 문체를 구분하는 메를로-퐁티의 목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논쟁하는 베르그손과 직관적 베르그손이 있었죠. 말하자면 갑자기 별안간 나타나는 시적인 약동을 가진 베르그손 말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제가 그 뒤에 읽은 흄Hulme의 글과 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주 우아하고, 거의 학적인 논쟁하는 사람인 동시에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을 향하는 직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거의 완전히 인격을 바꾸는 것 같네요, 다비드 라푸자드.


라푸자드 : 음... 저는... 제가 읽었던 내용에서는,


반 레트 : 앗, 처음 보시는 건가요?


라푸자드 : 예. 책에 실린 내용밖에 알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 두 발췌문에서 충격적인 점은 어떤 애착... 정확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애착입니다. 직관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모호하고 흐릿하고 비결정적인 무언가이기는 커녕, 물론 직관이 비결정적이고 불가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직관은 우리를 정확성을 향해 인도하고, 정확성을 향해 밀어갑니다.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구절들, 번개와도 같은 통찰력의 묘사들은 사실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커다란 정확성의 순간들입니다. 베르그손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정확성을 가장 높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일반적 사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 사물을 생각할 때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 레트 : 베르그손은 이 모음집의 첫 번째 논문에서부터 철학사에서 정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지요.


라푸자드 : 네. 그것은 개념의 일반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식이지요. 


반 레트 : “철학사에서 가장 결여되어 왔던 것은 정확성이다.” 이것이 이 모음집의 첫 문장입니다.


라푸자드 : 맞습니다. 정확히 그러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위해 재단된 의복은 정확히 이 사물을 위해 재단되어야 하고, 다른 어떤 사물에도 맞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그것은 아주 우아하고 현대적인 형태의 충족이유율입니다.


반 레트 : 맞아요. 그리고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정확성이 꼭 지성의 편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 말이죠.


라푸자드 : 네 그렇습니다. 정확성은 바로... 음... 베르그손은 라베송에 대한 텍스트에서 자신이 전통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는데요. 거기서 베르그손은 추상적 관념을 정의하는 두 가지 방식을 언급합니다. 한편으로, 추상적 관념, 예컨대 색의 관념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것입니다. 이 색들은 모두 구체적인 관념이기 때문이죠. 이 경우 추상 관념은 어떤 내용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한편으로 색의 관념은 구체적인 흰색 빛과 일체를 이룹니다. 이 빛은 프리즘을 통해 모든 색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완벽히 구체적인 이런 흰색 빛은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각각의 구체적인 색들은 모두 이 빛이 갖는 하나의 뉘앙스라거나 하나의 정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유해야 할 사태는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적 실재의 등급들이 됩니다.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이러한 것입니다. 실재 전체는 지속이라는 요소의 내부에서 사유되며, 각각의 구체적인 실재들은 지속이 갖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완전히 정확한 하나의 리듬이 됩니다. 물론 어떻게 각각의 실재가 그 자체로 지속의 특별한 리듬인지를 포착하려면, 이 지속과 가능한 한 직관적인 접촉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반 레트 : 직관 덕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왜냐하면 지금은 실재를 감각하는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시니까요.


라푸자드 : 직관 덕이지만, 공감이 수반되는 직관이어야 합니다. 그건...


반 레트 :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죠. 자신의 고유한 직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미 이 직관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당신이 말하는 리듬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정도에... 뉘앙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겠죠.


라푸자드 :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우선은 이런 것이죠. 그것은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리듬을 맞출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 리듬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베르그손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점은, 물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물질인 바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생 속에 있는 생명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 안에서 생명적인 것을 발견해야 하지요. 기타 등등. 따라서 베르그손이 사유한 모든 것, 즉 물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것, 생명적인 것, 사회적인 것... 베르그손이 이것들을 사유한 것은 단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상응하는 것들로... 평행하는 것들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는 이건 우리가 친구와 교제할 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관건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있던 친구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니까요. 우리는 그 친구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그만의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몸짓, 혹은 존재 방식이 그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죠. 


반 레트 :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용어를 통해 베르그손의 저작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죠.


(녹음된 목소리 : 사르트르 아카이브, 철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소명vocation은 베르그손에서 왔다 (source : diffusé le 21/04/1980, 사르트르의 죽음 며칠 전, TF1))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 왜 문학이 아니라 철학 쪽으로 방향을 잡으셨던 건가요?


장-폴 사르트르 : 아, 그건 베르그손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장애를 가지신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콜로나디스트리아라는 분이죠. 그는 첫 번째 작문 주제로 “지속의 감정”을 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베르그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책이었죠. 저는 그 책들에 사로잡혔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철학은 엄청난 것이구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베르그손을 거의 베낀 작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베껴쓰는 일은 잘 없지만,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베르그손이 진리를 말했는데, 왜 내가 다른 말을 해야 하지?” 그래서 저는 거의 요약에 가까운 작문을 제출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 어떤 성적을 받으셨나요?


사르트르 : 망했었지요. 그보다 2년 전에 저는 철학 수업에서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는지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일차적으로는 작가였지요. 그런데 철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도래했습니다. 이건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철학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음악 : Bill Fleming, Vim vigor and vitality)


반 레트 : 네. 생명성, 혹은 어쩌면 생의 약동. 베르그손은 이 생명성 혹은 생이 가진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당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신 바에 따르면요. 우리도 여전히 이 생적인 것을 찾으려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이 탐색을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내일은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 주의 기획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비드 라푸자드. 오늘 우리와 함께 「철학적 직관」에 대해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푸자드 :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반 레트 : 아주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베르그손을 읽고싶게 만들어 주시는군요. 청취자 여러분도 『사유와 운동』에 빠져보도록 하십시오.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판매중입니다.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다비드 라푸자드의 책, 『시간의 역량 : 베르그손 해석』도 읽어보시죠!


(음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