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길 - 베르그손, 사유와 운동(1/4)



이 글은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인 France culture의 Les chemins de la philosophie(<철학의 길>) 2017년 6월 19일 방송을 번역한 것이다. 철학자 아델 반 레트가 진행하는 <철학의 길>은 매주 새로운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대담을 나누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2017년 6월 19일에서 22일은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서 『사유와 운동』을 주제로 4일간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아래 원고에 번역되어 있는 베르그손 주간의 첫 번째 방송은 파리 ENS의 프레데릭 보름스가 초청되어 『사유와 운동』의 두 개의 서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그손 철학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좋은 입문인 데다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 있지 않은 프랑스의 라디오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소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방송은 "여기(클릭)"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직접 청해한 내용이라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는데,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길..




철학의 길 (2017년 6월 19일)


아델 반 레트 : 안녕하세요. 여러분. 철학의 길로 출발합시다. 이번주는 무슨 주고, 오늘은 무슨 날이죠? 여러분을 베르그손의 저작 속에 빠뜨리려 합니다.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지속을 찾아서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시간에서 지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손목시계를 거꾸로 돌리세요. 자명종을 끄세요. 괘종시계를 감추세요.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본래적 실존의 연속적 창조 속으로 빠져들 겁니다.


(음악 : Keith Jarrett, Part 1 (The Köln Concert, 1975))


반 레트 : 안녕하세요 프레데릭 보름스.


프레데릭 보름스 : 안녕하세요 아델 반 레트.


반 레트 : 철학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름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 레트 : 천만에요. 우리는 지금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1부를 듣고 있습니다. 그가 피아노 앞에 홀로 앉아서 청중들 앞에서 연주한 즉흥 연주죠. 전형적인 베르그손적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보름스 : 하지만 사실 모든 음악은 베르그손적입니다. 음악 자체가 불가피하게 베르그손적이죠.


반 레트 : 하지만 즉흥 연주가 조금 더 베르그손적인 건 아닐까요?


보름스 : 사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 베르그손적인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는 음악 속에서 각각의 음들이 예측 불가능하게 차례로 덧붙여지는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음악은,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은 단순히 공간 속에서 음들이 잇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시간적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의 음악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실재 자체에서 음악을 듣기만 한다면, 우리는 베르그손적인 것입니다.


(음악 계속)


(음악 교체 : Keith Jarrett, Nagoya Part IIb (1976))


반 레트 : 당신은 파리고등사범의 현대철학 교수이자, 2015년 이래로 고등사범학교 문학부 부학장이었고, 베르그손 저작의 첫 번째 비평판인 “베르그손 쇼크”를 엮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인 『사유와 운동』을 다루는 이번 주를 당신과 함께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언급하자면, 베르그손은 1859년에 태어나,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사망했습니다. 베르그손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정확히 같은 햇수를 살았던 것이지요. 하나의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옮아가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대칭성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삶의 정 가운데인 1900년에는 『웃음』이 출간되었습니다. 『웃음』은 희극성의 의미를 다룬 저작으로, 4년 전인 1896년에 출간된 심신관계를 다룬 『물질과 기억』을 연장하는 저작이었지요. 우리는 오늘 뒤따르는 구상들을 통해 계속해서 전개될 거대한 사유에 대한 회고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 시작점으로 향할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이것을 환상이라고 지적하지요. 사태가 시작하고 끝을 가진다는 생각. 시간은 현재를 가운데 두고 과거를 왼쪽에, 미래를 오른쪽에 둘 수 있는 연속된 선이 아닙니다. 베르그손이 철학사에 가져온 가장 큰 기여는 여기에 있지요. 이 선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진정으로 이해된 시간은 체험된 시간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지속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직관, 즉 사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능력의 소관인 것을 어떻게 말들을 통해, 우리의 지성을 통해 포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번 주에 다룰 이 베르그손의 저작의 제목을 이해할 첫 번째 방법은 이러한 것입니다. 이 제목은 하나의 문제를 나타냅니다. 『사유와 운동』. 사유는 지성에 속하는 것일 테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것을, 즉 운동을 붙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본성상 지성의 작업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해결책이 존재할까요? 프레데릭 보름스, 이렇게 문제를 드러내 봅시다. 분명히 이 제목은 베르그손의 저작 전체에 진입하기 위한 좋은 입구인 것 같군요.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제기하는 문제이니까요.


보름스 : 물론이죠. 놀라우면서도 감탄스러운 점은, 그리고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한 점은, 당신이 베르그손에 대한 시리즈를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으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베르그손은 그의 저작에 진입하는 출입구를 마지막에 마련해 두었지요. 이건 완전히 숙고된 처사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실 베르그손 자신이 밝히는 것처럼, 베르그손은 먼저 문제들을 다루며, 삶의 문제들을 대면함으로써 시작했고, 방법은 회고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의 정신이 회고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이러한 생각에 익숙해 있던 그는 사람들이 마지막 책을 다른 책보다 먼저 읽으리라는 점을, 그가 자신의 사유를 회고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 사람들이 그의 사유에 진입하는 방식일 것임을 완전히 의식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우리의 방송을 예측했던 것이지요. 그는 이 방송을 예상하였기에, 자신의 마지막 몸짓이 첫 번째 몸짓이 되도록 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의 마지막, 진정으로 마지막 저작에서 그는 그의 본원적인 직관을 재발견합니다. 그것은 사유와 운동 사이의 이면적인 관계에 대한 직관입니다. 사실 운동mouvant이라는 말은 아주 독특한 말입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지요. 


반 레트 : 그렇지요.


보름스 : 이 말은 운동mouvement이라는 의미의 현재 분사가 명사substantif로 쓰인 것이지요.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 전적으로 안정적인stabilisé 표현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문법적인, 혹은 수사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반 레트 : 네. 이 책은 1934년에 출간되었으며, 1903년에서 1923년 사이에 쓰인 10편의 강연을 모은 모음집입니다. 이 논문들, 이 강연들, 물론 베르그손의 모든 저작들이 훌륭하지만 시적인 동시에 정확한 언어로 쓰여져 거의 숭고한 수준에 이르렀고, 상당히 짧기 때문에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기 시작하는 좋은 입문서이지요. 헌데 이 논문들과 강연들, 특히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두 편의 서론의 내용상의 특이점은 방법 자체에 대해, 베르그손 자신의 방법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특이한 이유는 베르그손에게 방법은 철학의 몸짓geste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베르그손에게 방법은 반성과 같이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보름스 : 맞습니다. 베르그손 자신도 심리학과 철학의 몇몇 문제들, 말하자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 예컨대 영혼과 신체, 뇌 등을 다루는 1919년의 첫 번째 강연 모음집[『정신적 에너지』]의 출간 이후, 방법을 다루는 두 번째 모음집을 출간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방법은 매우 추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반 레트 : 그래요.


보름스 : 방법이라는 말은 사유하기 전에 이미 사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실재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그러한데, 우선 방법은 실재로부터 거리를 두는 간극입니다. 『사유와 운동』에서 “와”는 우선적으로 분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사유는 운동을 사유하는 데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운동과의 간극 속에 있습니다. 이 간극은 우리 정신의 본성에 기인하는 구조적인 간극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본성상, 살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 합니다. 정신은 시간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신은 시간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일종의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넘어설 수 있는 간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사유할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사유는 단지 간극 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간의 경험 속에도 존재합니다. 방법은 어떤 의미로는 철학의 핵심인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러면 무슨,


보름스 : 아니, 우리의 실재성의 핵심이죠. 우리는 방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반 레트 : 베르그손에게는 철학과 실재성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이군요. 철학이 실재와 “일치하기” 위한 몸짓으로 이해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철학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다시 붙잡는 방법인가요?


보름스 : 차이가 없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에게 직접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만 언제나 분리 위에서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실, 맞습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경험이지만, 철학은 또한 본성상 언제나 반성적이고 거리를 두고 있기에, 직접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거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유를 비판해야 합니다. 조금의 사유는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지만, 많은 사유는 우리를 실재로, 근원으로 다시 데려다 줍니다.


반 레트 : 좋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르그손의 중심적인 생각이지요. 이 요점을 설명함으로써 시작해보지요. 베르그손에게 지성과 사유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보름스 : 지성과 사유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실천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사유는 순수하고, 신체를 초월한, 무사심한 활동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순수한 실재가 존재하고, 그것을 목격하는 순수한 관객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실제로는,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입니다. 베르그손이 처음부터 생에 대해 사유한 것은 아니지만, 베르그손은 저작을 진행시켜 나가며 점진적으로 이 점을 발견해갑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이며, 우리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실천적인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실천적 기능은 실재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실재의 본질과 모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실재의 본질은 시간적이고, 유동적이고, 항구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그 속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그것을 제어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사실 실재적인 우리의 사유가,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고 시간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간을 제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겠죠. 우리의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종의 한계입니다. 베르그손은 지성에 대해 매우 간단한 정의를 내립니다. 당신이 지성에 대해서 말하셨지요.


반 레트 : 네.


보름스 : 우리가 오늘 다룰 텍스트에서 말이지요. 베르그손은 지성이 “인간적인” 사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은 사실 하나의 비판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것은 인간적이기만 한 방식, 인간 종의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사실 철학한다는 것은 인간적 사유의 한계를 의식하고, 인간적 사유가 제거해버렸던 것, 즉 항구적 변화, 영속적 변형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입니다. 


반 레트 : 이제 개입되는 또 다른 용어가 있는데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것은 직관이라는 개념입니다. 지성이 우리를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직관은 반대로 우리를 가능한 한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다시 실재와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보름스 : 맞습니다. 그건 역설적인 일입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다룰 두 번째 텍스트의 초반부에서 이 역설을 강조합니다. 철학이 직관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입니다. 그것은 “본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며, “직접적 접촉”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실 베르그손의 문제는 이 직관이 본원적인 것이며, 언제나 거기에, 우리의 밑바탕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예컨대 그의 첫 번째 저작이 보여주는 것처럼 중대한 순간에 결단을 내릴 때처럼 우리의 생에 빠져들 때, 그것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지성의 염려를 넘어서게 되지요. 철학은 직관을 다시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이 직관을 우리는 지성 때문에 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철학의 역설은 철학에게는 직관이 단지 소여일 뿐 아니라 책무이기도 하기에, 직관을 방법으로 수립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두 번째 텍스트의 초반의 이 역설을,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직관을 하나의 방법으로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반 레트 : 역설적으로 보이는군요.


보름스 : 완전히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철학사 속에는 더 우월한 실재, 형이상학적 실재, 물 자체에 대한 직관을 제공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르그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직관을 방법으로 수립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망각해버린 시간적 실재에 대한 아주 단순한 직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녹음된 목소리 : Levinas au sujet de Bergson (« Les chemins de la connaissance », 1981년 3월 2일))

필립 네모 : 1923년 프랑스 철학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엠마뉘엘 레비나스 : 프랑스 철학이라..  나에게, 시대들에 대한 내 감각[시계추]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베르그손이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모든 이들의 수업에 등장했습니다. 베르그손의 생각을 발전시키건, 그에 반대하건 간에, 언제나 그는 참조지점에 있는 철학자였습니다. 살아있는 철학자, 철학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천재성을 통해 증명했던 철학자!


(음악 : Keith Jarrett, Part 9 (Osaka, 2002))


조르주 클래스 : “우리의 지성은 우리 감관의 연장이다. 사변하기 이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생은 우리가 물질을 이용하기를 요구한다. 자연적 도구들인 우리의 기관들을 통해서건, 인위적인 기관들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도구들을 통해서건 말이다. 철학과 과학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지성의 역할은 이미 도구들을 제작하고, 주위의 물체들에 대한 우리 신체의 행동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과학은 지성의 이 작업을 훨씬 더 멀리까지 밀고나갔지만, 그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과학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물질의 지배자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학은 사변할 때조차 여전히 행동에 사로잡혀 있고, 과학 이론들의 가치는 언제나 그 이론들이 실재에 대해 얼마나 견고한 영향력을 우리에게 주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증과학과 실증과학의 도구인 지성에 신뢰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만일 지성이 물질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마도 지성의 구조는 물질의 구조를 본따 만들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가장 단순하고 그럴듯한 가설이다. 지성이 그 대상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고, 구성한다거나, 지성이 대상의 표면밖에 접촉하지 못한다거나, 대상의 외양밖에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가설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명을 위해서 원용되어 온 것은 철학이 빠져든 해결 불가능한 난점들과 지성이 사물들의 총체에 대해 사변할 때 빠질 수 있는 자기모순밖에 없었다. 기실 지성이 일부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우리가 그것을 전체에 대한 연구에 사용하려 한다면, 우리가 이러한 난점들과 모순들에 다다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말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지성의 기작과 우리 과학의 진보를 고찰하면서, 지성과 물질 사이에 실제로 대칭과 부합, 일치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사유와 운동』 2장]


(음악 계속)


반 레트 : 여러분께서는 지금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키스 자렛의 음악, 앙리 베르그손의 글, 프레데릭 보름스의 목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 프로그램은, 아니, 이번주 내내 우리는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인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는 조금 전에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사유와 운동』에 실린 마지막 글이 쓰인 해인 1923년을 상기하며 “베르그손이 프랑스 철학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사유와 운동』의 두 번째 서론인 2장 중에 지성과 물질에 대한 내용을 짧게 발췌하여 들었습니다. 베르그손이 말한 내용의 새로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한다.” 이러한 말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이 어떤 것이길래, 오늘날 그렇게 회자되는 것일까요?


보름스 : 네.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방금 전에 들은 아주 아름다운 두 텍스트를, 우리가 방금 전에 들은 아주 아름다운 구절들을 연결해보려 합니다. 레비나스의 목소리는 당신이 조금 전에 언급한 주제 이상의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아 레비나스가 왜 파리에 왔을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고, 그 후에 그는 독일의 후설과 하이데거 곁에서 현상학을 공부하러 갔었죠. 그러고 나서 그는 파리로 오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을 말합니다. 그가 파리에 온 이유는 “파리가 베르그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파리, 그것은 베르그손이다.” 파리가 베르그손이라는 말은 실로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그것이 비판적인 몸짓과 주요한 성과를 이룬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이에 대해 말하지요. 이러한 비판적 몸짓은 실제로 생을 향해 돌아서 있는 우리 지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체계, 논리적 사유, 지성을 이용해서 실재를 포착하려는 철학의 이러한 바람을 비판하는 것이고, 실재의 한 부분은 이러한 체계에 저항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바로 시간입니다. 레비나스는 시간이 타자, 타자성, 근본적 타자성으로서의 근본적 변화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는 베르그손의 근본적 직관을 이어받아, 그 직관을 시간에서 윤리학으로, 시간에서 타자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베르그손에게서 매우 생생한 이러한 직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하나의 차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베르그손이 1923년에 중심적인 철학자인 동시에 중대한 반박에 맞닥뜨리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지요. 그것은 레비나스에게는 베르그손을 향한 아주 강력한 비판의 몸짓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생명적 존재들이며, 실재를 사유하기 위해 실재를 왜곡시킨다고 말하지요. 레비나스의 다른 스승인 하이데거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존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실천적 사유를 넘어서야 하고, 대상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이지요. 사물들을 대상으로, 기술적 대상으로 환원해서는 안되고, 존재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는 이러한 몸짓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아니 여겼던 것이지요. 하지만 레비나스는 다른 현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대한 베르그손의 사유를 비난합니다. 베르그손은 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에 대한 우리의 조망aspect, 실재에 대한 우리의 조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실재 자체를 떠나 존재를 향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반 레트 :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한다.”


보름스 : 네. 사변하기 전에 살아야 합니다. 사변한 후에도 마찬가지에요. 생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순수 사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의 첫 번째 의미는 실천적인 생이고, 이것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실재로 되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생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생, 구체적인 생, 세계 속에서의 행위들입니다. 그리고 이 생의 두 의미 가운데 어떤 것도 완전히 유죄판결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컨대 하이데거와 베르그손이 각기 서로 다른 기술철학을 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움직이려 하지요.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사유의, 지성의, 기술의 특정 측면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유 전체임을 참칭한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자체의 질서 속에서라면,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기술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손은 기술의 “열린” 용법, 평화로운 용법, 박애적인bienfaiteur 용법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의학처럼 말이지요.


반 레트 : 지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설명에는..


보름스 : 반면 현상학자들에게는..


반 레트 : 실용주의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이군요.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보름스 : 맞습니다. 실용주의적.


반 레트 : 당신은 지성에 대해 말하면서 기술에 대해 말하니까요. 그건 행동하는 것이지요.


보름스 : 지성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함축합니다. 우리가 지성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목적으로 우리를 왜곡시키는 사유를 통해 모든 것을 사유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왜곡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성이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는 경우에는 지성을 비판해야 하지만, 지성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와의 큰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베르그손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그것을 급진화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이 지성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고 그를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한계짓는다는 것입니다. 기술과 지성의 능력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전적으로 비합법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의 고유한 질서 속에서 그것들은 참된 것입니다. 수학은 참된 것, 참된 사유 자체입니다. 베르그손은 이 지점에 대한 입장을 진전시키지요. 『사유와 운동』이라는 모음집의 순서가 이 진전을 보여줍니다.


반 레트 : 또 다른 오해가 존재합니다. 사실 당신이 베르그손 사유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을 했을 때, 그것은 베르그손이 상대주의자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베르그손이 보기에는 지성이 본질을 포착할 수 없으니까요. 즉 사실 우리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으며, 관점의 수만큼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처럼요.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군요. 실제로는 베르그손은 지성의 자리를, 아니, 진리의 자리를 지성에서 특정한 형태의 직관 쪽으로 옮겨놓는 것이니까요. 그는 상대주의자는 절대 아니군요.


보름스 : 베르그손은 절대 상대주의자가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칸트처럼 인간 정신이 우리를 실재로부터 분리시키는 필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와는 달리 베르그손에게 이 필터는 감각이 아니라 행동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의 필터를 통해 실재를 왜곡합니다. 하지만 이 필터가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필터를 의식하고, 이 필터로부터 벗어난 직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즉 실재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상대주의자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베르그손이 아주 잘 말했듯이, 행동은 비실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 자체는 실재로부터 무언가를 포착합니다. 공간은 시간과 관련하여서는 우리를 기만하지만, 그럼에도 우주의 실재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물질의 실재성에 대해 말이지요. 따라서 베르그손은 두 배로 실재론자입니다. 지성은 수학과 과학을 통해서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합니다. 하지만 직관은 시간을 통해, 그리고 음.. 직관을 통해 실재의 다른 부분을 포착합니다.


반 레트 : 첫 번째 글의 첫 번째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철학의 체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에 알맞게 재단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에 비해 너무 크다. 그것들 중에 적절하게 선택된 이러저러한 것들을 검토해보자. 여러분은 그 체계가 다음과 같은 세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없는 세계,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인간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잠도 자지 않고, 꿈꾸지도 않으며, 횡설수설하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젖먹이로 죽는 세계, 에너지가 하락dégradation의 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세계,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되고 반대로 일어나는 세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참된 체계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따라서 너무나도 광범위한 설명conception들의 총체여서, 거기에는 실재적인 것 이외에도 가능한 모든 것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는 이 첫 번째 구절에서 베르그손이 자신의 체계 속에 그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시키려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베르그손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생이라고,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철학적 체계에 살chair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런 살이 없다면 체계는 너무 추상적인 것이 되겠죠.


보름스 : 맞습니다. 생을 포함시키기. 시간을 포함시키기.. 이 모든 사례들에서 우리가 언제나 시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 우리가 언제나 생명체들, 동물들, 인간들이 과거에 출현하여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를, 에너지가, 즉 열역학적 에너지의 하락이 언제나 우주적 에너지의 상실, 혹은 오늘날 기후 온난화라고 불리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세계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잘 파악하신 것 같습니다. 기술이 악화시키는 우주적 에너지는 실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흘러가는 시간, 즉 파괴건 창조건 간에 결과를 낳는 시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요점은 또한 지성을 자승자박에 빠뜨리는 것이고, 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실, 과학은 무엇을 원합니까? 논리적 사유는요? 그것은 실재를 인식하기를, 실재를 포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자신들의 도구에 이끌려--한 번 더 말하건대 이 도구는 필요한 것입니다. 수학적 개념, 언어와 같은 것 말이지요--실재의 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베르그손은 과학에게, 직관을 가지고 과학을 보완하겠다고, 직관이 과학이 놓쳐버린 측면, 놓쳐버린 실재의 측면을 붙잡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해진다는 것은 수학적 인식과 같은 영역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수학적인 질서 속에는 수학적 정확성이 존재합니다.


반 레트 : 그 말은 곧 과학이 철학을 배제하지 않으리라는 말이군요.


보름스 : 그렇지요. 과학과 철학은 동일한 전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실재를, 총괄적 실재를 그것이 가진 두 측면에 따라 포착하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총괄적” 경험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과학은 철학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오류는 단지... 음 베르그손은 정신의 분할, 경험의 분할을 받아들입니다. 베르그손이 하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려 하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니까요. 베르그손 철학은 종합의 철학은 아닙니다.


반 레트 : 그렇군요.


보름스 : 헤겔적으로는, 사람들은 직관과 지성이 있으니 세 번째 항이 이 둘을 화해시킬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할 속에 존재하며, 사실 그것은 우리 인간적 존재자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르그손에게서 언제나 분할을 발견할 것입니다. 베르그손의 마지막 주저는 『두 원천』이라고 불립니다. 궁극적인 분할은 닫힘과 열림...


반 레트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말이군요.


보름스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이원성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그러니까 분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끝까지 유지됩니다. 이 분할은 부분적으로[만]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역할은 두 측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는 직관과 지성의 측면에서 각기 두 끝지점을 붙잡아야 합니다. 두 전선에 위치해서 두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반 레트 : 제가 앞서 읽은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실재와의 첫 만남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추상적인 철학적 체계에 틀어박히지 않고서 말이죠. 이게 바로 베르그손이 그의 모든 텍스트들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사유와 운동』의 두 서론 격의 텍스트들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베르그손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 보이는 사례들을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이 사례들이 매번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본질적인 지점을 향해 아주 똑바로 나아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췌문을 함께 들어봅시다. 프레데릭 보름스. 베르그손이 “주황”이라고 부르는 사례입니다. 그러니까 주황색 말이지요. 주황을 대면할 때, 빨강과 노랑의 혼합을 생각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이것을 “참의 역행 운동의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우선 발췌문을 듣고, 그 다음에 이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죠.


클래스 : “주황과 같은 하나의 색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주황색 말고도 빨간색과 노란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황색을 어떤 관점에서는 노랗고 다른 관점에서는 빨간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노랑과 빨강의 혼합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황색이 그것이 지금 그러한 바대로 존재하는 반면, 노란색도 빨간색도 아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주황색은 이미 이 두 색들의 혼합물일 것인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신경적이고 대뇌적인 전체 메커니즘과 동시에 의식의 특정한 배치들을 함축하는 빨간색의 감각과 노란색의 감각은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생의 창조물들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행성에도 다른 어떤 행성에도 이 두 감각들을 경험하는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황의 감각은 단순한 감각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은 결코 구성요소나 측면들로서 형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안다. ...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회고rétrospection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행적 실재성을 가능성이나 잠재성의 상태로 과거 속으로 되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보기에 지금 혼합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 ...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포기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장하고,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을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진화가 창조적인 [형태를 띠는] 지속에 적용시켜야 한다.”[『사유와 운동』 1장]


(음악 : Keith Jarrett, Encore from Nagoya(1976))


반 레트 : 10시 26분, 프랑스 문화방송, 철학의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프레데릭 보름스와 함께 베르그손의 출간된 마지막 저서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배우 조르주 클래스는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하자마자 우리는 이렇게 혼잣말한다. 이건 원래 존재하던 것인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것인가? 우리가 주황색을 볼 때 우리는 맞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주황이 오래 전에 빨강과 노랑의 혼합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안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이것은 보는 순간에 우리가 창조해낸 것이다. 매우 기묘한 일이다.”


보름스 : 그렇습니다. 사실, 이 아주 아름다운 사례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하던 내용을 아주 잘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와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실재와의 이 두 번째 관계,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이어야 할 관계가 첫 번째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지요. 우선성의 역전, 가치의 역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태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주황에 대한 경험, 음악에 대한 경험, 인간의 행동, 고통이나 쾌락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실재와 맺는 첫 번째 관계입니다. 베르그손의 말을 따르자면, 단순한 경험이죠. 모든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합니다. 즉, 질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순간에 대한, 이 대화에 대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실재와 두 번째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도 물론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첫 번째 관계의 지위를 찬탈하고, 첫 번째 관계를 지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로 대체해버립니다. 주황에 대한 경험은 여기서 훌륭한 사례입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주황은 다른 색과 마찬가지의 색깔, 단순한 색깔이지만, 지성과 인간의 분석은 정의상 외려 혼합물을 봅니다. 이 경우에는 빨강과 노랑의 혼합물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빨강과 노랑을 혼합함으로써 주황을 생산하고, 분석하고,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은 나름의 필요성과 진리의 몫을 가지고 있는 이 두 번째 관점이 첫 번째 관점과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 주황은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이 주황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면 실수하는 겁니다. 사실 그것은 주황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빨강과 노랑의 경험입니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물리학자를 상상해볼 수 있겠죠. “아니, 색깔에 대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아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색깔이 없는 원자들입니다. 우주의 순수 물질입니다. 데카르트에서처럼 질 없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색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행동까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은 당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걸 선택한 이유는 사실 당신이”


반 레트, 보름스(함께) :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보름스 : “사회적 원인에 의해, 심리적 원인에 의해, 이런 원인에 의해, 저런 원인에 의해...” 사실은 부차적인 이 분석적인 관점은 최초의 직관을 잠식하여 그것을 부인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베르그손은 이 두 번째 관점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심지어는..


반 레트 : 과학적 관점 말이지요? 결정론적인 관점.


보름스 : 과학적인 것이죠. 이 관점은 실재를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관점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이 관점이 지나치게 되면, 이 관점이 그에 선행하는 단순한 경험을 취소한다면, 취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 됩니다. 베르그손이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마지막 저서에서 자신의 내적 흐름을 설명하려 할 때 베르그손은 고의적으로 이러한 회고 속으로 진입하지만, 그것은 절대 그의 저작의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베르그손 자신도 이 점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그의 네 주저,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그리고 그가 출간하기 전에 쓰고 있던 원고였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회고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베르그손은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을 연역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각각의 저서는 불가분적인 새로운 놀라움이었다고, 새로움의 분출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회고적으로만 『물질과 기억』은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의 문제들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둥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두 관점이 필요합니다.


반 레트 : 네. 그리고 선형적인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뒤를 바라보고 회고적인 약동을 채택하는 운동이 환상이 되는 것이군요. 이게 베르그손이 “참의 역행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주황을 보고, 주황색의 무언가를 보면서, 그것이 전에는 빨강과 노랑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회고적인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고, 참의 역행운동인 것이군요. 그래서 그건, 환상까진 아니지만, 내가 보는 실재를 완전히 다 설명하는 건 아닌 것이구요.


보름스 : 정확합니다. 단지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한다고 믿을 때에만 그것은 환상이 됩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은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요? 베르그손이 여기서 색깔들이 감각이라고, 빨강의 감각과 노랑의 감각은 생의 창조물들이라고 말할 때 말입니다. 독단적 합리론까지는 가지 않는다 해도, 논리법칙에 따라 기능하는 다소간의 합리론적인 정신이 보기에는, 음.. 여기서 출발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색깔들이 단지 감각이기만 하다면, [이성이] 닦아서 윤을 낼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보름스 : “생의 감각들”은 극도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내용과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색깔이라는 것이 베르그손은 감성적 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실재의 한 부분과 뇌의 만남이라는 것이죠. 인간의 뇌는 실재를 절단하고, 거기서 실재의 파장이 나타내는 바를 지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빨강을, 노랑을 지각하지만, 적외선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특정 색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은 그것을 이성이 전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학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진화가 이러한 감각을 가능케 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각은 절대적으로 질적인 무언가, 선험적으로 구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감각의 관념을, 이건 거대한 철학적 문제인데요.


반 레트 : 네.


보름스 : 당신은 맹인에게 색깔의 관념을, 귀머거리에게 소리의 관념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인 무언가, 환원불가능한 무언가,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이고, 우리의 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만큼의 빨강의 감각을 체험했다 해도, 새로운 빨강을 마주하게 되면... 베르그손은 위대한 화가가 창조해 낸 녹색에 대해 말하는데요. 그러한 녹색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실 녹색“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학생의 녹색과 컨스터블의 녹색이 있습니다. 컨스터블의 이 녹색은 컨스터블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녹색을 녹색 일반으로 환원합니다. 이와 동시에 인간 사유의 역할은 각각의 단독적인 녹색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어떻게 하나요? 특히 우리가 철학자라면 말예요. 어떻게, 어떻게요? 철학이 우리 실존의 이 부분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단독적이고 절대적으로 공유 불가능한 부분, 직관과 감각의 소관인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문학이나 시의 영역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철학이 이 부분을 다시 포착할 수 있을까요?


보름스 : 음. 우선은 비판적 작업을 통해서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베르그손은 직관의 철학자이지만 그의 저작에서는 많은 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문제는 음... 하나의 직관에서 출발하여 문제로서 포착됩니다. 예컨대 시간의 직관은 그게 아니라고, 그것만일 리 없다고, 그건 공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부입니다. 직관은 우선 하나의 거부입니다. 베르그손은 꼴레주 드 프랑스의 학생들, 그러니까 그의 말을 들으러 온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말한 단 하나의 내용은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거부입니다. 정확한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방식으로 시험된 이 거부 이후에야, 우리는 예컨대 생이 하나의 약동이라는 것을, 베르그손의 그 유명한 생의 약동말이지요, 그리고 순수한 도덕은 열린 도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건 베르그손의 아주 정확한 주장이지요. 이걸 은유로 환원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반 레트 : 그것 때문에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건데요. 베르그손의 비방자를 통해 베르그손을 옹호해야 하는 건가요? 그들은 사실 이렇게 말하죠. “봐라. 베르그손은 정신주의적인, 시적인, 혹은 계시적인 약동 속에 있는 것 아니냐.”


보름스 :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아주 정합적으로 이야기하고, 사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사유의 작업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거부를 통해 사유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의 표지를 지니게 되는 직관은, 사유의 “증가surcroît”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저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베르그손에서는 경험을 경험하기 위해 사유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를 사유로부터 떨어뜨리는 사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비판이 필요합니다. 비판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예컨대, 왜 생을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들의 체계로는 충분치 않을까요? 이 체계를 벗어나는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비판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단순히 직관주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지성주의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 레트 :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점을 모든 형태의 철학적 몸짓을 벗어나는 차원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이군요. 그런데 베르그손은 이 철학적 몸짓을 극도로 엄밀한 방식으로 재정의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거구요. 제가 첫 번째 글을 읽었었죠.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베르그손에게는 철학의 몸짓 자체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그의 사유 속에서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름스 :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이 남긴 예기치 못한 유산들 가운데, 『사유와 운동』이라는 책은 그의 철학적 유작인 동시에 예기치 못한 모음집입니다. 이 모음집은 일곱 편의 철학 논문들을 시간적이지 않은 순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책, 시간에 대한 사유인 것 치고는 기묘한 일이죠. 베르그손은 자신의 논문들을 저자의 입장에서 회고적인 방식으로 배치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또한 세 편의 철학적 오마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 레트 : 네.


보름스 :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클로드 베르나르, 윌리엄 제임스, 펠릭스 라베송에 대한 오마주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읽어야 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이 책은 또한 철학사, 특히 프랑스 철학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레비나스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장켈레비치를 언급할 수도 있겠지요. 그의 이름은 예상가능하지요. 그는 베르그손주의의 투사였으니까요. 베르그손주의는...


반 레트 :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손주의에 대해 뛰어난 책을 한 권 썼지요. 베르그손의 사유에 대해서요.


보름스 : 맞아요. 아 동시에 그는 비판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죠. 베르그손이 말하듯, 모든 독창적인 계승자가 그런 것처럼 말예요. 이런 사람들은 계승하면서 창조를 행하고, 또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죠. 이러한 계보 속에 아주 뜻밖의 이름이 존재합니다. 그건 조르주 깡길렘입니다. 그는 베르그손 이래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생철학자이자 의철학자이고, 1952년에 『생의 인식』이라는 모음집을 출간합니다. 이 모음집의 서문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반 레트 : 모르겠습니다.


보름스 : 베르그손에게 응답하는 서문이죠. 깡길렘은 이 모음집의 서문의 제목을 “사유와 생명체la Pensée et le vivant”라고 달았습니다. 이건 분명히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에 대한 오마주죠. 하지만 다소 비판적인 오마주요. 깡길렘의 말을 한 구절 인용해보죠. “사람들은 인식과 생 사이에서 근본적인 갈등 중에 있는 실존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 우리는 수정과도 같은 지성주의, 즉 투명하고 타성적인 지성주의와 선명하지 못한 신비주의, 즉 능동적인 동시에 혼란스러운 신비주의만을 선택지로 갖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깡길렘이 베르그손을 이 선명하지 못한 신비주의 쪽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깡길렘은 베르그손이 추상적 지성주의의 비판자이기만 한 것도, 선명하지 못한 직관의 옹호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지요. 사실 이들은 생명체를 생명체의 실재적인 사유 속에서 이해하는 동시에, 생명체의 자유로운 직관 속에서, 주관적인 단독성 속에서, 생명체의 역사적 창조 속에서 이해하려 했던 두 사상가들입니다.


반 레트 : 이제 두 번째 서론의 결론 부분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프레데릭 보름스, 우리가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서론 격의 논문들이니까요. 이 모음집의 이후 상황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음... 우리가 들을 것은 마지막 문단입니다. 이건... 조금 더 자전적이고, 마지막 문장은... 아, 미리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르주 클래스가 읽어주는 것을 들어보시죠. 마지막 문장은... 꽤나 장엄하고, 어쩌면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이러니하달까, 어쨌든 조금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내용을 베르그손 자신이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럼 이 마지막 구절을 들어보시죠. 제 생각으로는, 프레데릭 보름스, 당신이 방송 시작부터 말했던 것들이 우리가 이 텍스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 같습니다.


(음악 : Keith Jarrett, It’s all in the game)


클래스 : “내적 생 속에서 일차적인 경험의 장을 발견하고 말뿐인verbales 해결책들을 거부했던 날, 우리는 진정한 철학적인 방법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후의 모든 진전은 이 장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어떤 결론을 논리적으로 확장하여 실제로는 탐구 영역을 확장시키지 않고 이 결론을 다른 대상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인간 정신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철학이 순수 변증론일 때, 즉 철학이 언어 속에 저장된 기초적인 인식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행할 때, 철학은 소박하게 이러한 경향에 빠져든다. 철학이 몇몇 사실들에서 도출해 낸 몇몇 결론들을 다른 사물들에도 적용가능한 ‘일반 원리’로 여길 때, 철학은 이러한 시도를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철학하는 방식에 대한 대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몇몇 중요한 문제들을 한켠에 치워두어야만 했다. 우리의 이전 저작들의 결과들을 이 문제들로 연장시킴으로써 쉽게 응답이 이루어졌다는 환상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그 자체로, 그것에 대해서만 해결할 시간과 힘이 허락될 때에만 이 문제에 응답할 것이다. 그러한 시간과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방법이 우리가 보기에는 몇몇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해답으로 여겨지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 이상을 끌어낼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922년 1월.”


반 레트 :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0시 39분 프랑스 문화방송에서 조르주 클래스의 목소리를 빌린 베르그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프레데릭 보름스, 베르그손이 이 문장을 쓸 때에는, 그는 그의 새 책에 실을 서론을 끝마친 상태란 말이죠.


보름스 : 그는 여기서 그의 새 책, 우리가 이 문장을 읽는 책의 서론을 끝마쳤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출간된 책, 도덕과 종교에 대한 그의 책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첫 번째 책, 1889년의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 이후 거의 50년간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나왔습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1932년이구요. 베르그손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이게 바로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이 두 서론 격의 텍스트의 탐구대상입니다. 1889년에, 그러니까 그가 30세일 때, 베르그손은 가장 위대한 철학책 중 하나를 쓴 가장 젊은 저자였습니다. 그건... 눈부신 공적이지요. 이 책은 자유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지속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으로 긍정되고 경험적으로 증명된 이 자유로부터, 베르그손은 윤리학을 도출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윤리학을 요청했지요. 심지어 사람들은 베르그손을 대신해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냈습니다. 베르그손의 제자들이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냈습니다. 40년동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실로... 온갖 종류의 윤리학이 다 있었습니다. 비합리주의적인 윤리학, 이탈리아의 미래파 윤리학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의 약동이 전쟁이고 전투라고 말했지요. 조르주 소렐은 총파업을 베르그손적 윤리로 세웁니다. 반대로 전통적인 윤리학도 있습니다. 자크 슈발리에는 베르그손의 윤리학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직관이라고 말합니다. 칸트의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영원한 윤리가 있다고 말이지요. 모리스 바레스도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비합리주의들. 극우, 극좌의 비합리주의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반 레트 : 네.


보름스 : 이들에게 베르그손은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 자체였지요. 그렇기에 프랑수아 아주이는 『베르그손의 영광』에서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그에 대한 외적인 독해들로 환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해석은 큰 오류이지만요. 그러니까 베르그손을 대신하여 베르그손의 윤리학을 써낸 베르그손주의자들이 존재했습니다. 1922년에 베르그손이 위의 구절을 썼을 때, 그는 도덕에 대한 책을 쓰는 중이었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죠. 당신도 이 멋진 구절에 주목했듯이, 생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면 그 책을 완성할 수도 있겠죠. 즉, 그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는 류머티즘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그는 당대의 유네스코가 세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반 레트 : 국제 연맹 말이군요.


보름스 : 네. 국제 연맹의 국제 지식인 협력 위원회죠. 그는 업무가 과중하여 도덕에 대한 그의 책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45년 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이 책을 요구하고, 그를 대신해 이 책을 써냈습니다. 베르그손은 “할 수 있으면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책 쓰기를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1922년 1월.”


반 레트 : 네.


보름스 : 조르주 클래스가 멋지게 읽어주었지요. 『사유와 운동』은 1934년에 출간되었지만, 그는 1922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 그가 그의 윤리학을 쓰기 위해 말하자면 “절어 있었기ramer” 때문이지요. 점잖지 못한 표현 죄송합니다. 결국 그는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 책은 193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이 예상하던 윤리학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합리주의적 윤리학을 기대했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의 윤리학을 기대했고요. 베르그손의 윤리학은 열림과 닫힘의 구분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단순히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합니다. 이 유한성이 전쟁을 낳습니다. 생의 한계는 우리 안에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창조의 잔여물이 있습니다. 인간에서 이것은 열린 도덕을 통해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우리를 위하는 도덕이 아니라, 음... 논리적으로 모두를 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도덕은 보편적 논리가 아닙니다. 그건 이 닫힘에 저항하는 것, 평화를 위해 전쟁과 싸우는 것, 이것이 언제나 베르그손의 “신비주의”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위대한 신비주의자만이 이 열린 도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니까요. 중요한 점은...


반 레트 : 그러니까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신비주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군요.


보름스 : 신비주의는 도덕의 기준에 정초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전쟁의 숙명에서 해방시키는 개인들이, 위대한 선인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전쟁의 숙명은 언제나 되돌아올겁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종자가 심어지고,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전쟁에 언제나 다시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열림과 닫힘의 이 싸움 속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열린 사회 개념은, 당신도 알다시피 오늘날 프랑스에서 상당히 많이 통용되는 개념이지요. 이 개념은 베르그손이 발명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손은 많은 주화들을 찍어냈고, 이 주화들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합니다. 호모 파베르, 생의 약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사회와 같은 개념들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사실 이 윤리가 이전의 저서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회고적인 환상이 존재합니다. 열린 사회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이죠. 그건 『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시론』의 자유 개념 속에 존재하던 거였어요. 그건 거기 있던 것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연역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베르그손주의자들은 다른 윤리학을 연역해냈던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윤리학이요. 이 점이 이 모음집의 탐구대상을 이루는 베르그손의 방법론적인 주장을 잘 증명해줍니다. “참의 역행 운동”말입니다. 진리가 생겨나고 나면, 그것은 소급하여 과거로 던져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부분의 환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환상이 연역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류로, 즉 제자들의 오류로 이어졌습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보름스 : 닫힌 베르그손주의의 오류죠.


반 레트 : 맞아요, 하지만 ...


보름스 : 열린 베르그손주의가 필요합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보름스 : 그건 장켈레비치가 연역해낸 것입니다.


반 레트 : 그런 이유로 저희가 이번 주 화, 수, 목요일에 당신의 동료들과 읽게 될 이 모음집의 다른 논문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지 않은 것인가요?


보름스 : 맞습니다. 그 배열은 시간순으로 되어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시간적인 배열이 그 자체만으로 연역적인 작업을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역설적으로 실재적인 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새로움 속에 있음을, 그리고 이 새로움이 회고적으로 과거를 밝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죠. 그건 베르그손 자신의 입장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죠. 예컨대... 아마 당신은 다음 번 대화들 중에 이 내용을 다루게 될 텐데요, 실재 속에서 지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요. 1903년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을 출간합니다. 이 논문은 이 책의 다섯 번째 논문인데, 베르그손은 거기서...


반 레트 : 여섯 번째 논문이요.


보름스 : 여섯 번째 논문이군요. 서론이 두 개의 장이니까요.


반 레트 : 맞아요.


보름스 : 베르그손은 거기서 직관은 실재를 포착하지만, 지성은 단지 허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밖에 붙잡지 못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1907년 『창조적 진화』 이후 상황은 변합니다. 공간도 실재의 일부분, 즉 물질이고, 지성은 우리가 앞서 말한대로 실재의 일부분을 포착합니다. 그러니까 한편에는 시간적 실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공간적 허구가 있지만, 실재와 공간, 아니, 시간과 공간은 실재성 자체의 두 측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은 변해서, 이중적인 실재론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은 자신이 변화했다는 점을 알려주려 하는데요.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텍스트에서 몇몇 주석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주석들은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더 이상 1903년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 말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1922년의 주장들을 1903년의 주장들에서 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903년의 주장들을 수록한 이유는, 직관의 핵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근본적인 관념은, 당신은 시간에 대한 이 구절을 좋아했지요, 나는 하나의 관념만을 갖고 있다. 그 관념은 문제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낳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하나의 관념이다. 그리고 직관은 하나의 추동력이다.


반 레트 : “그것은 단순한 것, 너무 단순하고 극도로 단순하여 철학자들이 결코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철학자는 평생 동안 그것을 말해왔던 것이다.” 형이상학적 번역이 없는 중심점. 베르그손은 모든 것을 이 단순한 지점에 결부시키지요. 그것은 완전히 불가피한 것입니다.


보름스 : 맞습니다. 아니면 다른... 다른 멋진 구절이 둘 있지요. “형이상학적 직관은 우리 인식의 요약 혹은 종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운동적 추동력이 운동체가 주파한 길과 구분되듯, 혹은 태엽의 수축이 시계추의 가시적 운동과는 구분되듯, 요약 혹은 종합과 구분된다.” 다른 구절은, “접근 불가능한 이 힘의 중심이 우리에게 약동을 주는 추동력을 전해준다.” 약동, 그러니까 직관 자체죠. 이건 은유가 아닙니다. 직관이 바로 추동력입니다. 직관이 바로 힘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생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창조적 힘이요.


반 레트 : 시간이 흘러흘러갑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속하기 때문이지요.


(음악 : Les soeurs Etiennes, Que le temps me dure)


반 레트 : “나에게 시간이 지속하다니.” 베르그손적인 이 마지막 노래는 에티엔 자매의 노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데릭 보름스.


보름스 : 감사합니다, 아델. 


반 레트 : 오늘 방문해서 『사유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데 대해, 그리고 베르그손의 저작을 위해 수고스러운 시간을 가져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프레데릭 보름스는 출간 당시 “베르그손 쇼크”라는 제목이 붙은 베르그손의 첫 번째 비평판의 엮은이입니다. 이 저작들은 그 후 프랑스 대학출판에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 저작들은 절찬 판매중이며, 이번 주에 함께 읽을 『사유와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우리는 아르노 프랑수아와 함께 「가능과 실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