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성장croissance : 참의 역행 운동



철학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정확성이다. 철학의 체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에 알맞게 재단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에 비해 너무 크다. 그것들 중에 적절하게 선택된 이러저러한 것들을 검토해보자. 여러분은 그 체계가 다음과 같은 세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없는 세계,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인간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잠도 자지 않고, 꿈꾸지도 않으며, 횡설수설하지도 않는 세계, 그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젖먹이로 죽는 세계, 에너지가 하락dégradation의 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세계,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되고 반대로 일어나는 세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참된 체계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따라서 너무나도 광범위한 설명conception들의 총체여서, 거기에는 실재적인 것 이외에도 가능한 모든 것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충분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설명은 그 대상에 밀착되어 있는 설명이다. 그것들[설명과 대상] 사이에는 어떤 공백도 없고, 다른 설명이 머물 수 있을법한 틈도 없다. 그 설명은 그 대상에만 적합하고, 그 대상은 그 설명에만 알맞은 것이다. 과학적 설명은 이런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절대적 정확성과 완전한 혹은 점증하는 명증성을 포함한다. 철학적 이론들에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전에는 하나의 학설이 우리에게 예외인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젊었을 때 그 학설에 이끌렸던 것 같다. 스펜서의 철학은 사물들의 본을 뜨고 세부적인 사실들을 모델로 삼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모호한 일반성들 속에서 그 받침점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제 1원리』의 결함을 직감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결함은 저자가 불충분한 준비로 인해 역학의 “최종 관념들”을 깊이 탐구할 수 없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그의 저작의 이 부분을 손질해서 그것을 완성시키고 공고히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힘이 닿는 한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의 관념 앞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실로 우리는 진화에 대한 모든 철학 속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실재적 시간이 어떻게 수학에서 빠져나가는지를 알아채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시간의 본질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이 현전할 때는 아직 거기에 있지 않다. 따라서 측정을 목적으로 한 부분과 부분의 중첩은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물론 모든 측정 속에는 협약적인 요소가 개입하며, 동등하다고 말해진 두 크기가 직접적으로 포개지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그 크기들로부터 무언가를 보존하는 그것들의 측면들 혹은 효과들 중 하나에 대한 중첩은 가능해야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측정하는 것은 이 효과, 이 측면이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 중첩의 관념은 부조리를 함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에 대해 중첩 가능하고, 따라서 측정 가능할 지속의 모든 효과는 지속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이래로 우리는 지속이 운동체의 궤적trajectoire을 통해 측정되며, 수학적 시간은 하나의 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작업이 우리가 재고자 하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의 측면이나 효과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재고자 하는 것을 배제하는 무언가 위에서 수행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측정 작업들과 근본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다. 우리가 재는 선은 부동의 것이고, 시간은 운동성이다. 선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심지어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의 측정은 결코 지속인 한에서의 지속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는 것은 단지 간격의 극단들의 수, 즉 순간들의 수, 요컨대 시간의 잠재적 정지점들의 수일뿐이다. 한 사건이 시간 t가 지난 후에 발생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지금부터 그때까지 특정한 유의 동시성들을 t번 셀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동시성들 사이에서는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이다. 시간은 극도로, 심지어 무한하게 가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에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뇌 내부의 운동들과는 연대적이지 않은 의식이다)의 견지에서는 차이가 심할 것이다. 어느 하루에서 다음 날로의 기다림, 어느 한 시간에서 다음 시간으로의 기다림은 의식에 대해 더 이상 동일한 피로를 주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특정한 기다림과 그것의 외적 원인을 고려할 수 없다. 과학이 지나가는 시간 혹은 지나갈 시간을 대상으로 할 때, 과학은 그것을 마치 이미 지나간 것인 양 다룬다. 게다가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학의 역할은 예측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세계로부터 반복될 수 있고 계산될 수 있는 것, 따라서 지속하지 않는 것만을 추출해서 붙잡아둔다. 이렇게 해서 과학이 하는 일이라곤 단지 상식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불과하며, 상식은 과학의 출발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지속의 측정치를 사유하는 것이지, 지속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제거해버렸으며, 개념화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이 지속이야말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속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속을 보려하되 측정하지 않으며, 그렇게 시간을 포착하지만 정지시키지는 않고, 결국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관객과 배우, 자발적인 것과 반성된 것을 일치시킬 때까지 고정되어 있는 주의attention와 흘러가는 시간을 서로 접근시킬 의식에게 지속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이러한 것이 [우리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우리가 그때까지는 관심이 없었던 내적 삶의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정신에 대한 연합주의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알아차렸다. 그 당시 대다수의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공유하던 이러한 설명은 의식적 삶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였다. 선입견이 끼어들지 않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시각은 무엇을 제공해줄 것인가? 기나긴 일련의 반성과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이 편견들을 하나씩 배제하고, 우리가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많은 관념들을 폐기하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내적 지속, 단일성도 아니고 다수성도 아니며 우리가 가진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연속성을 발견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실증 과학이 이러한 지속에 무관심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것은 없다. 아마도 실증 과학의 기능은 정확히 행동의 편의를 위해 시간의 효과들을 감추어 둘 수 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구성해주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를 그 운동성, 진전, 내적 성숙 속에서 쫓도록 만들어진 스펜서의 철학, 진화의 학설이 어떻게 변화 자체에 대해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인가?

후에 이 질문은 우리를 실재적 시간을 고려함으로써 생명의 진화의 문제를 손질하는 작업으로 이끌었다. 그 때 우리는 스펜서적인 “진화론”이 거의 완전히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지속의 시각이었다. 여러 체계들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철학자들이 지속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철학사 전반에 걸쳐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지위에 놓였고, 동일한 유의 사물들로서 다루어졌다. 그 때 사람들은 공간을 연구하고, 공간의 본성과 기능을 규정한 뒤에, 획득된 결론들을 시간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간에 대한 이론과 시간에 대한 이론은 서로 짝을 이루게 되었다. 어느 한 이론에서 다른 이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지 한 단어만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병렬”이라는 말을 “잇따름”이라는 말로 대체시켰다. 사람들은 실재적 지속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멀어졌다. 왜 그런 것인가? 과학은 그렇게 할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에 선행하는 형이상학은 동일한 이유들을 갖지도 않은 채로 이미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여러 학설들을 검토하면서, 우리에게는 언어가 여기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지속은 언제나 연장으로 표현된다. 시간을 지시하는 항들은 공간의 언어에서 빌려온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떠올릴 때,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공간이다. 형이상학은 언어의 습관들에 순응해야 했으며, 또 언어는 그 스스로 상식의 습관들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과학과 상식이 여기서 의견을 같이 한다면, 만일 지성이 자발적이건 반성된 것이건 실재적 시간을 배제한다면, 이것은 우리 오성의 목적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인간 오성의 구조를 연구하면서 포착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오성의 기능들 중 하나는 정확히 운동 속에서이건 변화 속에서이건 지속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운동인가? 지성은 운동으로부터 단지 일련의 위치들만을 붙잡는다. 먼저 한 점을 붙잡고, 그러고 나서 다른 점,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점. 이 점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오성에 반박할 것인가? 재빨리 오성은 새로운 위치들을 삽입할 것이고, 이 작업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오성은 변이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운동을 볼 것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고려되는 위치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좁아지는 간격들 속으로 운동성을 떠밀어 운동성이 무한히 작은 것으로 줄어들고, 약해지고, 사라지게 만들 준비를 한다. 만일 우리의 지성이 무엇보다도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하고 조명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면, 이보다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우리의 행동은 고정된 점들에 대해서만 편안하게 행사된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고정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운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운동체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운동체가 어디를 지나갔는지를 묻는다. 설령 그것이 이행의 순간에 주목한다 해도, 그래서 그것이 지속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때 그것은 지성이 고려하는 운동체의 정지와 그 [움직임의] 경로course가 시간의 경로라고 부당하게 간주된 다른 운동체의 정지라는 두 잠재적 정지들의 동시성을 확인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지성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건 가능적인 것이건 간에 언제나 부동성들이다. 운동을 일련의 위치들로서 묘사하는 운동에 대한 이러한 지성적 표상을 뛰어넘어보자. 운동을 향해 곧장 나아가 개념을 개입시키지 말고 운동을 직시해보자. 우리는 운동이 단순하며 한 덩어리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보자. 그 운동이 이론의 여지없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이 운동들 가운데 하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운동과 일치하도록 해 보자. 이 경우 우리는 운동성을 그 본질에 있어서 포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불가분적 연속성으로서의 지속을 갖는 어떤 노력과 뒤섞인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공간이 주파될 것이기 때문에, 도처에서 고정성을 찾는 우리의 지성은 사후에 (마치 운동을 부동성과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양) 운동이 이 공간 위에 덧붙여지며, 운동체는 그것이 주파하는 선 위의 각각의 점에 차례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기껏해야 우리는 만일 운동체가 더 일찍 멈추었더라면, 만일 우리가 더 짧은 운동을 목적으로 완전히 다른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운동체가 거기에 존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운동 속에서 일련의 위치들만을 보게 되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 그 때 그 운동의 지속은 각각의 위치들에 상응하는 “순간들”로 분해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간들과 운동체의 위치들은 운동과 지속의 연속성 위에서 우리의 오성이 취한 순간성들에 불과하다. 이 병렬된 상vue들을 통해 사람들은 언어의 요구들에 복종하고, 결국에는 계산의 요구들에 복종하는 시간과 운동의 실천적인 대용품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위적인 재구성일 뿐이다. 시간과 운동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변화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 오성은 변화를 불변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간주된 잇따르고 구분된 사태들로 분해한다. 이 각각의 상태들을 더 가까이서 고려하고, 그것들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그것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물을 것인가? 재빨리 오성은 그 상태를 더 짧은 일련의 상태들로 대체한다. 이 더 짧은 상태들은 필요한 경우 또다시 분해될 것이고, 이 작업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지속의 본질은 흐르는 것이고, 안정적인 것과 안정적인 것을 연결하는 것으로는 결코 지속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왜 보지 못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실재적인 것은 변화를 따라 우리가 취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상태들”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흐름이며, 변이의 연속성이고, 변화 자체이다. 이 변화는 불가분적이고, 그것은 심지어 실체적이기까지하다. 만일 우리의 지성이 고집스럽게 그것을 근거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지지물을 덧붙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성이 그것을 일련의 병렬된 상태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수성은 인위적인 것이며, 거기에 다시 세워진 통일성도 역시 인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단지 변화, 끝없이 뻗어나가는 지속 속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에 밀착해 있는 변화의 끊임없는 충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찰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수많은 의심과 동시에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형이상학의 문제들이 아마도 잘못 제기되어 왔다고, 그러나 정확히 이런 이유로 그것들이 “영원하다”고, 즉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형이상학은 엘레아의 제논이 우리의 지성이 생각하는 대로의 운동과 변화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지적했던 날 시작되었다. 고대와 근대 철학자들의 주요한 노력은 운동과 변화에 대한 지성적 표상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난점들을 점점 더 치밀한 지성적 작업을 통해 극복하고 회피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형이상학은 사물들의 실재성을 시간 너머에서, 움직이고 변하는 것 너머에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감관과 의식이 지각하는 것 밖에서 찾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형이상학은 단지 개념들에 대한 다소간 인위적인 배열, 가설적 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선다고 자처했다. 실제로 그것이 하는 일은 움직이고 충만한 경험, 점점 더 깊이 연구할 수 있고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 찬 경험을, 이 동일한 경험으로부터 끌어낸,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경험의 가장 피상적인 층들로부터 끌어낸 고정되고, 메마르고, 공허한 추출물, 즉 추상적인 일반 관념들의 체계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나비가 나오게 될 고치에 대해 말하면서 날아다니고, 변화하고, 살아 있는 나비가 그것의 존재이유와 그 완성을 그 껍데기의 불변성에서 찾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고치를 풀어 번데기의 잠을 깨워보자. 운동에 그 운동성을, 변화에 그 유동성을, 시간에 그 지속을 되돌려주자. 해결 불가능한 “위대한 문제들”이 껍데기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 문제들은 운동에도, 변화에도, 시간에도 관계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그것들이라고, 혹은 그것들의 등가물이라고 잘못 여기던 개념적 고치에만 관계할지도 모른다. 그때 형이상학은 경험 자체가 될 것이다. 지속은 그것인 바대로, 연속적 창조로, 새로움의 끊임없는 분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운동과 변화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표상이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만일 운동이 일련의 위치들이고 변화가 일련의 상태들이라면, 시간은 구분되고 병렬된 부분들로 구성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 부분들이 잇따른다고 말하지만, 그 때 이 잇따름은 영화 필름의 이미지들의 잇따름과 유사하다. 필름은 전개되는 것에서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로도 열 배, 백 배, 천 배 빠르게 전개될 수 있다. 그것이 무한히 빠르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영사기 밖에서의) 그 전개가 순간적인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동일한 이미지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된 잇따름은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기서 무언가를 생략한다. 그것은 결핍을 나타낸다. 그것은 필름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대신 그것을 이미지들로 끊어낼 수밖에 없는 우리 지각의 나약함을 표현한다. 요컨대 이렇게 이해된 시간은 단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줄지어 있으며, 더욱이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다고 가정된 관념적 공간에 불과하다. 지속의 전개는 이러한 불완전성 자체, 부정적인négative 양의 덧붙여짐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오성의 요구들, 언어의 필요들, 과학의 상징주의에 따르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들 중 누구도 시간의 적극적인positif 속성들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잇따름을 이루어지지 않는 공존인 것처럼, 지속을 영원성의 상실인 것처럼 다루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근본적 새로움과 예측 불가능성을 표현하는데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기에 기인한다. 나는 단지 현상들과 사건들 간의 연쇄가 매우 엄격하여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고 믿는 철학자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철학자들은 미래가 현재 속에 주어져 있으며, 이론상 미래는 현재 속에서 가시적이며, 결과적으로 미래는 현재에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믿었던 소수의 철학자들조차 그것을 둘 혹은 그 이상의 선택지들 사이에서의 단순한 “선택”으로 환원시켰다. 마치 이 선택지들이 사전에 그려진 “가능적인 것들”인 양, 그리고 의지가 그것들 중 하나를 “실현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인 양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깨닫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새롭고 어떠한 방식으로도, 심지어 순수한 가능성의 형태로도 그 실현에 앞서 선재할 수는 없을 행동을 그들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유로운 행위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창조, 새로움, 혹은 예측불가능성을 상상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지속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경우에서도 내일 수행할 행위를 오늘 떠올리도록 해 보자. 당신의 상상은 아마도 수행할 운동을 환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을 수행하면서 생각하고 경험할 것 중에서 오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내일 그때까지 당신이 체험했을 모든 삶뿐만 아니라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거기에 덧붙이게 될 것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그것이 가져야 하는 내용으로 미리 채우기 위해서는, 오늘과 내일을 분리시키는 바로 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심리학적 삶의 내용을 바꾸지 않은 채로는 그로부터 한 순간도 감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멜로디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로 멜로디의 지속을 줄일 수 있는가? 내적 삶은 이 멜로디 자체이다. 따라서 당신이 내일 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할 때, 당신이 예견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행할 행동의 외형에 불과하다. 그것의 내부를 사전에 상상해보려는 모든 노력은 자꾸만 뻗어나가 결국에는 그 행위가 수행되고 더 이상 예측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게 될 지속을 요구한다. 만일 행동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즉 행동이 수행되는 순간에 그것이 외적인 묘사는 물론 내적인 채색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면, 이것은 어떠할 것인가?

따라서 그 연속적 국면들이 일종의 내적 성장을 통해 상호 침투하는 진화와 그 구분되는 부분들이 서로 병렬되는 전개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부채는 점점 더 빨리, 심지어는 순간적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펼쳐놓는 것은 언제나 비단 위에 미리 수놓아져 있는 동일한 자수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인 진화는 조금이라도 가속되거나 감속된다면 내적으로 완전히 변형된다. 그것의 가속 혹은 감속이 정확이 이러한 내적 변형이다. 그것의 내용은 그것의 지속과 동일한 것이다.

수축할 수도 없고, 연장할 수도 없는 이러한 지속을 살아가는 의식들의 옆에 시간이 단지 스쳐지나갈 뿐인 물질적 체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거기서 잇따르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부채의 전개라거나 혹은 더 정확히는 영화 필름의 전개라고 실제로 말할 수 있다. 미리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능성의 형태로 그 실현에 앞서 미리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것이 천문학, 물리학, 그리고 화학이 연구하는 체계들이다. 물질적 우주는 그 총체에 있어서 이러한 종류의 체계를 형성하는가? 우리의 과학이 그것을 가정할 때, 그것은 단지 우주 속에서 계산 불가능한 모든 것을 등한시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등한시하지 않으려는 철학자는 우리의 물질적 세계의 상태들이 우리 의식의 역사와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우리의 의식이 지속하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의 상태들은 실재적 지속과 어떤 방식으로건 결부되어야 한다. 이론상, 완전히 계산 가능한 한 체계의 잇따르는 상태들이 그려진 필름은 거기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어떤 속도로건 전개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속도는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필름의 전개는 우리의 내적 삶의 특정한 지속에 상응하며, 다른 지속에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개되는 필름은 필름의 운동을 규제하는 지속하는 의식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한 잔의 설탕물을 준비하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기다림의 필연성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시간이 단지 추상, 관계, 수일 뿐인 체계들을 잘라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우주 자체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우주를 그 자신은 비유기적이지만 유기적 존재자들과 뒤섞여 있는 그 총체로서 포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의식의 상태들만큼이나 새롭고, 독창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형태들을 끊임없이 띠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지속 속의 잇따름과 공간적 시간 속의 병렬, 진화와 전개, 근본적 새로움과 선재하는 것들의 재배열, 결국 창조와 단순한 선택을 구분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이 구분을 한 번에 너무 많은 측면에서 조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로 이해된 지속 속에는 단순히 실재성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다고 말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만일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적이기 이전에 그것은 가능적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더 가까이서 살펴보자. 당신은 “가능성”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말장난하면서 두 의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음악가가 교향곡을 작곡할 때, 그의 작품은 실재적이기 이전에 가능적이었는가? 그렇다. 만일 그 말이 교향곡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 말의 이러한 완전히 소극적인 의미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행한다. 사람들은 생겨나는 모든 사물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어떤 정신에 의해 사전에 인지될 수 있었으리라고, 그리고 그 사물은 이런 식으로 그 실현에 앞서 관념의 형태로 선재했으리라고 상상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의 경우 부조리한 생각인데, 왜냐하면 음악가가 자신이 만들어낼 교향곡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관념을 갖게 되자마자, 그의 교향곡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유 속에서도, 하물며 비인격적이건 단순히 잠재적이건 간에 우리의 사유에 비교될 수 있는 어떤 사유 속에서도, 교향곡은 실재적이기 이전의 가능적인 성질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식적이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자들과 함께 취해진 우주의 임의적 상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가장 위대한 거장의 교향곡보다도 더 새로움과 근본적인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는 개념화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념화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능성의 상태로 실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어떤 지성 속에 형상화되어 있다는 확신은 언제나 존속하고 있다. 이 환상을 깊이 검토하면, 우리는 이 환상이 우리 오성의 본질에 기인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정해진 순간들에 발생한다. 사물이나 사건의 현현을 확인하는 판단은 그것들 이후에만 올 수 있다. 따라서 그 판단은 자신의 날짜를 갖는다. 그러나 이 날짜는 모든 진리는 영원하다는, 우리 지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리로 인해 곧장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판단이 지금 참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사실상 제기되기 이전에, 권리상 그 스스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참된 단언에 회고적인 소급 효과를 부여하게 된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것에 역행 운동을 새겨 넣는다. 마치 어떤 판단이 그것을 구성하는 항들에 선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항들이 그것들이 표현하는 대상들의 출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예술이나 자연이 발명한 진정으로 새로운 형상에 대해 말할 때,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 그것의 실재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창조되지 않았다는 듯이!

이러한 환상의 결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간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참된 판단의 회고적 효과에 대한 믿음에, 즉 일단 제시된 진리가 시간 속에서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역행 운동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완수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실재는 무한히 먼 과거 속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렇게 그것은 그것의 실현 이전에도 가능성의 형태로 선재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 거기서부터 과거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오염시키는 오류가 나온다. 거기서부터 모든 경우에서 미래를 예측할 것이라는 우리의 포부가 나온다. 예컨대 우리는 내일의 예술, 내일의 문학, 내일의 문명이 무엇일까를 자문한다. 우리는 사회 진화의 굴곡을 개략적으로 형상화한다. 우리는 사건들의 세부사항을 예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물론, 우리는 실재가 일단 완수되기만 하면, 언제나 그것을 그에 선행하는 사건들과 그것이 발생했던 상황들에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실재(물론 임의의 실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가 다른 측면에서 취해진 동일한 상황들과 동일한 사건들에 동일하게 결부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현재의 모든 측면들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모든 방향으로 연장시킴으로써 지금 모든 가능성들을 획득한다면 선택된 것으로 가정된 미래가 그것들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먼저 이러한 연장 자체는 순전히 창조되었으며 절대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질의 추가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현재의 “측면”은 우리의 주의가 그것을 고립시켜 현행적인 상황들의 총체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절단을 수행했을 때에만 “측면”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모든 측면들”이, 이후의 사건들에 의해 우리의 주의가 거기에 행할 수 있는 절단들의 본원적인 형태들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한단 말인가? 따라서 이 측면들은 단지 회고적으로만 이전의 현재, 즉 과거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현재 속에서, 즉 그것이 아직 현재적이었을 때에는, 기껏해야 미래의 음악가들의 교향곡이 우리의 현행적 현재 속에서 갖는 실재성 이상을 갖지 못한다.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19세기 낭만주의를 고전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낭만주의적 요소들에 결부시키는 것은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낭만주의적 측면은 낭만주의가 일단 나타난 후에 그 낭만주의의 회고적 효과를 통해 밝혀진 것에 불과하다. 만일 루소Rousseau,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비니Vigny,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없었다면, 이전의 고전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낭만주의적 요소들은 결코 포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고전주의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요소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특정한 측면의 절단을 통해서만 실현되며, 어떤 예술가가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그의 상상력에 따라 무형의 덩어리를 조직화해서 지각할 재미난 도안dessin이 구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절단은 낭만주의의 출현 이전에는 그 구체적 형태를 가진 채로 고전주의 문학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도안이 이 구름에 작용하는 것처럼, 낭만주의는 회고적으로 고전주의에 작용한다. 그것은 회고적으로 과거 속에 자신의 고유한 전조와 자신의 선조가 자기 자신에 대해 행하는 설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현재의 실재 속에서 미래의 역사가가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을 정확하게 주목하려면 운 좋은 우연, 예외적인 행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역사가가 우리에 대한 우리의 현재를 검토할 때, 그는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설명,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 새로움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창조임에 틀림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본받아 사태들 중에 기록해야 할 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지표에 따라 현재적 실재를 절단함으로써 사태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근대 시기의 주요한 사태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당대 사람들이 기술했던 대로의 과거 속에서 우리가 그것의 전조적 징후들signes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에게는] 가장 흥미로울 지표들은 당대인들이 인류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조건에서만 그들에게 주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이러한 궤도trajet의 방향은 다른 방향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방향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궤도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개념화하고 실현시켰던 사람들의 전진 운동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조적 징후들은 우리가 지금 그 경로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경로가 완수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징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사태들이 발생했을 때에는 경로도, 그 방향도, 결과적으로 그 종착점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태들은 아직 징후들이 아니었다. 더 멀리 나아가 보자.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들이 당대 사람들에 의해서는 무시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 사태들 중 대다수는 이 시기에는 아직 사태들로서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사태들은 우리가 지금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intégralement 재생시키고, 그 당시의 실재의 불가분적 덩어리 위로 우리가 민주주의적 관념이라고 부르는 매우 구체적인 형태의 조명등을 이리저리 비추는 경우에, 우리에 대해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거장의 소묘만큼이나 독창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윤곽들에 따라 전체 속에서 이렇게 조명되고 이렇게 절단된 부분들은 민주주의의 예비적 사태들일 것이다. 요컨대 선조들이 그들의 시기에 행한 본질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이미 눈앞에 형상화되었어야 할 것이며, 실재적 지속이 존재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가 지나간 우리의 진화에 비추어 고려하는 것들, 심지어 지나간 우리의 진화에 비추어 그 윤곽을 그리는 것들이지, 미래가 새로운 관심의 창조에 의해, 그들의 주의에 새겨진 새로운 방향에 의해 그들을 흥미롭게 할 것들이 아니다. 결국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역사적 기원들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대인들이 과거를 비결정적인, 따라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관련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경우에만, 총체적으로 재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황색과 같은 하나의 색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주황색 말고도 빨간색과 노란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황색을 어떤 관점에서는 노랗고 다른 관점에서는 빨간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노랑과 빨강의 혼합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황색이 그것이 지금 그러한 바대로 존재하는 반면, 노란색도 빨간색도 아직 세계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주황색은 이미 이 두 색들의 혼합물일 것인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신경적이고 대뇌적인 전체 메커니즘과 동시에 의식의 특정한 배치들을 함축하는 빨간색의 감각과 노란색의 감각은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삶의 창조물들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행성에도 다른 어떤 행성에도 이 두 감각들을 경험하는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황색의 감각은 단순한 감각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은 결코 구성요소나 측면들로서 형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랑과 빨강의 감각들이 오늘날 주황색의 감각을 구성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만큼,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에 참여할 것이다. 심지어 그 둘 중 어떤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더라도, 그것들은 거기에 잠재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논리가 회고rétrospection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행적 실재성을 가능성이나 잠재성의 상태로 과거 속으로 되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보기에 지금 혼합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러했어야 한다. 우리의 습관적 논리는, 하나의 단순한 상태가 단지 진화가 그것을 고찰하는 새로운 관점들을 창조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그것을 관념적으로 분석하여 나온 다양한 원소들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인바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복합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논리는, 만일 이 원소들이 실재들로서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이전에 가능성으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어떤 사물의 가능성은 (이 사물이 선재하는 원소들의 완전히 기계적인 배열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단 나타난 실재가 무한한 과거 속으로 드리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논리가 현재 속의 실재성으로 생겨난 것을 가능성의 형태로 과거 속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논리가 무언가가 불쑥 생겨난다거나 어떤 것이 창조된다는 것, 시간이 어떤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형태나 새로운 질 속에서 그것은 예전 것의 재배열만을 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 논리에게 모든 다양성은 유한한 수의 단일성[단위]들로 분해된다. 그것은 구분되지 않고 심지어 나누어지지 않는 다양성, 순수하게 강도적이거나 질적인 다양성, 완전히 그것인바대로 남아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찰하는 새로운 관점들이 세계 속에 나타남에 따라 무수히 증가하는 수의 원소들을 포함하게 되는 다양성의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포기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장하고,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을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진화가 창조적인 [형태를 띠는] 지속에 적용시켜야 한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나아감에 있어 선택한 방향이다. 우리가 순수 지속을 되찾기 위해 위치했던 중심으로부터 다른 많은 방향들이 우리 앞에, 우리 주위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방향에 전념했다. 우리의 방법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유의 문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철학이 너무나도 자주 그 응고된 표면만을 붙잡는 것처럼 보였던 내적 삶의 흐름에 다시 위치했다. 이 방향에서는 소설가나 도덕가가 철학자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았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의 강요에 의해 단지 간간이 장애물을 돌파했을 뿐이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방법론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책[『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에서 이 주제에 대한 몇몇 지침들만을 제시했고, 우리가 - 과거가 현재 속으로 수축되는 – 행동의 평면과 과거의 총체totalité가 불가분적이고 파괴불가능한 채로 펼쳐지는 꿈의 평면을 비교했던 두 번째 책[『물질과 기억』]에서도 여전히 암시들에 그쳤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인 것 속에서,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해 영혼에 대한 탐구를 감행하는 일이 문학에 속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보기에 철학의 과업은 여기서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자신에 의한 자기관찰의 일반적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내적 관찰은 우리가 들인contractées[수축시킨] 습관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물론 주요한 변질은 자유의 문제를 만들어낸 변질 – 지속과 연장의 혼동으로부터 기인한 거짓-문제 - 이다. 그러나 동일한 근원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문제들이 있다. 우리 영혼의 상태들은 우리에게 셀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리된 상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측정 가능한 강도를 가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들 각각을, 그리고 그 전체를 그것들을 지칭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것들을 완전히 은폐하는 단어들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것들에게 단어 자체의 고정성, 불연속성, 일반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붙잡아 찢어버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덮개이다. 그러나 먼저 그것의 형태와 구조를 검토하고, 또한 그것의 목적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본질상 공간적이며, 사회적 효용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간성과 이렇게 완전히 특별한 의미의 사회성이 여기서 우리 인식의 상대성의 진정한 원인들이다.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장막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직접적인 것으로 돌아가 절대를 접촉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찰들로부터 지금은 다행히도 거의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에는 무모한 것으로 보였던 결론들이 도출되었다. 이 결론들은 심리학으로 하여금, 학설로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방법으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연합론과 결별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론들은 우리가 단지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또 다른 단절을 요구했다. 연합론의 옆에는 칸트주의가 있었고, 그것은 때로 연합론과 결합되어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고 일반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콩트의 실증주의나 스펜서의 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칸트적인 개념에 반대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칸트는 우리의 사유가 작용하는 질료가 공간과 시간 속에 미리 흩어져 이런 식으로 인간을 위해 특별히 준비되어 있음을 밝혀냈다고 여겨진다. “물 자체”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며, 거기에 다다르려면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직관적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분석은 적어도 실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인격이 그 자연적인 순수성 속에서 획득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이끌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 인식의 질료들은, 후에 심리학의 잔해를 우리의 의식이라는 인공적인 그릇 속에 던져 넣게 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전능한 기만자malin génie에 의해 창조되거나, 분쇄되고 왜곡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커다란 편의를 위해 들였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즉시 “즉자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다른 실재들에 대해서도, 어쩌면 심지어 모든 실재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 형이상학의 비상을 저지했던 “인식의 상대성”이 본원적이고 본질적이었는가? 오히려 그것은 우연적이고 습득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순전히 지성이 실천적 삶에 필요한 습관들을 들였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이 습관들이 사변의 영역으로 옮겨지면, 우리는 왜곡되거나 재편된, 요컨대 정돈된arrangé 실재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정돈은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만들어낸fait 것들을 우리는 풀어낼défaire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으로 돌입한다. 따라서 우리가 제거했던 것은 단지 하나의 심리학 이론, 연합론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 칸트주의와 같은 일반적 철학과 거기에 덧붙여진 모든 것이었다. 양자 모두는 그 당시에 개략적으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우리에게는 철학과 심리학이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impedimenta처럼 보였다.

그러면 전진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심리학적 기능들에 대한 연구에, 그러고 나서는 심리-생리학적 관계에 대한 연구에, 그러고 나서는 생명 일반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면서 언제나 직접적인 시각을 추구하였고, 이렇게 사태 자체와는 관련이 없고 단지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번역하는 것에만 관련하는 문제들을 제거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외관상 너무나도 단순한 방법이 극도로 복잡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첫 번째 귀결로 갖는 그 역사를 다시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다음 장에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그것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정확성을 유념한다고 말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정확성이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획득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막을 내려보자. 그 이유는 부정확성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을 너무 넓은 유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게다가 사물들과 유는 선재하는 단어들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미 만들어진 개념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만일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시각이 제공된다면, 그래서 만일 실재의 분절들을 고려함으로써 이 실재를 분할한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형성해야 할 새로운 개념들은 이번에는 대상의 정확한 치수에 맞게 재단될 것이다. 부정확성은 이 개념들이 다른 대상들로 확장되는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른 대상들은 그 일반성에 있어서는 이 개념들에 동등하게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들을 인식하고자 할 때에는 이 개념들 밖에서, 그 자체로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