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2월 26일 레옹 브룅슈빅에게 보내는 편지

1903년 2월 26일 

레옹 브룅슈빅에게 보내는 편지  


먼저 당신의 세 가지 주장 중 첫 번째 주장[물리적 결정론과 정신적 자유의 양립]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정신적 자유에 대한 긍정과 물리적 결정론에 대한 부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당신의 입장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에는 이러한 부정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부정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긍정에 개입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시간 밖의 자유, 의식 밖의 자유, 그러니까 시간 속에서 지각되고 의식에 현전하는 행동 밖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점이 함축하는 바는, (신체로 고찰되건 정신으로 고찰되건) 의식적 존재의 앞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수학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이러한 등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결정론은 타성적 물질 속에서 근본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론은 생명과 의식, 즉 우리의 우주에서는 서로 동외연적일 두 항이 출현하자마자 부분적인 비결정론에 자리를 양보합니다. 살아 있는 신체는 가장 단순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타성적 물질의 결정론을 점점 더 잘 우회하고 세계 속에 점증하는 자유를 삽입할 수 있도록 점점 더 유연해지는 그만큼의 메커니즘들입니다. 근본적 결정론이 도처에 있지 않다면 어디에도 결정론이 없다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결정론과 비결정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로서는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만큼 우주 속의 이곳저곳에서 “비결정성의 영역들”을 구분해내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리적 우발성contingence은 결코 순수한 부정, 즉 결정론의 단순한 부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실정적인 기여, 즉 유기화가 비유기적 물질에 대해 거둔 하나의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긴 하지만) 승리입니다.


당신의 두 번째 입장[의식의 직접소여에 대한 비판]과 세 번째 입장[의도 혹은 동기를 갖추지 않은 자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한 치의 의심 없이 사람들은 “정신적 자유의 관념과 능력들의 심리학을 하나의 공통 운명으로 통합하는 것은 위험하며, 결정론을 지성적인 것의 평면으로 쫓아내고 심리적 인과성의 틀을 넘어서는 알 수 없는 신비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당신의 입장에 동의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전적으로 이 입장에 동의합니다. 자유는, 그것이 헛된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심리적 인과성 자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리적 인과성이 행위와 그 다양한 선행조건 사이의 등가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심리적 인과성과 모든 인과성 일반을 물리적 인과성을 모델로 하여 표상하는 일이며, 우회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조금 전에 거부했던 보편적인 수학적 결정론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요컨대 고유하게 심리적인 인과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실재적인 심리적 인과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리적 인과성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리적 인과성이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의 이행 속에서 무엇도 창조되지 않음을 함축하는 반면, 심리적 인과성은 반대로 행위 자체를 통해 선행 조건들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창조됨을 함축합니다. 당신은 이 창조가 관념들로 표현될 수 없다면 신비로운 것이고 “우리는 우리를 결정했던 근거들에 대한 더 명석한 의식을 가질수록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나는 당신의 입장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거들이 우리를 결정했던 것은 단지 행위가 잠재적으로 완수된 한에서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창조 전체는 이 근거들이 결정적인 것이 되도록devenu 만드는 진전progrès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 진전 자체가 하나의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당신의 입장에 동의할 것입니다. 단지, 이 하나의 근거가 그것이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다른 근거들과 동일한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면, 이 근거를 이 다른 근거들의 수에 포함시키고 이 모든 근거들의 진전에 새로운 근거를 찾아줘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근거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진전은 불가분한 하나로 고찰된 인격성 전체의 진전입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근거들과 이 근거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근거들, 관념이건 느낌이건 우리의 모든 심리적 상태 일반은 여기서 진정으로 행동하는 실재인 우리의 인격성의 운동적 통일성에 대해 (우리 의식 자신이) 밖으로부터 취한 그만큼의 시각들vues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의식이 분석을 행할 때 취하는 시각들입니다. 분석이 계속될수록 근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한 근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 무한성은 정확히 밖으로부터 취한 시각들을 가지고 하나의 실재를 구성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창조적 자유에 대한 직관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를 의식이 전체의 (동적인) 통일성에 대해 밖으로부터 취한 도식적인 일련의 시각들을 통해 단순한 전체tout simple로부터 떼어내는 이러저러한 상태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나는 자유를 직관의 “평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 평면의 밖에서는 분석의 영역에 위치하게 될 것이고, 분석은 자유라는 이름 하에 단지 다소간 위장한 필연성만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지성으로부터 의지와 느낌을 분리시키는 자유 관념, 결정론을 지성적인 것의 평면으로 쫓아내는 자유 관념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정확히 누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그것은 제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자유와 결정론을 대립키는 것은, 감정 혹은 의지와 지성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분석을, 안으로부터 체험되고 지각된 실재적 통일성과 그 통일성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시각들의 다양성을, 의식이 “직접적으로 포착한 것”과 매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상징적으로 표상된 것을 대립시키는 것입니다.